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어울려요? 아니면 이거?” ​ 유세린은 거울 앞에 선 채, 옷 두 벌을 번갈아 들어 보이며 물었다. ​ 한창, 필드와 전장을 누빌 때 입던 옷들이었다. 기능을 챙기면서도, 외형을 신경 쓴 감각적인 옷들. ​ 비서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두 옷이 아닌, 한쪽 옷걸이에 걸린 짙은 색의 수트를 가리켰다. ​ “아… 저거…?” ​ 비서가 가리킨 것은, 그녀의 암행복이었다. ​ 가장 몸에 잘 맞기는 하지만… 외형은 썩 좋지 않았다. 몸에 짝하고 달라붙는 타이즈에, 짙은 보라색이었으니까. ​ “저건 좀….” ​ “그럼 오른쪽이 낫겠습니다. 조금 덜 위협적이네요.” ​ “어 고마워요.” ​ 유세린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 평소였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시험. 그러나 그녀는 이례적으로 검정 방울로써 직접 시험에 참여하기로 했다. ​ 그녀는 다시 옷걸이에서 짙은 차콜 그레이 코트를 꺼내 들었다. 어깨선을 타고 흐르는 매끄러운 천, 잘록한 허리 라인을 감싸는 커팅. 언제봐도 세련된 디자인이다. ​ “이걸로 하지 뭐.” ​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짧게 덧붙였다. ​ “결정은… 하신 겁니까.” ​ 그 말에 유세린은 옷을 탁탁 털며 답했다. ​ 비서의 말엔, 단순한 옷차림에 대한 뜻만 담겨있지 않았다. 유세린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잠시 거울을 응시하던 그녀가 옷깃을 다듬으며 가볍게 웃었다. ​ “응. 거의요.” ​ 한껏 매만진 코트를 팔에 걸친다. 움직일 때마다 고급스러운 원단이 몸에 닿는다. ​ “그래도 그냥 나갈 수는 없지.” ​ 비서는 고개를 살짝 떨궜다. 자신을 포함해, 부서 안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유세린의 사람들이다. 그녀가 이대로 박차고 나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의 입지는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 그걸 모를 유세린이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히 돌아서며,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걱정하지 마.” ​ 시선이 마주쳤다. ​ “너희 앞길은 내가 책임지고 나갈게.” ​ 언젠가부터, 그녀는 반말이었다. 부길드장 유세린이 아니라, 그저 유세린. 어쩌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언니처럼. ​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이상하리만치 또렷한 확신이 담겨 있다. ​ “붙잡자고 부러지는 건… 내 취향 아니거든.” ​ 그녀는 다시 거울을 봤다. ​ 기대 반, 두려움 반. 새로운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 ​ ​ ​ 가온 중앙 강당, 무대 위 전광판 아래. 수많은 시선이 집중된 그곳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각 팀의 대표자, 앞으로 나와주세요.” ​ 강단 앞으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 청팀의 대표는 홀수 랭킹 1위, 강아린. 백팀의 대표는 짝수 랭킹 2위, 요한이었다. ​ 전통적인 것은 역시, 가위바위보였다. ​ “가위… 바위….” ​ 사회자의 구령에 따라, 두 사람은 손을 들어 올렸다. ​ “보!” ​ 마무리령과 함께 둘 다 손을 내민다. 강아린의 손은 단단히 주먹을 쥐고 있었고, 요한의 손은 두 손가락이 벌어져 있었다. ​ “우오오오오!” ​ 청팀의 환호성이 강당을 가득 채웠다. ​ “청팀은 공격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수비를 먼저 하시겠습니까?” ​ 사회자의 질문에, 강아린은 고민하는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 “수비! 수비부터 하자!” “아냐, 공격부터 가야지!” ​ 청팀 곳곳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 나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봤다. … 뭘 골라도 크게 이상하진 않다. 