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 시험 전이라 분위기가 잔뜩 가라앉았을 줄 알았다면, 그건 오산이었다. 오히려 청팀과 백팀 모두, 각자의 무리끼리 몰려다니며 전략을 짜고 정보를 교환하느라 분주했다. ​ 그를 증명하듯, 오늘 가온의 카페도 만석이었다. ​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카페 한쪽은 청팀, 다른 한쪽은 백팀으로 정확히 나뉘어 있었다는 점이다. ​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고, 칸막이나 안내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도 자리 배치는 자연스레 나누어져 있었다. ​ “좀 늦었네 미안해. 파일 좀 만들어 오느라.” ​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백팀 구역처럼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천여울과 윤채하가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 시험 기간 내내 나와 천여울, 그리고 윤채하는 하나의 팀을 이룬 것처럼 같이 다녔다. ​ 나는 워치를 툭툭 두드리며 손짓했다. ​ “이거 한번 봐봐.” ​ 잠시 후, 두 사람의 워치에 동시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 방울 잡기 실기 평가의 보스몹 리스트였다. ​ 교관부터, 현직 영웅까지. ​ 정면 승부가 어려운 상위권 대상들은 물론이고, 이길 수 있는 범위 내의 인물들을 선별해 데이터화했다. 체력, 특기, 전투 패턴, 약점까지. ​ 영웅의 기밀 사항인 부분까지 전부 들어가 있다. 표로 정리된 정보는 한눈에 보기에도 정갈했다. ​ 내가 만들었냐고? ​ ‘그럴 리가.’ ​ 뱅퀴셔의 내부 데이터를 털어왔다. 참고로 박광철의 작품이라 볼 수 있겠다. ​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중 필요한 정보만 쏙쏙 뽑아내서, 보기 좋게 정리한 것뿐. ​ “이거… 진짜야?” ​ 윤채하는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 “거의 다.” ​ 박광철 씨가 일을 열심히 했다면 진짜일 것이다. ​ 나는 자리에 앉아, 그녀들이 잠시 스캔할 시간을 기다렸다. ​ 방울 잡기의 룰은 간단하다. 공수 교대는 3번에서, 최대 5번까지. ​ 공격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학생들을 붙잡고. 수비가 되는 시점에는, 빠르게 보스들을 공략해 거대 방울을 수집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 그러나 그때, 화면을 내리던 천여울이 내게 물었다. ​ “이 사람은… 왜 없어?” ​ “누구?” ​ 천여울이 워치 화면을 내밀었다. 그녀가 가리킨 건, 유세린.그 이름 옆에는 [특기 : 사살] 이라는 살벌한 정보 외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 약점도, 체력도, 전투 패턴도. 여타 다른 보스들에겐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는 항목들이, 그녀에겐 텅 비어 있었다. ​ “아… 그거는.” ​ 나는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잠시 고심했다. ​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라서.” ​ “응?” ​ “근처에도 가지 마.” ​ 이건 나의 확신이었다. ​ 현직 교관, 현직 영웅들… 전부 다 우수하고 강한 영웅들이다. 학생들과는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 그러나, 유세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명백하게, 격 자체가. ​ “솔직히 여기 왜 있는지도 모르겠어서.” ​ 애초에 원작에서는 기말고사에 등장도 안 한다. 지금쯤이면 로터스 내부의 권력 싸움에 매몰되어, 바깥일에는 손도 못 대고 있어야 정상이었으니까. ​ 시험장에 직접 들어올 이유도, 여유도 없는 시기다. ​ 그러니 이건 정말 의외였다. ​ 그녀는 원래, 한참 후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것도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되거나, 주인공과 끝까지 적대하는 인물로. ​ “… 이 사람 방울도 압수하면 안 돼?” ​ “포인트도 많이 주네.” ​ 천여울과 윤채하가 말한다. ​ 그를 증명하듯, 여타 다른 보스와 다르게, 방울의 색도 남달랐다. 말이 거대 방울이지, 시험장 내 교관이나 영웅들의 방울은 동색에서 시작해 은색, 금색으로 나뉜다. 위협 수준에 따라 색의 단계가 나뉘는 식이다. ​ 실제로 그런 실력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고, 교관에게 걸린 리미트의 수준이라 보면 된다. ​동색 수준의 리미트, 은색 수준의 리미트. 이렇게. 그런데 유세린은 검정색이다. 그것도 시커멓게 물들어있다. ​ 그 자체가 경고인 것처럼. ​ 그런 사람과 붙으라고? ​ 난 반대다. ​ 높은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제약을 걸어두긴 한다지만… 그게 얼마나 우리들을 보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굳이 걸고 싶지 않은 도박이다. ​ “안 말릴게 나는.” ​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 팀으로 다니는 게 효율적일 뿐, 결국 본질적으로는 개인전이다. 각자가 판단하고, 각자가 움직여야 한다. ​ 간다는 이 말릴 생각은 없다. ​ 탈락하면 뭐 부활로 살려주면 되니까, 한번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 내 말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가 꺾인 표정. 둘 다 살짝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군다. ​ “알았어….” ​ 결국은 수긍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들의 음료 잔이 비어 있는 걸 확인했다. ​ “사 올게 기다려.” ​ 표정을 보니 살짝 또 미안해진다. ​ 기를 조금 꺾었으니, 달달한 음료와 케이크 정도는 보상으로 주는 게 맞아 보였다. ​ 나는 카운터에서 아이스 초콜릿과 딸기 라떼를 주문하고. 추가로 치즈케이크까지 주문했다. 내가 마실 아메리카노는 덤. ​ 두 손 가득 받아서 든 음료와 디저트를 들고 테이블로 되돌아갔다. 