​ “하악… 하악….” ​ “후….” ​ 둘 다 한계까지 몰아쉰 숨이, 폐를 가득 채운다. 훈련장 한쪽은 쑥대밭이 됐고, 유하나의 검은 완전히 부러진 상태였다. ​ 물론 동백검은 아니다. ​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놀랐다. ​ 비무는 어디까지나 마나를 제한한 검술의 숙련도를 겨루는 일종의 연습. 유하나가 의미한 비무는 그런 것이었다. ​ 그 제한된 범위 내에서 보여준 그녀의 화접검에 대한 숙련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 정말 한 끗 차이. ​ 내가 십 년을 들여 연마한 기술. 그걸 고작 몇 달간 익힌 제자가, 턱밑까지 따라왔다. ​ “……대체 폐관수련 때 뭘 한 거야?” ​ 숨을 몰아쉬며, 나는 웃음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 유하나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 그녀의 도복은 어깨 쪽이 살짝 벗겨져 있다. 가쁜 호흡에 따라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고, 땀에 젖은 천이 몸에 달라붙어있다. ​ 도복의 앞섶은 살짝 풀려, 들숨마다 상체가 고르게 들썩거렸다. 언뜻 관능적으로 느껴질 정도. ​ “졌어…요.” ​ 유하나는 그렇게 말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 나는 대답 대신, 그녀 옆으로 걸어가 천천히 앉았다. ​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 바닥에 던져둔 검집, 아직 식지 않은 열기. 그 속에서도 유하나는 작게 웃으며 자신의 손목을 내보였다. ​ “자.” ​ 그리고 싱긋 웃으며 덧붙인다. ​ “탈락시켜 줘.” ​ 말이 짧아졌다. 지금부터는 제자 유하나가 아니라, 학생 유하나였다. ​ “굳이 탈락할 필요는 없잖아?” ​ 진심이었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기술의 깊이였고, 그건 이미 충분히 느꼈다. ​ 유하나가 벌써 탈락하는 건 아쉬웠다. ​ “아니. 탈락시켜 줘. 그러기 위해 도전한 거니까.” ​ 나는 그 말에 웃었다. ​ 기술적인 숙련도는 충분히 확인했다. 그녀는 지금껏 누구보다도 진지했고, 성실했으며, 무엇보다도 준비되어 있었다. ​ 나는 결정을 내렸다. ​ 전투 내내 흐트러짐 없이 집중하던 눈빛, 그 안에 담긴 의지까지. 마나까지 운용했을 때의 그녀의 강함과 성장이 기대된다. ​ 이걸로… 선별 완료다. ​ “하나야.” ​ 유하나는 여전히 누운 채,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 “어?” ​ “여름방학 때 혹시 어디 가?” ​ “아니. 아마 아버지랑 훈련을….” ​ “그럼 아버님께 전해드려. 훈련 못 한다고.” ​ “어?” ​ 나는 짧게 웃었다. ​ “여름방학에 나랑 어디 좀 가자. 뭐, 여행 같은 거야.” ​ 그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그리고 얼굴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 입을 열려던 찰나. ​ - 띡. ​ 내 손가락이 그녀의 워치를 터치했다. ​ “이따 보자.” ​ [10 pt!] ​ 탈락 처리가 완료되며, 유하나의 몸에 부드러운 광이 번졌다. ​ “잠, 잠깐! 어디로? 무슨 여행? 해외? 중국? 미국?!” ​ 유하나는 허둥대며 반쯤 사라지는 몸으로 내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실루엣은 이내 증발하듯 흩어졌다. ​ “어떻게 알았지….” ​ 여행의 장소는 중국이었다. ​ 나는 짧게 숨을 고르며 시계를 확인했다. ​ [공수 교대까지 남은 시간 12:21] ​ 비무만 30분을 넘게 했다. ​ “슬슬… 가야지.” ​ 나는 훈련장을 나섰다. 다음은 약속 장소인 천무관 앞이었다. ​ ​ ​ ​ *** ​ ​ ​ ​ 천여울이 옆에서 걷는 윤채하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 “몇 명 잡았는데.” ​ “다섯.” ​ “난 일곱.” ​ “… 어쩌라고.” ​ 윤채하와 천여울은 시험 중간에 마주쳤다. 