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여울이 결석계를 제출한 그날 오전, 모의 던전 담당 교관인 최은하는 고민에 빠졌다. ​ “박창명 교관님, 시드 편성 수정 명단 한번 봐주시겠어요?” ​ 그녀는 천여울을 제외한 유닛 성적을 바탕으로 작성된 시드 명단을 내밀었다. 성적으로 팀을 편성하는 것과 실제 수업을 담당한 교관의 직관을 반영하는 것은 분명 다를 수 있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동료 교관의 의견을 구한 것이었다. ​ 박창명 교관은 명단을 꼼꼼히 훑어보더니 이내 결론을 내렸다. ​ “… 주한강, 이 학생보다 정해인 학생이 시드에 적합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 그녀는 별 생각 없이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사실 두 학생 중 하나를 고민하던 참이었다. 성적으로 보면 정해인이 근소하게 앞서 있었지만, 랭크가 더 높은 주한강을 선택했을 뿐. ​ “그리고 던전도 라할라의 미로로 설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입구 스타트로요.” ​ “입구로요?” ​ 최은하는 살짝 놀란 듯 되물었다. ​ 이 말은 그녀가 즉시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라할라의 미로는 가온 아카데미에서의 전통적인 내부 평가 던전으로, 난이도가 높아 최우수 학생들에게만 배정되곤 했다. ​ “정해인 학생, 익셉셔널 같습니다. 도한성 교관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 “도한성 교관님이….” ​ “그 학생이 검강을 생성했다고 합니다.” ​ 익셉셔널. 가온 내부 교관들 사이에서 쓰이는 은어로, 주어진 랭크와는 다르게 입학 후 두각을 드러내는 학생을 뜻했다. ​ 게다가 여러 교관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면, 신뢰하는 게 맞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 결국 최은하는 조언을 받아들였다. 이제 남은 건 정해인이 그 기대에 부응할지 지켜보는 일뿐이었다. ​ 그리고, 정해인은 그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고 있었다. ​ “와! 씨 또 피했어!” ​ “아니, 쟤 진짜 뭐야?” ​ 실습실 안은 점점 뜨거워졌다. 던전을 마치고 나온 학생들마저도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모두가 하나둘씩 화면 앞에 몰려들었다. ​ 방금 전 상대 팀을 도륙 내고 나온 강아린 또한 그 모습을 보자마자 눈빛이 반짝였다. ​ 실습실을 가득 채운 웅성거림은 사라지고, 모두의 관심은 단 하나의 화면에 집중됐다. ​ 지금, 이 순간, 새로운 혜성이 탄생하고 있었다. ​ ​ ​ *** ​ ​ ​ ​ 주한강은 함정이 간파되어 당황하던 와중에도 빠르게 작전을 짜냈다. ​ ‘정해인을 둘이서 빠르게 노리자.’ ​ “저 새끼, 방패도 아닌데 전위에 서 있거든? 둘이서 빠르게 몰아붙이면 끝낼 수 있어.” ​ 원래라면 원거리 딜러인 하시온부터 노리는 게 기본이었다. 그러나 하시온은 상위 랭커의 궁수다, 한이리와 주한강이 협공하더라도 그녀를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거란 판단이 섰다. ​ 한이리는 협공이라는 방식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느꼈지만, 그냥 했다. 이미 함정까지 동원한 마당에 승리가 우선이었다. ​ “나오라니까 나와 드려야지.” ​ 주한강은 태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한이리와 나머지 팀원들도 뒤를 따랐다. ​ “넌 씨발 왜 당당하냐?” ​ 윤상혁은 그 모습을 보고 일갈했다. ​ “나였으면 쪽팔려서 항복했다.” ​ “그 얘기는 됐고.” ​ 주한강은 짧게 말을 끊으며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 “바로 가자.” ​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력 폭탄이 서너 개 날아들었다. 폭탄은 정해인을 향해 날카롭게 접근했다. ​ -챙챙챙! -펑- ​ 마력 폭탄이 날아들었다. 정해인은 창을 돌려 폭탄을 튕겨내며 먼지를 일으켰다. 그러나 폭탄은 애초에 방어를 강요하기 위해 날린 것이었다. ​ 비산하는 먼지 사이로 주한강과 한이리가 동시에 쇄도했다. ​ 정해인은 그들의 접근을 기다리지 않고 발을 옆으로 뺐다. 