그 테이블은 이미 낯선 얼굴들로 차 있었다. ​ “그러니까, 너네까지 들어오면 무조건 순위권이야.” ​ 남학생 둘, 그리고 여학생 하나. 천여울과 윤채하 앞에서, 꽤 자신만만한 얼굴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 흔히 있는 일이다. ​ 기말고사는 결국 개인전의 탈을 쓴, 협동을 유도하는 시험이다. 혼자서는 생존조차 힘든 구조.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성적을 결정짓는다. ​ 이조차도 가온이 설계한 부분이다. ​ 아마 백팀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은 현재 요한일 가능성이 크다. 요한을 위시한 짝퉁 크루세이더의 결집. ​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카페 내부를 훑었다. ​ 역시나. 구석진 소파석, 거대한 덩치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도 확인하러 보낸 사절일 것이다. ​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 ‘윤채하하고 천여울 데려오면, 너희도 받아줄게.’ ​ 이런 식으로 얘기한 거 아닐까. ​ 그러나 그녀들이 갈지 안 갈지는, 이미 느껴졌다. 아까 내가 보내준 워치의 자료들. 천여울도, 윤채하도 그것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테이블 아래에 뒀다. 아주 꽁꽁 숨기는 중. ​ “기특하네.” ​ 나는 조용히 디저트 접시를 내려놓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내 말에 천여울은 뿌듯하게 미소를 지으며 음료를 받아들고, 윤채하는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고개를 들어 상대 무리의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 “직접 오라 그래.” ​ 나는 음료 빨대를 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같은 팀끼리. 뭐 이렇게 비밀리에 접촉할 이유는 없잖아?” ​ 남학생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 “어… 어. 알았어.” ​ 그렇게 말한 뒤, 동료들과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떴다. 고개를 다시 내리자, 두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묘하게 반짝이는 눈빛. 뚫어져라, 마치 어미 새를 바라보는 아기 새처럼. ​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치즈 케이크 좋아해?” ​ 사실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물어본 건 괜스레 민망해서였다. ​ “사랑할걸?” ​ 천여울이 먼저 입꼬리를 올렸다. ​ “… 나도.” ​ 윤채하도 곧이어 작게 입을 열었다. ​ “다행이네.” ​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각 케이크를 조심히 나눴다. ​ 그 뒤로 이어진 보충 수업은, 해가 저물 때까지, 이어졌다. ​ ​ ​ ​ *** ​ ​ ​ ​ 이것저것 정리하고 정신없이 실기시험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필기시험이 끝나갔다. ​ 필기시험은 총 2일. 그리고 오늘은 그 마지막 날. ​ 전공 및 특기 과목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 시험 기간임에도 가온의 지부는 은근히 한산했다. ​ 중간고사 때처럼 붕 뜬 분위기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말고사는 축제가 아니다. 그런 인식 자체가 없다고 보면 된다. ​ 중간과 달리 외부인이 구경 오지도 않고, 부모님이 응원하러 오지도 않는다. ​ 단. ​ 모든 실기시험은 전 세계로 중계된다. ​ 매년 그래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게 인류의 미래다.’ 라는 슬로건으로 자랑처럼 그들의 전투를 생중계한다. ​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 건 1학년. ​ 뉴 페이스가 많은 1학년은, 늘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올해는 황금세대라는 이명이 붙은 만큼, 그 관심은 유독 뜨거웠다. ​ 물론, 그 전에 치러야 할 마지막 필기시험이 먼저였다. ​ “잘 봤어?” ​ 나는 비척비척 성법 시험장에서 걸어 나오는 천여울을 맞이했다.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성법진을 전부 그려야 하는 과목 특성상, 가장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 “뚫어져라 잘 봤어!” ​ 아주 당당하게 얘기한다. ​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이번 시험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옆에서 지켜봤다. 묵묵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펜을 들던 모습. ​ 그래서 그냥 말했다. ​ “고생했어.” ​ 시험이 끝난 것은 옆의 윤채하도 마찬가지였지만…. ​ 그녀는 시험을 시험으로 여기지 않는다. ​ 그냥 골때리는, 아니 재미있는 문제를 푸는 시간이라 여길 뿐. 그래서 표정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 나는 잘 봤냐고? 늘 말하지만, 잘못 볼 수가 없다. ​ 이게 바로 배경지식과 영감의 조기교육이 결합한 결과다. ​ “내일이 진짜 시작이네.” ​ 윤채하가 스트레칭하면서 말한다. ​ 그녀로서는 가온에서의 첫 시험이었다. 약간 설레는 표정은 숨길 수 없다. ​ 그러나 그 순간. ​ 가온의 중앙 전광판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 아래를 지나던 1학년 학생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올린다. ​ [실기시험 안내] 시험자 전원은 내일 오전 9시, 중앙 강당으로 집결. ​ 단순하지만, 강렬한 멘트였다. 아마, 집결하게 되면 그 이후 전원이 동시에 랜덤한 위치에 텔레포트 될 것이다. ​ 그 문장은 가온 곳곳의 전광판에 계속 남아있었다. ​ “내일 보자.” ​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 그리고 드디어. ​ 본 시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