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 기숙사 정문 앞. ​ - 치익. ​ 리무진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나는 천천히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 “감사합니다. 기사님.” ​ 내리면서 이곳까지 날 데려다준 기사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원래는 포탈을 타고 가온까지 돌아왔어야 했지만, 시간이 늦어져 포탈 통관소가 닫았기에 영광의 전속 기사님이 이곳까지 직접 데려다줬다. ​ 오늘만 여러 번 타봤지만, 여전히 낯설다. 이런 차를 타는 자신도, 그 차에서 자연스럽게 내리는 자신도. ​ “하아.” ​ 긴 한숨이 나왔다. ​ 양복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빌린 줄 알았던 이 옷은, 강아린이 내게 주는 선물이었다. 바로 샀다더라. 가격은… 알려 하지 않으려 한다. ​ 오늘 하루가 주는 피로는 단순한 육체적인 게 아니었다. ​ 물론, 피곤한 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협회장, 길드 대표들, 각 단체 고위 인사들과 안면을 트는 것. ​ 내가 직접 그들과 대면하고, 이름을 나눈다는 건 꽤 큰 성과였다. ​ 훗날, 자리를 잡고서나 얻을 기회라 생각했었으니까. ​ 그리고 무엇보다, 옥상에 유세린을 만난 것은…. 예상외의 큰 소득이라 볼 수 있겠다. ​ 당시 그녀의 꼴을 보건대, 상당히 방황하거나 무너지고 있다는 게 보였고. ​ 약간의 조언으로,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살리는 게 맞는 거니까. ​ 물론 지금부터는 그녀의 선택이다. ​ 무너져가는 둥지에 틀어박혀 날개가 꺾인 채로 안위하는 삶을 살다 뱀에게 먹혀 죽을지, 아니면 둥지를 떠나 그 날개를 활짝 펼지. ​ 나 역시, 궁금한 부분이었다. ​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니, 어느새 기숙사 문 앞이었다. 늦은시간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도어락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 익숙한 잠금 해제음. 문을 여는 순간, 코끝에 익숙한 향이 맴돌았다. ​ “… 어?” ​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순간, 등줄기에 살짝 소름이 올라왔다. ​ 기숙사 내부에 은은하게 퍼진 방향제 냄새. ​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 땀이 많이 나는 훈련을 하는 가온의 학생들 특성상. 학원에서도 비치를 권장한다. 나도 보통, 외출 전에 환기와 함께 방향제를 뿌려놓는 편이고. ​ 그래서 늘 그 향이 나는 줄 알았는데. 오늘 아침 나는 분명히 방향제를 뿌리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해서 환기만 하고 나갔다. ​ “…….” ​ 나는 조용히 실내를 둘러봤다. 정리 상태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책상 위 물건도 그대로, 침대도 매우 깔끔, 문제는 없다. ​ “… 착각이겠지.”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양복 재킷을 의자에 걸었다. ​ 방향제 향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세상에 기숙사까지 와서 그거 하나 뿌리고 나가는 도둑이 어딨겠는가. ​ 게다가 여긴 가온이다. 마공학적 장치로 완전히 보호된 기숙사.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 그걸 뚫고 돌파하려면, 이 건물에 살거나. 혹은 그걸 완벽히 무시할 만큼의 강자여야 한다. ​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괜히 머리가 지끈했다. 피곤함이 밀려온다. ​ 술기운도 마구잡이로 올라오려는 참이었다. ​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 “…몰라, 그냥 자자.” ​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금방 잠이 들었다. ​ ​ ​ ​ ​ *** ​ ​ ​ ​ ​ ​ ​ “어으.” ​ 머리가 살짝 욱신거린다. 와인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축축 처진다. ​ 맥주랑 같이 마셔서 그런가. ​ 나는 기지개를 켠 채 단골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성아라가 직접 지정한 해장 장소였다. ​ 식당 내부는 한산했지만, 저 멀리서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 “왔냐.” ​ 영감, 하태성. 옆자리에는 이미 반쯤 해장국을 비운 성아라씨와, 건너편에는 익숙한 뒤통수의 여성이 앉아있다. ​ “뭐야, 벌써 먹고 있어요?” ​ 난 시간을 확인했다. 분명 나는 약속한 시각에 정확히 도착했다. ​ “좀만 늦으면 다 토할 거 같다고 닦달을 하는 바람에, 빨리 왔다.” ​ “얼마나 마신 거야….” ​ 성아라는 예상보다 많이 마신듯했다. ​ 어제 파티에는 영감과 아라 누나도 있었다. ​ 마주쳤었으나, 그들은 나를 사무적인 태도로 대했다. ​ ‘나중에 해명을 해야 할 거야….’ ​ 물론, 뒤에서 성아라에게 제대로 닦였다. 사실상 오늘도 불려 나온 셈이다. ​ “해인아!” ​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시온이 손을 들어 반겼다. 익숙한 뒤통수의 주인공은 시온이었다. ​ “너도 왔어?” ​ “응. 오랜만에 여기 해장국 먹고 싶어서.” 그녀는 뺨을 손바닥으로 슬쩍 짚으며 말했다. ​ “어제 좀 혹사해서 그런지, 되게 피곤하네.” ​ “기숙사에서 쉰다고 하지 않았나?” ​ 분명 훈련 같은 거 안 하고 사자처럼 낮잠을 잔다고 나한테 자랑했던 것 같다. ​ “…그렇…긴 한데… 그냥… 좀….” ​ 시온은 어딘가 대답을 흐렸다.