스폰 포인트가 가까웠고, 둘 모두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 ​ 현재 시각은 공수 교대 5분 전. ​ 늘 약속한 시각에 정확히 나타나는 정해인의 성격상,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때였다. ​ “…….” ​ “…….” ​ 말은 없지만, 발걸음은 나란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 - 콰아아아앙! ​ 산맥 아래쪽, 저 멀리서 검은 연기와 함께 폭발음이 터졌다. 폭발의 규모로 보아, 일반 학생들의 짓은 아니었다. ​ “뭐야?” ​ 천여울이 중얼거렸다. ​ 그 순간. 윤채하의 눈이 빛났다. 아 프리오리를 발동했다. ​ 공간의 흐름을 읽는다. 지금 이 소란의 중심에 있는 존재. 윤채하는 입을 다문 채 중얼거렸다. ​ “… 유세린.” ​ 그녀들이 향하는 방향 앞에는 유세린이 있었다. ​ 수비팀이 주제도 모른 채, 그녀에게 덤볐던 모양이다. ​ “다른 길로 가자.” ​ 윤채하가 낮게 말했다. 정해인이 당부했었다. 유세린과는 절대 마주치지 말아라, 마주쳐도 피해라. ​ 수비 때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공격일 때 만나면, 무조건. ​ 그러나 천여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 “음….” ​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만 살짝 돌렸다. ​ 돌아가기엔 이미 늦다. 정해인은 늘 약속 시간에 정확히 도착한다. 해인이가 기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 게다가 유세린? ​ 그녀는 유세린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 전 회차의 그녀는 이미 로터스의 길드장에 의해 빠르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해인이 강하다하면 강한 건 맞으나 괜히 오기가 생겼다. ​ ‘얼마나 강하길래?’ ​ 최근 들어서, 자꾸 꼬리치는 느낌이랄까. 천여울의 감각은 날카로웠다. ​ “… 그냥 갈래.” ​ 천여울이 말했다. ​ 솔직히, 윤채하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정해인을 만나 개선된 것이지, 그녀는 고집이 굉장히 센 편이다. ​ 게다가 저번에도 그렇고, 자꾸 정해인에게 접근하는 그녀를 못마땅하던 찰나였다. ​ “… 나도.” ​ 둘의 눈이 마주쳤다. ​ 묘하게 공기 속에서 감정이 교차했다. ​ 의외로, 뜻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 둘은 동시에 피식 웃었다. ​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소란의 중심을 향해 걸었다. ​ ​ ​ ​ ​ *** ​ ​ ​ ​ ​ [공수 교대까지 남은 시간 00:30] ​ 천무관에 도착하자, 워치의 타이머가 30초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 “얘네 왜 안 와?” ​ 정작 보자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정작 시간은 안 맞춘다. ​ 곧 공격팀이 쏟아져 들어온다. 늦기 전에 보스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 첫 번째로 노릴 보스는 도한성. 그는 천무관 뒷산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 은색 방울인 그를 공략하면 큰 점수를 얻을 수 있다. ​ 사실, 공격팀보다 위험한 건 따로 있다. 유세린. 그녀는 검은 방울로써 정해진 구역 없이 이동하며 돌아다닐 수 있으니까. ​ 그 순간, 워치에서 알람이 울렸다. ​ [공수 교대 시작.] [현재 인원] [청팀 184명] VS [백팀 248명] [점수 현황] [380 점] VS [660 점] [5분 후 공수가 교대됩니다.] ​ 딱 예상한 숫자다. 백팀에서 두 명 정도 탈락할 거라 짐작은 했었다. 아마도 보스에게 덤볐다가 골로 간 학생들일 것이다. ​ 공격팀 첫 탈락 영광의 대상이 됐음에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 그때, 워치에 탈락자 명단이 올라온다. ​ 청팀 쪽은 유하나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름도 못 들어본 인원들. 대부분 낮은 순위의 인원들이 탈락한 것 같다. ​ 나는 습관처럼 백팀 탈락 명단을 열어봤다. ​ 대체 누굴까. 