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게임 구조에 대한 설명은 얼추 끝났다. 학생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흥분이 교차했고, 일부는 벌써 작전 회의를 하는 듯한 속삭임까지 한다. ​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 팀 배정. ​ 청팀과 백팀.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대결을 벌이게 될 두 진영을 어떻게 나누느냐가, 시험을 결정지을 문제였다. ​ 합리적이고,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게끔, 구성해야 할 테니까. ​ 잠시의 정적을 깨트리며, 이사장이 나섰다. ​ “가장 공정하고 완벽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 그 말과 동시에, 스크린 위에는 익숙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 『홀수 랭킹 – 청팀』 『짝수 랭킹 – 백팀』 ​ 간단했다. 1위, 3위, 5위…는 청팀. 2위, 4위, 6위…는 백팀. ​ 밸런스에 대한 답변으로, 가온은 홀수와 짝수라는 선택지를 제시한 듯했다. ​ “랭킹은 여러분 스스로가 만든 결과입니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죠.” ​ 이사장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 현재 랭크가 없는 학생들이 있다. 나처럼 정식 랭킹이 없는 특례 입학생이나, 또 칼로스에서 넘어온 윤채하나 주서준 같은 학생들. ​ 이런 특수한 경우는 어떻게 넣느냐가 남은 문제였다. ​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 “참고로, 랭킹이 부여되지 않은 일부 학생들에 대해서는, 중간고사와 교류전 실적, 그리고 교내 실기 평가 점수를 기반으로 내부 정렬이 이루어졌습니다.” ​ “그 결과 역시, 가온의 고유 알고리즘에 따라 자동 배정된 공정한 사항이었음을 밝힙니다.” ​ 정해진 룰 위에 적당한 개입이 얹힌 셈이었다. 이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 그리고 결국, 최종적으로 확정된 두 팀의 조합이 발표되었다. ​ - 띠링 - 띠링 ​ 수십 명의 이름이 스크롤을 타고 지나갔지만, 나는 내게 가장 중요한 인물들만을 골라 눈에 새겼다. ​ ​ [청팀 - 홀수 랭킹] ​ [랭킹 1위 강아린] [랭킹 5위 유하나] [랭킹 19위 하시온] [랭킹 없음 주서준] ​ [백팀 – 짝수 랭킹] ​ [랭킹 2위 요한] [랭킹 4위 천여울] [랭킹 없음 윤채하] [랭킹 없음 정해인] ​ 랭킹이 없었던 나는 윤채하와 같은 팀에 배정되었다. 주서준은 반대편. 아마 채하와 함께 교류전에 참여했던 그 시너지를 명분 삼아 분산 배치한 것일지도 모른다. ​ 청팀엔 강아린과 유하나, 그리고 무력만큼은 그들에게 밀리지 않는 하시온이 자리 잡았다. ​ 반대로, 백팀은 천여울과 요한 나와 윤채하가 조합되어 있다. ​ 전체적인 밸런스는—— 내가 보기엔 꽤 괜찮았다. 극단적으로 한쪽에 쏠린 팀이 없고, 어느 쪽이건 핵심 전력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구조였다. ​ 청팀은 강아린 중심, 혹은 유하나 중심. 백팀은 천여울 중심, 요한 중심 혹은··· 윤채하 중심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다. ​ 나쁘지 않아 보였다. ​ “같은 팀이네?” ​ 옆자리에 앉아 있던 천여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워치 화면에 떠 있는 가온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면 속 천무관. 바로 가온 강의동 한가운데 위치한 건물이다. ​ “시작하면 여기로 와.” ​ 씨익, 장난기 섞인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 “같이 다니자.” ​ 같이 다니자는 제안이었다. ​ 그 순간, 조용했던 오른쪽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응.” ​ 그러나 대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윤채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 천여울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짚었던 손가락이 멈춘다. ​ “… 넌 뭐야?” ​ “나도 갈게. 같은 팀인데 뭐.” ​ 윤채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 천여울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반박할 거리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맞는 말이었다. ​ 나를 한참 바라보던 천여울이 입을 열었다. ​ “올거얌?” ​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아니. 좀 나중에.“ ​ 천여울의 입꼬리가 멈칫하며 내려갔다. ​ 나는 챙겨야 할 게 있었다. 이 시험에는 여러 가지 숨겨진 히든들이 있었으니까. ​ 그리고 그중 하나인, 부활 지점. ​ 전장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 장소에 도달하면, 청팀 백팀을 가리지 않고 탈락한 대상을 지정해 포인트를 내고 다시 부활시킬 수 있다. ​ 단, 그 대가는 ‘종속’이다. 몸과 마음이, 그리고 일정 점수까지 부활시킨 사람에게 귀속된다. 여러 의미로 대상의 충실한 종이 되는 셈이었다. ​ 당사자도 새롭게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고. ​ 그 외에도, 아직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히든 요소가 그 구역에 뿌려져 있다. 