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 나는 자리에 앉았고, 해장국이 곧바로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국물을 두어 숟갈 넘기자 그제야 몸이 풀리는 듯했다. ​ 그때였다. ​ “정해인 씨.” ​ 건너편에서 성아라 누님이 양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그릇째 해치우는 중이었고, 속이 어느 정도 풀렸는지 표정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 “해명해주시죠.” ​ 그녀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취조를 시작했다. ​ “아니. 해명이랄 건 없고요….” ​ 나는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꺼냈다. 좋은 기회라 여겼고, 여러 경험을 했다 등등. ​ 말끝을 흐리자, 성아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국을 한 숟가락 더 떴다. 장난이었던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 “그래도, 옷 잘 어울리더라.” ​ 조용히 한마디를 건넨 건 옆에 있던 시온이었다. ​ “어떻게 봤어?” ​ 내가 고개를 돌리자, 시온은 고개를 숙인 채 국을 뜨며 대답했다. ​ “사진 봤어. 아라 언니가 보여줬어.” ​ “…아.” ​ “강아린 옆에 있던 것도 봤고.” ​ “….” ​ 그 말엔 괜히 숟가락만 만지작거렸다. ​ “그냥 그렇다고~” ​ 시온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합동 수업 때 몇 번 마주치나 싶었는데, 강아린과 어느 정도 안면을 튼 모양이었다. ​ 아, 맞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 계속 궁금했었기에, 나는 고개를 돌려 성아라 누나에게 물었다. ​ “누나. 혹시 학생이 가온 기숙사 뚫을 수 있어요?” ​ - 푸흡, 콜록! 콜록! ​ 옆에서 시온이 국물을 넘기다 기침을 터뜨렸다. 사레가 들린 모양이다. ​ “천천히 좀 먹어.” ​ 나는 옆에 앉은 시온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성아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 성아라는 뱅퀴셔 내에서도 손꼽히는 마공학 전문가다. 가온의 출입방식엔 그녀의 기술이 일부 들어갔다고 들은 적이 있다. ​ “응? 아니? 많이 어렵지. 가온인데.” ​ “역시 그렇겠죠?” ​ “어. 절대 못 하지. 역산에 도가 튼 천재 마법사 이런 게 아닌 이상… 학생은 못 할걸?” ​ “그럼 누나 정도면요?” ​ “나야 뭐, 깽깽이로도 들어가겠지?” ​ 성아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해맑게 웃었다. ​ 음. ​ 역시 그랬다. 학생 주제에, 성아라 정도의 기술과 감각을 갖춘 인물은 없을 테니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 “…왜?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 기침을 멈춘 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아니, 어제 분명 방향제 안 뿌리고 나갔거든?” ​ “…응.” ​ “근데 저녁에 들어오니까 향이 꽤 진하게 나더라고. 평소보다. 그래서 그냥… 착각했나봐.” ​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며 국을 한 숟갈 떠올렸다. ​ “그랬구나… 방향제… 알았어….” ​ 시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 “에이~ 너무 예민하네~” ​ 성아라가 웃으며 받아쳤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답했다. ​ “그런가 봐요. 피곤해서 그랬나.” ​ 우리는 그렇게 대화 없이 음식을 흡입했다. ​ “근데 시험 기간 아니야? 너네 이렇게 붙잡아도 되나?” ​ “그러게요.” ​ “… 야.” ​ 내 장난스러운 답변에 그녀는 움찔했다. ​ “그러니까 팁 좀 줘봐요. 기말고사.” ​ 나는 그녀에게 기말고사의 팁을 넘길 것을 종용했다. 그녀도 어쨌든 가온의 졸업생이다. 무언가 좋은 정보를 넘겨줄 수도 있다. ​ “기말?… 으….” ​ 성아라는 뭔가 떠오른 듯, 몸서리쳤다. 그럴 만도 하다, 가온의 기말고사는 상당히 피곤하니까. 나 역시 하고 싶지는 않다. ​ “딱히 해줄 말은 없고. 너네야 뭐 잘하겠지만…. 그냥 쉬엄쉬엄해. 무리하지 말고.” ​ “그럴게요.” “예.” ​ 나와 시온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성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팔로 식탁을 감싸 안고 고개를 푹 숙였다. ​ 어느새 넷 모두 전부 다 먹은 시점이었다. ​ “오케이, 여기서 해산… 난 이제 진짜 쉴래~” ​ “… 후우.” ​ 영감은 작게 한숨을 쉬며 성아라에게서 멀어졌다. 완벽히 제멋대로인 성아라는 영감의 극 상성이었다. ​ 아마 어제 술도 잔뜩 마셨을 텐데, 그건 하태성 입장에서는 재난이었을 것이다. ​ “… 들어가라.” ​ “넵.” “응, 할아버지.” ​ 간단한 인사 뒤, 영감은 터덜터덜 뒷짐을 지며 일어났다. 그 뒤로 성아라가 질질 끌려간다. ​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식당 밖으로 나서자, 쌀쌀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햇볕은 따뜻했지만, 공기는 아직 쌀쌀했다. ​ 일요일 오전 9시. 주말이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어깨가 슬슬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 ‘기말고사.’ ​ 슬슬 시험 기간을 앞둔 학생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시온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 “슬슬 공부해야겠네….” ​ 나는 목을 돌리며 말했다. ​ “슬슬 좋다. 아직 슬슬이 맞아.” ​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 “내일 보자.” ​ “응.” ​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기말고사는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