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어딘가 뒤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그걸 못 느낀 척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정해인.” ​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누군지 알 것만 같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 “정, 해, 인.” ​ 한 글자씩 끊어 부르는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가볍게 한숨만 쉬었다. ​ 어젯밤. 한 메시지가 왔었다. ​ [1000_y]: 저기요~ [belief_]: 어? 무슨 일이야? ​ 주말 저녁, 갑작스레 온 메시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터진 줄 알았다. ​ [1000_y]: 이거 뭔가요? 궁금해요~ [1000_y]: (사진) ​ 그러나 아니었다. ​ 사진에는 협회에서 찍은 파티장의 사진이 담겨있었다. 멀찍이서 찍은 사진 속, 강아린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 정장 차림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 [1000_y]: (사진) ​ 이번엔 클로즈업. 화면을 가득 멀뚱멀뚱한 내 얼굴을 채운다. ​ [1000_y]: 내 앞에서도 입어줘. ​ 그래서 그냥 답장하지 않았다. 알람은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아니 몇십 번 더 울렸지만, 밤이 늦었으니까. 그냥 잤다. ​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강의실 맨 뒤, 구석자리로 조용히 향했다. 천여울은 다가와, 내 어깨에 손끝을 댔다. ​ 톡. 톡. ​ “내 앞에서도 정장 입은 모습 보여줘.” ​ “뭘 자꾸 보여달래.” ​ “성지에서 입어줘.” ​ “아니 진짜 왜 이래.” ​ “나도 예쁜 옷 입어줄게. 자신 있어.” ​ 천여울은 하루종일 괴롭힐 기세였다. ​ 나는 대꾸 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천여울은 그런 그의 옆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그녀의 옷자락이 살짝 팔에 닿는다. ​ 완전히 딱 달라붙었다. ​ “왜 이렇게 바짝 붙어.” ​ “싫은 거 아니잖아.” ​ “…….” ​ 그냥 할 말을 잃었다. 감당이 안된다 감당이. 그녀는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내 쪽으로 기댄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향기가 짙다. ​ “그리고 그거 빌린 거야. 가지고 있지도 않아.” ​ 물론 거짓말이다. 강아린이 직접 선물한 정장이었다. ​ “…….” ​ 천여울은 내 말에 말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따로 따지지는 않았다. 살짝, 입꼬리만 올렸다. ​ 그때, 강의실 안쪽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무슨 얘기해?” ​ 윤채하였다. 그녀는 이미 강의실 안쪽 구석에 도착해 앉아있던 상태였다.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 “별거 아니….” ​ “이거 봐볼래?” ​ 나는 최대한 피하려 했지만, 천여울이 그 순간, 씨익 웃으며 워치 화면을 펼쳤다. 윤채하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 “…와아….” ​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 민망할 정도로 감탄한다. 물론 나도, 놀라긴 했다. 꾸민다고 이렇게 달라질 줄은 몰랐으니까. ​ “넌 어떻게 생각해?” ​ 천여울은 질문을 던졌고, 윤채하는 워치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 “입어줘.” ​ “아.” ​ 완벽한 한 팀의 탄생이었다. ​ “입을게….” ​ 지금 여기서 둘을 당해낼 재간은 없다. 진심으로. 나는 결국 순순히 받아들였다. ​ 아니 솔직히 말해 그거, 입기가 피곤하다. 셔츠에 구두까지, 양복은 단순히 걸치는 게 아니었다. ​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며 강의실 맨 앞 칠판을 바라봤다. ​ 그 사이, 양 옆자리에서 들리는 수상한 웃음. ​ “으흐흐.” “이히히.” ​ “… 너네 왜 이리 친해졌어.” ​ 상극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는다.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 그때, 낯익은 저음이 강의실을 가로질렀다. ​ “반갑습니다. 여러분.” ​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도한성 교관이 들어왔다.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순간 눌린 듯 조용해졌다. ​ “주말 간 잘 쉬셨나요?” ​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묘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학생들이 대충 대답하는 틈, 그는 뒤를 돌았다. ​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 “부디, 잘 쉬셨길 바라겠습니다.” ​ 그는 칠판을 두 손으로 쿵, 두들겼다. ​ 철컥, 하는 이질적인 소리와 함께 칠판이 쩌적하며 좌우로 갈라졌다. ​ 그 너머로 익숙한 공간이 다시 드러났다. ​ 입학식 무기 선택 때 들어갔던, 그 거대한 공동이었다. 