그래서 바로 모일 수는 없었다. ​ “챙길 게 좀 있어서. 공수 한번 바뀔 때까지만.” ​ 난 웃으며 말하며 고개를 빼고 양옆을 돌아봤다. ​ “너네끼리 좀 같이 다녀볼래?” ​ 순간, 두 사람 모두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 ​ ​ ​ ​ ​ ​ ​ *** ​ ​ ​ ​ ​ ​ ​강당에서의 기말고사 안내가 끝났다. 우리는 복도로 나와 걷고 있었다. 시험이 약 일, 이 주일 정도 남은 시점. ​ - 띠링. ​ 나와 윤채하의 워치에 한 알림이 도착했다 ​ [집합입니다~~] ​ 보드게임 동아리 단톡방에 올라온 동아리장의 호출이었다. ​ 평소엔 ‘출석은 자유, 퇴근은 더 자유’라는 소리를 입에 달던 동아리장이 직접 집합을 걸다니. 정말 이례적인 호출이었기에 나와 윤채하는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 문제는. ​ “너는 왜 따라와.” ​ 그곳에 천여울도 함께였다는 것. ​ “할 것도 없는데 뭐.” ​ “할 게 왜 없….” ​ 나는 그 즉시 천여울의 필기 점수를 지적하려 했으나. ​ “히.” ​ 천여울이 콧소리 섞인 웃음으로 내 시선을 부드럽게 받아냈다. ​ 생각해보니 얘, 저번 시험 잘 봤었지. ​ 잘한 사람 기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 “그래.” ​ 사실 보드게임 동아리는 외부인의 출입도 제법 있는 편이다. 단, 동아리원 한 명 이상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규칙만 지키면 됐다. ​ 그런 면에서 천여울이 못 들어올 이유는 없었다. ​ 우리는 동아리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웬일인지 의자들이 정렬되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제일 늦게 도착한 건 우리 셋. ​ 문이 닫히자, 맨 앞에서 무언가를 정리하던 동아리장이 고개를 들었다. ​ “어 그래 왔….” ​ 그러다 시선을 멈췄다. ​ 조서연의 시선이 나와 윤채하를 지나, 천여울에서 멈췄다. "누구세요?" ​ 그 순간. ​ “안녕하세요? 잠시 놀러 왔어요.” ​ 천여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단아하게 머리카락을 넘기며 미소 지었다. 목소리도 부드럽고 공손하다. ​ 장난기 가득하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고개까지 살짝 숙이며 상당히 예의 바른 태도다. ​ “뭔….” ​ 나와 윤채하는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 “아, 네네. 편히 놀다 가세요?” ​ 조서연도 어리둥절하며 당황한 눈치였지만,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 그렇게 셋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서연이 앞으로 나섰다. ​ “자, 여러분. 오늘은 중요한 발표가 있어요.” ​ 가볍게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정돈한다. ​ “좋은 소식이 있고, 나쁜 소식이 있어. 뭐부터 들을래?” ​ 순간 여기저기서 “좋은 거!” “나쁜 거 먼저!” 등등 말이 겹쳤다. 사방에서 말이 엇갈린다. ​ 조서연은 그걸 다 듣고는 웃으며 말했다. ​ “좋은 소식부터 할게? 우리 동아리 렉시움을 이번에 영광에서 통 크게 후원을 해준다고 합니다!!!!” “와아아!” ​ 동아리방이 소란해졌다. ​ “진짜?” “영광에서?” “구닥다리 게임 좀 치워도 되겠다!” ​ 기업에서 가온의 동아리를 후원해주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전투 동아리가 아닌, 보드게임 동아리는 후원의 대상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 분명 가온에서도 자체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지원을 하지만, 최신식 마공학 보드게임은 결국 너무 비싸다. ​ 따라서 외부 기업에서 지원을 해준다는 건 둘도 없는 호재였다. 원작에서 이런 이벤트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이야기였다. ​ 조서연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자랑스레 말을 이었다. ​ “동아리방 리모델링부터! 풀 다이브 마공학 보드게임! 거기에 최신형 시뮬레이터까지…… 진짜 좋지?” ​ “예!” ​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천여울도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때, 조서연이 슬쩍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자 이제 나쁜 소식.” ​ 그때, 조서연이 슬쩍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일부러 말을 끊고, 동아리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 “아까 동아리 방 리모델링한다 했었죠?” ​ 손을 번쩍 들며 말한다. 그 말에 몇몇 학생들은 짐작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 “한 달 동안! 동아리 문 닫습니다~~” ​ 번쩍 든 손은 오른손은 검지만 남긴 채, 나머지 손가락을 다 접은 상태였다. ​ “아….” “어쩔 수 없지….” ​ 동아리방 전체가 침울해졌다. ​ “그래도 기말고사 끝나고는 쓸 수 있을 테니 다행이죠?” ​ 조서연은 그걸로 위로라도 되는 양 덧붙였다. 기말고사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더욱 침울해졌다. ​ “그러니 우리 그때 다시, 살아서 봐요~” ​ 그녀는 손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