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의 아기자기하고 예쁜 카페. 학생들 대부분은 연인이거나, 혹은 여자친구들끼리 수다를 떨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 개방된 테이블도 있지만, 네다섯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들이 따로 마련돼 있다. ​ 그 방 한쪽에, 객관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여학생 셋이 앉아 있었다. ​“쪼옵.” ​ 작은 소리를 내며 커피를 한 모금. 강아린은 익숙한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컵을 내려놓았다. ​ 건너편에는 하시온과 유하나가 앉아 있다. ​ 이건 매달 한 번씩, 무의식적으로 이어지는 정기모임이다. ​ ‘변수 있으면 톡방에 보고해. 염장질 말고, 변수.’ ​ 강아린이 그렇게 말한 것도 벌써 몇 달 전이다. ​ 그러나 정작 톡방의 용도는 염장질로 바뀌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정기모임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다. 뭐 볼 거 있는 얼굴들이라고 자꾸 모이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다 보니 계속 모이게 됐다. ​ 그리고 보통 하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앞으로의 이야기와, 뭐 여러 중요한 정보들. ​ 서로를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건 피곤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넷은 암묵적인 합의를 했다. 편린을 얻기 전까지는 감정 소모적인 싸움은 하지 않겠다고. ​ 별 내용 없이 정리가 끝났다. 이제 잠깐의 잡담 타임이었다. ​ “기말이네.” ​ 유하나가 먼저 운을 뗐다. ​ “그런가 봐.” ​ 강아린은 무표정하게 커피잔을 휘저으며 받아쳤다. ​ “…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청팀이고.” ​ 하시온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천가 년하고… 그이는 백팀이고.” ​ 유하나는 조용히 덧붙였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말끝에 묘한 울림이 있었다. ​ “짜증나. 오늘부터 상대 팀이랑은 교류도 못 한다잖아.” ​ 하시온이 투정을 부렸다. ​ 그 반응도 이해가 되는 상황이다. 시험에 대한 정보는 어제 발표되었고, 당장 오늘부터 청팀과 백팀이 완전히 분리됐다. ​ 원래 오늘 모임에는 천여울도 함께였어야 했으나. 그녀는 백팀이었기에 정해인과 있어도 문제가 없었다. ​ 그 천여울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 당연히 회의에는 불참했다. ​ 가온이 추구하는 시험의 방향성은 언제나 '실전'. ​ 시험을 실전처럼 대하라는 뜻은, 준비조차도 실전처럼 하라는 이야기다. 실전에서 마인세력과 영웅 세력이 교류하거나 수다를 떠는 경우는 없으니, 당연한 셈이었다. ​ 아, 물론 예외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 “아쉬운 거지 뭐.” ​ 강아린은 여느 때처럼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가장 최근 정해인을 독점한 시간이 있었던 터라, 비교적 평온한 상태였다. 속이 타는 건 유하나와 하시온, 그 둘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유하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되물었다. ​ “… 아쉬운 건가?” ​ 그 짧은 질문에 순간적인 침묵이 흘렀다. ​ “뭔 소리야?” ​ 하시온이 물었다. ​ 유하나는 말 대신 워치를 두드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워치에 동시에 알람이 울렸다. ​ - 띠링. - 띠링. ​ 각자의 화면에는 가온의 전장 지도가 펼쳐졌다. 그중 몇몇 지역은 푸른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유하나가 직접 칠해놓은 것들이다. ​ “부활 포인트야.” ​ 유하나는 짧게 설명했다. ​ “…….” ​ “알지? 부활시킨 사람한테 포인트 일부가 귀속되고, 정신 감응 상태도 생기고….” ​ 그녀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 “일종의 계약 같은 거잖아. 다시 살아나는 대신, 그 시험 기간에는 사람의 권속이 되는.” ​ “아.” ​ 하시온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 탈락을 당한 사람은, 선택받은 순간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니까, 상대 팀인 하시온이 탈락을 하더라도, 이를 불쌍하게 여긴 정해인이 그녀를 구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 그럼, 그녀는 그와 함께하게 되는 거고. 충실한 종으로. ​ “나쁘지… 않을지도?” ​ 하시온이 중얼거렸다. 유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알아서 생각해.” ​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잔잔한 카페 음악이 다시 공간을 채웠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 ​ ​ ​ *** ​ ​ ​ ​ ​ 가온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오늘부터였다. 모든 수업이 자습이라는 이름 아래 중단되었다. ​ 시험 범위까지의 수업은 며칠 전 전부 끝났고. 결국 기말고사가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 그리고 그 자습 시간, 청팀과 백팀의 완벽한 분리와 함께. ​ 학생들은 강의실 대신 팀 단위로 이곳저곳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온의 부지는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 2학년과 3학년, 그리고 4학년부터는 기말고사가 외부 지역과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다. ​ 따라서 그들은 이미 기말고사 고지와 함께, 외부로 떠났다. ​ ‘살아서 만나요!’ ​ 보드게임 동아리의 선배들이 그런 식으로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 결국 지금 가온에 남은 건, 1학년들뿐이었다. ​ 자유롭지만, 묘하게 날이 선 하루하루. ​ 그리고 오늘. 나는 천여울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실기도 실기지만, 필기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 ​ 기초 성법까지만 나왔던 중간고사와 달리, 기말고사는 중급 응용으로 서서히 진입한다. 내용은 복잡해지고 난이도는 더욱 오른다. 천여울은 그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고, 나는 가볍게 수락했다. ​ “이해가 되는 것 같아?” ​ “으응….” ​ 천여울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워낙 어려운 내용이라 그럴 만도 하다. ​ 그래도 집중력은 나쁘지 않으니, 천천히 배워나가면 될 일이다. ​ “이거 왜 재밌어?” ​ 그러나 그곳에는 윤채하도 함께였다. 어차피 같은 백팀이었기에 그냥 겸사겸사 같이 스터디하기로 했는데. ​ 그녀는 눈앞의 기초 성법서를 보며 익히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 나는 잠시 그 말에 시선을 멈췄다. 공부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다. ​ 누군가에겐 숨통이 트이는 놀이고, 누군가에겐 그 반대니까. ​ 절대, 윤채하와 천여울을 지칭한 얘기는 아니다. ​ “오늘은 그럼… 여기까지만 할까?” ​ 나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 “슬슬 기말 실기 얘기도 해야지. 너무 앉아있으면 머리도 안 돌아가….” ​ 천여울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성법서를 힘차게 덮었다. ​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고개를 한껏 젖혀 날 올려다본다. 눈동자는 빛나고, 한쪽 눈썹이 장난스럽게 들려 있었다. 이걸로 끝이라는 듯한 해방감. 입가에는 이미 작게 웃음기가 번져 있었다. ​ 윤채하는 아쉬운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 뺨 옆에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 두 여성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힌다. 내 입에서 나올 다음 말 한 마디, 입꼬리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모든 집중이 그곳에 쏠리는 듯한 기분. ​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 반응이 다른 둘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긴 하다. ​ 그러나 요즘 들어 느끼는 게 있다. ​ 확신은 없지만, 감이란 게 있는 법이니까. ​ 천여울이나 윤채하 모두. 혹은 그 외 여럿 주요 인물들. 눈빛 하나, 말투 하나, 행동 하나. ​ 분명 친구 이상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는 행동들이, 하나둘씩 쌓여가는 느낌이다. ​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 그건 분명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앞으로, 평범한 친분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시련들을 마주할 테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발생한 거대한 빈자리를, 또 누군가가 메워야 한다. ​ 큰 역할은 내가 하겠지만, 결국 모두가 함께 이겨내야만 한다. ​ 그 속에서 더 깊고 진한 유대를 맺는 건, 분명 옳은 방향일 것이다. ​ 그래서 ‘친구 이상’이라는 말엔, 언제든 찬성이다. ​ 그러나. ​ ‘혹시 얘네가 나를 좋아하나?’ ​ 최근 들어 친구를 넘어, 이성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누군가는 자의식 과잉이라며 비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모든 경우에 대비해야만 했으니까. ​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으로서는, 모른 척 넘어가는 게 맞다. ​ 싫은 게 아니다. ​ 내가 조형하고, 또 만든 인물들. 하나같이 매력적이고 하나같이 애정을 가지고 있다. ​ 게다가. ​ ‘나도 남자니까.’ ​ 매력적인 여성에게 끌리는 건 당연하다. ​ 하지만 나는, 지금은 그저 감정에 휘둘릴 수 없는 입장이다. ​ 최선을 다해, 주요 인물들을 서포팅하고, 또 성장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무언가가 더 흐트러지는 건 지금의 이 관계로는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최소한 적어도 그녀들이 편린을 얻기 전까지는. 그녀들을 절대 어떤 선 이상으로 바라볼 생각이 없다. ​ 플레이어라면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제 플레이어가 아니다. ​ 완벽하게 실전이며, 모두가 살아있다 느낀다. ​ 양심에도, 책임에도 찔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 “마실 것 좀 사 올게.” ​ 내 말에 윤채하와 천여울이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 “아이스 초콜릿하고, 딸기 라떼 맞지?” ​ 나는 작게 웃으며 먼저 말했다. ​ 어떻게 알았냐는 듯,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환해진다. ​ 아무 말 없어도, 묘하게 익숙하고 편안한 공기. ​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 이 정도가 깔끔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