돔 형태의 거대한 실내 경기장. ​ 저번과 다른 점은, 중앙에 네 방향으로 스크린이 솟아올라 있었다. 좌우에는 아카데미 1학년 전체를 수용 가능한 좌석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다. ​ 다른 강의실의 칠판도 하나둘씩 칠판이 열리며 모습이 드러났다. ​ 도한성은 다시 학생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다들 따라오시겠습니까?” ​ 학생들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오….” ​ 윤채하는 처음이었는지, 살짝 감탄했다. 칼로스는 가온에 비해 규모가 작긴 했을 것이다. ​ 우리는 B반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았다. 각 반의 교관들도 하나둘 무대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 ‘거창하네.’ ​ 이렇게까지 하나 싶긴 한데, 이게 가온이다.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 “가온의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 아무런 사전 안내도 없이, 이사장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 그는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 “오늘은 1학기 기말고사에 대한 안내를 드릴 겁니다.” ​ 입가엔 얇은 미소가 걸려있지만, 누구도 방심하지 않았다. 가온의 기말고사는 악랄하기로 너무나도 유명했다. ​ “먼저 필기시험입니다.” ​ 그가 손을 들자 강당 중앙, 네 방향 스크린이 동시에 켜졌다. 작은 글씨들이 조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 “필기시험은 지난 시험과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정확도보다는 이해도에 중점을 둔 논술형 위주로 구성되며, 실전에 가까운 상황의 가정 속에서, 얼마나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 평가받게 될 겁니다.” ​ 이사장은 거기에 덧붙였다. ​ “물론, 난이도는 저번보다 훨씬 어려울 겁니다.” ​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 “아… 씨.” “미치겠네.” ​ 그는 그 반응을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필기시험의 몇 가지의 예제를 보이고는 잠시 후, 스크린이 꺼졌다. ​ “필기시험에 대한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 그는 무대를 돌며 학생들과 눈을 마주쳤다. ​ “필기와 이론은… 너무 중요하죠. 그러나 여러분들은 영웅이며, 또 영웅이 될 자들입니다.” ​“세상에는, 이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손짓 하나에, 화면이 다시 켜진다. ​ “이번 1학년, 기말고사의 실기시험입니다.” ​ 사방 스크린 위, 뚜렷한 글자 하나가 나타났다. ​ 『실기 평가: 방울 잡기』 ​ 순간 강당 전체의 시선이 위로 쏠렸다. ​ “이번 실기 시험은, 기말고사의 핵심입니다.” ​ 이사장의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 “여러분의 협동력, 전투력, 상황 판단 능력까지. 모든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시험이죠. 그리고 이 결과는, 필기 성적과 중간고사 성적을 합산해 최종 랭킹에 반영됩니다.” ​ 랭킹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엄청나다. 실감 나지 않았을 중간고사와 달리, 이번 평가는 단 한 번으로 한 학기 동안의 랭킹이 결정된다. ​ 학생들 사이에서 긴장이 퍼져나갔다. ​ “우리는 이 시험을, 방울 잡기라 부르겠습니다.” ​ 이사장의 손짓 하나에 스크린이 전환됐다. 커다란 가온 아카데미의 전체의 부지가 지도로 떠 오르고, 그 위에 진영을 뜻하는 두 가지 색이 입혀진다. ​ “가온 전역을 무대로, 여러분은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어 싸우게 됩니다. 한 라운드는 공격과 수비로 구분되며, 수비팀은 방울을 지키고, 공격팀은 그것을 빼앗는 방식입니다.” ​ 학생들 사이로 조용한 숨소리만 흐른다. 모두 집중하고 있었다. ​ “방울을 빼앗기면 탈락, 빼앗으면 점수 획득. 룰은 간단하죠.” ​ 말 그대로다. 단순한 룰이긴 했다. 그러나, 이게 끝일리 없었다. ​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 가벼운 웃음과 함께, 이사장이 손짓하자 화면이 또 다시 전환됐다. 거대한 가온 부지의 전장 위로 붉은 표시들이 빛났다. 전장 곳곳, 특수 지점들이 강조된다. ​ “각 지역엔 고유한 오브젝트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 방울이 배치되어 있죠. 