괜히 가만히 있는 보스몹을 건드리다 탈락당한 두 얼간이는. ​ [랭킹 4위 천여울] [랭킹 없음 윤채하] ​ “…….” ​ 나는 눈을 비볐다. 잘 못 본 거라 믿고 싶었다. ​ “…뭐?” 소리까지 냈다. ​ 요즘 사이가 좋다 좋다 했더니. 아주 사이좋게 골로 간 모양이다. ​ “아니, 대체 뭘 했길래….” ​ 그리고 친절한 가온은 그런 궁금증까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탈락 사유를 친절하게 띄워줬다. ​ 그녀들의 탈락 사유는…. ​ [탈락 사유: 보스] ​ 그녀 둘은 공격이었기 때문에, 모든 보스가 제한이 풀린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녀 둘을 깔끔하게 작살 낼 만한 교관은 많지 않다. ​ … 딱 한명이 떠오른다. ​ “… 유세린이네.” ​ 순간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유세린에 대해 말했을 때 둘의 표정. ​ 둘의 표정은 모두 꼬롬했다. ​ ‘네가 말하니까 듣기는 하겠는데, 딱 듣기만 할게.’ ​ 딱 이정도 느낌.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꼴이 좋아.” ​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 유세린은 검은 방울. 그렇다고 무조건 공격하진 않는다. ​ 단순히 마주쳤다고 싸우진 않는다는 뜻이다. ​ 일부러 동선을 겹치게 해, 그녀의 영역으로 들어갔거나. ​ 혹은, 선제공격했다는 소리. ​ 두 경우 모두, 탈락해도 싸다. ​ 나는 도한성을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집어치웠다. ​ “후우….” ​ 혼자서는 피곤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 [140 PT] ​ “이거나 써야겠다.” ​ 나는 워치를 띄워, 표시한 히든 장소에 마킹을 찍었다. ​포인트 좀 쓸 차례였다. ​ 부활? ​ “아니.” ​ 갑자기 마음이 싹 사라졌다. ​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 “푹 쉬어 그냥.” ​ ​ ​ ​ *** ​ ​ ​ ​ “아하하!! 아하하하하!!” ​ 공간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 ​ 탈락자 수십 명이 모여 있는 외부 공간 한복판. 모니터에는 여전히 전장에서 움직이는 참가자들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 그 앞에서, 유하나는 박장대소하며 허리를 잡았다. ​ “꼴이 좋아?” ​ 유하나는 손가락으로 둘을 번갈아 가리키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 “아주 서로 당당하게 갖다 처박더니~ 둘이 아주 절친이 다 되셨나 봐요~” ​ 천여울은 입술을 꾹 다물었고, 윤채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 대꾸할 말이 없었다. 유세린이 그 정도일 줄은. 두 사람의 시선은 거대한 스크린에 고정된 상태였다. ​ 그곳에는 정해인이 히든 포인트로 향하는 모습이 찍히고 있다. ​ “… 부활시켜줄 거야 해인이가.” ​ 천여울이 중얼거렸다. 옆에서 윤채하도 끄덕거렸다. 탈락자들은 진행자들에게 들었다. 운 좋게 선택받으면, 부활할 수도 있다고. ​ “그러니까.” ​ 유하나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덧붙였다. ​ “만나자고 약속까지 잡아놓고, 말 한마디 안 듣고 그냥 돌진해서 탈락한 니네를….” ​ 입꼬리를 더 올리며 마무리한다. ​ “살린다고?” ​ 그 말에 천여울과 윤채하는 말없이 스크린을 노려보며, 꽉 다문 입술에 조용히 힘을 줬다. ​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유하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어이 한 방을 날렸다. ​ “같이 여름 방학에 여행 가기로 한, 나를 살리지 않을까?” ​ ““뭐?”” ​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휙 돌아갔다. ​ 유하나는 두 눈을 천진하게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