두 개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 한이리가 뒤늦게 검을 휘두르며 자세를 고쳤지만, 정해인은 이미 본대와 한참 떨어진 사이드에 있었다. ​ 주한강은 점차 초조해졌다. ​ ‘금방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정해인의 움직임은 순간적으로 전투에 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모든 공격을 흘려내며 거리만 유지했다. 그리고 그가 끌어낸 거리만큼, 본대와의 간격은 점점 벌어졌다. ​ “잠깐, 한강아 너무 멀어졌….” ​ “도망만 갈 거야?!” ​ 주한강의 초조함은 마침내 짜증으로 변했다. 한이리가 경고했지만, 이미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 약이 오를 수밖에 없는 전투법이었다. 공격이 빗나갈 때마다, 정해인이 보여주는 차분하고 여유로운 태도는 그의 신경을 긁어대기에 충분했다. ​ 정해인은 한 발 더 물러나며 주한강을 바라봤다. ​ 그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에, 주한강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공세를 멈추는 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 한편, 본대 사이드. ​ 주한강과 한이리의 협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윤상혁은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가세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은 시온의 손에 의해 강하게 제지당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지켜.’ ​ 중심부 입장 전, 정해인이 당부한 말이었다. 윤상혁은 멈칫하며 옆에서 활시위를 당기던 시온에게 다시 물었다. ​ “그래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 시온은 차분하게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는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채로 윤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 “누가?” “우리가? 해인을?” ​ 시온은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활을 정조준하며 덧붙였다. ​ “아니, 그게 아니지.” ​ -팽! ​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전위를 잃은 연금술사와 궁수는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가자 당황하며 잔해 사이로 몸을 숨겼다. ​ “해인이 우리를 돕는거야.” ​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 “그러니까 하라는 대로 하자.” ​ 그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과 함께, 어딘가 아련한 회한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다시 활시위를 당기며, 앞을 응시했다. ​ “항상 그래왔으니까.” ​ ​ ​ *** ​ ​ ​ ​ 싸울 듯 말듯, 약 좀 올렸다고 아주 죽을 듯이 달려든다. 본대를 도외시하는 걸 보니 넌 리더하기는 글렀다. ​ 그나마 한이리는 뒤를 신경 쓰는 척이라도 하는데…. 어쩐지 가담하기만 할 뿐 본대를 돌아가 지키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 사냥개처럼 달려드는 두 놈 사이로 시온이 격발한 화살이 지나쳐 상대의 본대를 강타했다. ​ ‘슬슬인가.’ ​ 본대와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다. 뒤에는 유적의 벽,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크게 빨아들일 심산으로 뒤로 크게 물러섰다. 벽 가까이 닿을 정도로. ​ 그걸 본 주한강은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돌진해왔다. ​ “잡았다, 이…” ​ -퍼억! ​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그의 얼굴이 내 발에 정통으로 맞아 뒤로 휘청였다. 나는 벽을 디딘 반발력을 이용해 공중에서 회전하며 정확히 그의 얼굴을 차올렸다. ​ 착지와 동시에, 먼지를 털듯 가볍게 몸을 정리하며 말했다. ​ “뭐해?” ​ 주한강은 바닥에 뒹굴며 신음을 흘렸다. 