둘 다 장점이 있다. ​ 수비부터 시작한다면, 시간을 벌 수 있다. 공격팀의 공격이 오기 전까지 보스몹을 공략하며 점수를 축적할 수 있으니까. ​ 반대로 공격부터 시작하면? 인원이 감소되지 않은 상태로, 수비진을 압박해 초반 점수를 뽑아낼 수도 있다. ​ ​ 결국은 운영의 문제다. 잠시 고민하던 강아린이 고개를 들었다. ​ “저는… 수비를 택하겠습니다.” ​ 강아린의 선택은 수비였다. ​ 전광판에 커다란 문구가 떠오른다. ​ [청팀 - 수비 / 백팀 - 공격] ​ 그와 함께, 교관의 안내가 이어졌다. ​ 그렇게 안내 후. ​ “지금부터 5분 뒤, 텔레포트가 시작됩니다. 모든 학생은 방울을 착용한 상태에서 정위치에 서 주시기 바랍니다.” ​ 말이 방울이지, 실상은 워치에 설치된 프로그램이었다. 제압한 후 상대의 워치를 일정 시간 이상 터치하면, ‘딸랑’ 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방울이 탈취된다. ​ 나는 잠자코 워치를 확인했다. 방울이 켜졌음을 알리는 붉은 테두리. 그 위로 남은 시간 카운트가 깜박이고 있었다. ​ 주변의 학생들은 하나둘 장비를 점검한다. ​ “이따 봐.” ​ 천여울이 내게 먼저 말했다. ​ “어.” ​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 옆에서 윤채하도 작게 입을 열었다. ​ 내 옆이었다. ​ “거기로 와야 해.” ​ 약속한 장소는 천무관 앞이다. 첫 번째 공수 교대가 끝나기 전까지는 도착하기로 약속했다. ​ “알겠어.” ​ 그녀들은 곧 자신의 위치로 향했다. 각자 흩어지며 강당의 정해진 전송 원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 나는 마지막으로 워치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표정 없이 내 전송 위치로 걸어갔다. ​ 아래에서 희미한 마법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3초. ​ 2초. ​ 1초. ​ - 치익! ​ 내 시야를 빛이 가르며, 풍경이 마치 찢기듯 갈라졌다. ​ 눈을 뜬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 “… 하.” ​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내가 수업을 듣는 1학년의 강의실이었다. ​ 500명이 넘는 학생들을 랜덤하게 텔레포트시키는 기술이라니. 아마 가온밖에 못 다룰 것이다. ​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에 앉아 있었기에 강의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 그 순간, 강의실 구석, 앞문 옆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 그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왼팔을 뒤로 돌려 완장을 보여준다. ​ “해인아, 나 나 백팀! 너랑 같은 팀이야!” ​ 완장. 내 쪽 팀 색상과 같은 하얀색. 같은 팀이었다. ​ 나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바로 10포인트 얻어가나 했는데 아쉽게 됐다. 참고로 방울을 습득하면 10포인트. 보스는 단계별로 걸린 포인트가 다르지만 기여도별로 점수가 차등 분배된다. ​ 아마… 시험이 끝날 때쯤 150점 정도를 모으면 상위권이 아닐까 한다. ​ “나 갈게! 화이팅!” ​ 눈앞의 학생은 허둥지둥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 나는 천천히 워치를 켰다. ​ [공수교대까지 남은 시간 58:40] ​ 시간은 흘러간다. 이 시간이 끝나면, 공수교대가 시작된다. ​ 나는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 공격의 시간이었다. ​ 넓은 공간에 나왔으나, 거리를 누비는 건 하얀색 완장을 찬 백팀 학생들 뿐이었다. 대부분 여럿이서 뭉쳐 무리로 다닌다. ​ 나도 무리라고 할 만한 무리가 있긴 했지만, 아직 모이기로 한 시간은 좀 남았다. 히든 장소는 지금 갈 이유는 없다. 어차피 포인트가 있어야 쇼핑이라도 하기 때문. ​ 아마 수비 학생들은 각 건물, 그리고 산들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컸다. ​ 혹은 보스를 공략하거나. ​ 다만, 공격팀이 그를 노리고 쉬이 보스 공간으로 갈 수는 없다. 