그 방울은, 보스가 지키고 있을 겁니다.” ​ 학생들의 눈빛이 서서히 바뀌었다. ​ “보스는, 가온의 실전 교관일 수도 있고, 이번 시험을 위해 특별히 초청한 유명 영웅일 수도 있습니다.” ​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 “단, 도전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자신이 수비팀일 때만 보스에게 도전할 수 있어요. 성공한다면, 거대 방울을 확보하며 대량의 점수를 얻게 되겠죠.” ​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덧붙였다. ​ “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스들에게는 전부 리미트가 걸려 있습니다. 수비팀을 상대로는, 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 그런데. ​ “그러나… 만약 공략 도중 시간이 다 되어 공수가 전환된다면?” ​ 이사장의 미소가 조금 진지해졌다. ​ “공격팀을 상대로는 보스의 리미트가 전부 해제됩니다.” ​ 조용히,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그 순간부터 여러분들은, 현역 영웅들과 교관들의 진심이 담긴 공격을 받아내야 할 겁니다.” ​ 짧은 정적이 강당을 휘감았다. 스크린이 다시 한번 전환되며, 이번엔 룰과 점수 체계가 간결하게 정리된 화면이 떠올랐다. ​ “공격은 점수를 위해 상대방의 방울을 노리고, 수비는 공격의 눈을 피해 보스를 공략하세요. 전투는 공수 교대식으로 진행되며, 모든 라운드가 끝나거나 특정 점수에 도달하면 종료됩니다.” ​ 그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숨겨진 요소들도 여럿 있습니다. 어디에 어떤 히든이 숨어 있을지는, 직접 확인해보시면 되겠습니다.” ​ 나로서는 반가운 이야기다. 숨겨진 히든 요소에 대해서는, 내가 또 빠삭한 편이니까. 어느 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날 만난 건 행운이 될 것이다. ​ 그는 미소 지으며 손을 내렸다. ​ “자! 이제, 여러분이 상대할 보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 그 순간, 무대 위 조명이 차례로 켜졌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가온의 교관들이었다. 이름이 호명되고, 스크린에 얼굴이 비칠 때마다 강당 곳곳에서 환호가 터졌다. ​ 그리고, 스크린은 그들보다 더 눈부신 얼굴들로 넘어갔다. ​ “……와.” “미친….” “저 사람은 맹주 아니야?” ​ 유명 현역 영웅이라는 말은 허상이 아니었다. 라인업만으로도 학생들 사이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TV 속, 뉴스 기사 속에서나 보던 이들이 지금 이 무대 위에 서 있었다. ​ 그러다, 마지막 조명이 천천히 켜졌다. 유려한 곡선의 실루엣이 부드럽게 드러났다. ​ “어?” ​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유세린이었다. ​ “유세린?” “진짜 유세린이야?” ​ 그녀는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학생들은 열광했고, 그녀는 그 환호에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 “아니 여기를 왜….” 둥지를 벗어나 날개를 펼칠 차례 아니었나? ​놀랍게도, 그녀의 첫 행선지는 가온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다. 중얼거린 그 순간, 유세린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 마치, 내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 그녀의 눈이, 나와 정확히 마주쳤다. ​ 그리고, 유세린은 내게 가볍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귀여운 따봉이었다. '아.' ​ “생각보다 귀여운데?” “나랑 눈 마주쳤어.” “방금 누구한테 한 거지?” ​ 순간,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 원래 유세린이 이곳에 올 일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영웅들의 영웅이자, 로터스의 핵심 전력이었으니까. ​ 아무리 가온이라도, 그녀를 섭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이번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어야 했다. ​ 그러나, 지금 눈앞에 유세린이 있다. ​ 아무래도. ​ 괜히, 건든 것 같다는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 유세린의 따봉이 향한 곳을 정확히 캐치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 천여울이 내 옆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 “아는 사이야?” ​ “… 살짝, 아니, 조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윤채하가 받아친다. “파티는 꽤 재밌었나 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 뺨에 닿는 따가운 시선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