뒤따라오는 한이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검을 고쳐잡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망설이는 듯한 한이리를 자극했다. ​ 한이리는 이를 악물며 달려들었지만, 그의 검은 무겁고 동작은 한참 느렸다. ​ 검이 낮게 깔리며 내 발목을 노렸다. 나는 가볍게 발을 옆으로 빼며 비켜섰다. 검 끝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스쳤다. ​ “짧아. 창 상대로는 두발짝 더.” ​ 내 조언에 자극받은 듯, 한이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곧이어 그의 검 끝이 내 어깨를 향해 빠르게 파고들었다. 나는 창을 부드럽게 틀어 올려 그의 공격을 흘려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 ‘그래도 제법….’ ​ 나쁘지 않다. 피드백을 바로 적용하려는 자세는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너머로 보이는 본대 상황이 얼추 정리된 듯했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아보였다. ​ “그래도 네가…” ​ 그가 검을 강하게 쥐고 밀고 들어오려는 순간, 나는 창을 부드럽게 틀어 그의 검과 팔 사이의 빈틈을 노렸다. 창끝이 정확히 그 사이로 들어갔다. ​ -챙! ​ 그가 깜짝 놀라 검을 당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창을 살짝 비틀며 검을 휙, 뒤로 당겼다. 그의 손에서 검이 순식간에 벗어나며 바닥에 부딪혔다. ​ “…성시우보다는 낫다.” ​ -팅! 나는 창을 짧게 돌려 그의 발치에 떨어진 검을 멀리 밀어냈다. 한이리는 빈손이 된 자신을 내려다보며 잠시 멍해 있더니, 이를 악물었다. ​ 이제 남은 건, 주한강이었다. ​ 마침, 뒤에서 신음하던 주한강이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일어섰다. ​ “이 새끼야!!!” ​ 그의 검 끝에서 검기가 뻗어 나왔다. 푸른 기운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눈을 살짝 좁히며 그의 움직임을 살폈다. ​ 안타깝게도. ​ ‘너마저도 성시우보다 낫구나.’ ​ 물론 랭킹 10위권의 인재들이긴 하지만 정말 슬픈 포인트였다. 지금 이 장면을 보고 있을 성시우를 위해 바친다. ​ 검강도 살짝 식상하다. 이번엔,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창을 옆으로 내려두고, 손끝에 천천히 마나를 모았다. ​ ‘강기공.’ ​ 마나는 내 의도대로 세밀하게 응집되며 하나의 군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작은 마나의 파도가 공기를 가볍게 떨리게 한다. 세밀한 컨트롤은 언제나 나의 장기였다. ​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 마력의 흐름이 평소와는 다르다. ​ 기운이 예상보다 훨씬 폭발적으로 솟구치며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만들어 둔 통로로 평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방대한 양의 마나가 쏟아져 들어온다. 구체는 지나치게 커지며 강력해졌고, 형태는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 “왜, 왜 이래?” ​ 손에서 마력을 수습하려 애썼지만, 이미 통제를 벗어난 상태였다. 순수한 마력이 통로를 따라 폭발적으로 확장되며 손끝에서 제어를 거부했다. 결국 제대로 뭉쳐지지 못한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격발되었다. ​ -콰과과쾅! ​ 마력 구체는 허공을 가르며 정확히 주한강에게 날아들었다. 강렬한 충격과 함께 그의 몸이 벽에 깊숙이 박혔다. ​ -우르르… ​ 벽면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벽돌이 주한강을 덮쳤고, 마지막으로 들린 건 그의 “으악!” 하는 단말마뿐이었다. ​ “어우, 야… 미안하다….” ​ 나는 당황한 채로 고개를 숙여 손을 바라봤다. 손바닥이 가볍게 떨린다. ​ 거칠게 뛰는 맥박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에 손을 댔다. ​ 갈 곳을 잃고 맹렬히 치솟는 마나는 아직도 심장을 통해 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 평소와는 다른 흐름. ​ ‘너무… 많아.’ ​ 몸 안에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 몸 상태가, 좀 이상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