까딱하다 수비팀 학생보다 보스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면…. ​ 리미트가 해제된 보스에게 두들겨 맞고 탈락하게 될 테니까. ​ 나는 가온의 메인 훈련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지도에 따르면 이 근처에는 은색 방울 보스 하나, 동색 보스 하나가 배치돼 있다. 수비 쪽에서도 무조건 이 지역을 탐낼 것이다. ​ 그러니까, 핫할 수밖에 없는 자리다. ​ 나는 그곳에 먼저 도착해 매복했다. ​ “아무도 없나 봐. 조용한데?” ​ “빨리 가자, 보스존 안에만 들어가면 돼.” ​ 예상대로, 여러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 “여기 있는데요.” ​ 나는 자연스럽게 나갔다. ​ “와 씨 깜짝아!” ​ “야… 조용히 해…!” ​ 남성 둘과 여성 둘로 이루어진 조였다. 팔뚝에 찬 완장, 명확한 청색이다. ​ “잠깐 근데… 혼자야?” ​ “어.” ​ 그러나 그들은 내가 혼자인 걸 확인했는지, 표정을 풀기 시작했다. 웃으면서 슬금슬금 포지션을 잡는다. ​ 단번에 제압하고 보스 룸으로 진입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 “쳐!” ​ 한 학생의 고성과 함께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 그리고. ​ [10 pt!] [10 pt!] [10 pt!] [10 pt!] ​ ​ “고맙다.” ​ 아마 거의 첫 탈락자가 아닐까 한다. 40포인트나 챙겨주다니. ​ 나는 수확을 얻고, 다른 건물로 조용히 몸을 옮겼다. 전투 중에 발생한 소음 덕분에, 이쪽으로 다시 누가 올 일은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그때였다. ​ “… 이건.” ​ 코끝을 스치는 향기. ​ 아주 익숙한 냄새다. 최근에는 시험 때문에 못 느꼈지만 아침마다 맡는 은은한 꽃향기. 유하나의 체취였다. ​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머리는 반신반의했지만, 발걸음은 가온 훈련장 쪽으로 향했다. ​ 그곳은 그녀와 함께 땀 흘리며 달리고, 검을 나누던 장소였다. ​ 화접검의 기초부터 실전까지, 나와 함께 수십 번은 검을 섞었던 공간. ​ 아무 이유도 없는데,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유하나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 - 끼익. ​ 눈앞의 풍경이 펼쳐졌다. ​ 정갈히 정돈된 도복 차림의 유하나. 허리춤에 찬 동백검의 검집은 광을 내지 않은 채, 묵직하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 단정히 무릎을 꿇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푸른색 완장이 선명히 보인다. ​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조용히,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 - 스윽. ​ 도복의 옷깃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그녀는 훈련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스승님께.” ​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또렷했다. ​ “제자, 오랜만에 비무를 요청드립니다.” ​ 나는 그대로 그녀를 바라봤다. ​ 날 기다린 건, 유하나였다. 몸은 낮게 굽혔지만, 기세만큼은 한껏 끌어올려져 있었다. ​ ‘가르친 제자가 도전해온다.’ ​ 그런 감정이 먼저 들었다. ​ “나를 부른 거야?” ​ 아직 아리까리했다. 내 말에 유하나는 고개를 들고 다시 미소 지었다. ​ “오실 줄 알았습니다. 익숙한 향이니까요.” ​ 이걸로 확실해졌다. 그녀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 수비팀으로써, 공격팀에게 보내는 비무 요청이라. 유하나 다운 도전이었다. ​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 “얼마나 늘었는지 보자.” ​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궁금하긴 했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또, 편린을 얻으러 갈 자격이 있는지. 나는 훈련장 한 켠에 있는 검을 빼내 들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