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 그러니까 이 건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 영웅협회의 7층 회의실. 협회 인증 길드부터, 민간단체까지. 상당히 많은 수의 길드와 단체들이 참석한 상황이었다. ​ 그 정중앙, 꽤나 상석에 앉은 강아린은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 “… 아린아 화 좀 풀어라.” ​ 강아린의 옆자리에 앉은 자는 그녀의 삼촌, 강윤혁이다. 맹주의 길드장이자 강아린을 이 자리까지 직접 데려온 장본인. ​ “화 안 났는데요.” ​ 짧고, 건조한 대답. ​ 하지만 정작 속은 펄펄 끓고 있었다. ​ 열받아 죽을 것 같았다. ​ 분명 지금쯤, 김하은의 안내를 받으면서 정해인과 함께 사옥을 돌고, 로비에서 같이 사진도 찍고, 장비 착용도 해보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첫 체험을 같이 하고 있어야 했다. ​ 그런데 지금은…. ​ 지루하기 짝이 없는 회의장에 묶여있는 상황이다. ​ 그녀의 삼촌, 강윤혁이 자기를 끌고왔다. 서서히 눈도장을 찍을 시기라나 뭐라나. ​ 어디까지나 강아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이 전부 허례허식이라는 걸. 강아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어느새 회의는 마무리되는 분위기. 사람들이 서류를 정리하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 ‘고작 이거 듣자고….’ ​ “하…….” ​ 강아린의 깊은 한숨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 그러나 그때였다. ​ “아, 그리고 다들 알고 계시죠? 오늘 저녁 전략 교류회, 올해도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 협회장의 밝은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 “하하, 당연히 가야죠.” ​ 회의장 여기저기서 형식적인 웃음과 대답이 오간다. ​ 전략 교류회. 매년 이맘때 열리는 단체 간 연례행사. 표면적인 명분은 ‘세계적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 이며 서로 간의 전략을 공유하는 자리다. ​ 하지만 실상은 각 단체, 길드 간의 친목을 다지는 친목회이자, 파티에 가까웠다. ​ 그때, 강아린의 눈동자가, 번쩍 떠졌다. ​ ‘이거다.’ ​ 잔뜩 날 선 얼굴에 빠르게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삼촌, 저거 누가 가요?" "아마 내가···." "제가 갈게요." "어? 네가 웬일이야. 안 그래도 혼자 가야 하나 했는데, 같이 가면 좋겠···." "아뇨." 강아린은 살며시 웃었다. 입꼬리 끝이 묘하게 올라간다. "제가, 갈게요." "어···?" 초대장은 1인 1동반이다. 강아린이 동반할 사람은···. 사실,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 ​ ​ *** ​ ​ ​ ​ 김하은은 학생들을 데리고 연구동으로 들어섰다. ​ 수많은 장비와 분석을 기다리는 유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다. 공기는 칙칙하며, 곳곳에서 기계음과 키보드 소리, 연구자들의 낮은 중얼거림이 섞여 울렸다. ​ 그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한쪽 구석, 모니터 앞에 거의 붙어 있는 여자 한 명. ​ 머리를 대충 묶어 올리고 안경을 낀 채, 피곤에 쩔은 몰골. 눈 밑엔 다크서클이 진하게 퍼져 있다. ​ 분명 잘 꾸미면 예쁠 것 같은데, 피곤함에 쩔었는지 영 안색이 별로다. ​ 김하은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 “저기… 강수진 영웅님… 애들 데려왔어요.” ​ 강수진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다, 눈만 돌렸다. ​ “어휴….” ​ 툭. 어깨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래, 얘들아 왔니.” ​ 손을 들어 주위를 가리켰다. ​ “이게 니들 미래야.” ​ “···저는 좋습니다!!” ​ 한 학생이 우렁차게 외쳤다. 강수진은 눈만 껌뻑였다. ​ “…어 그래. 나는 안 좋아서.” ​ 그러곤 가방에서 담배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 “아. 미안.” ​ 다시 김하은을 쳐다본다. ​ “그래서, 얘네 뭐 어쩌라고.” ​ “아, 그냥… 뭐 하시는 중인지 간단히만~” ​ 김하은이 어깨를 애교스럽게 툭툭 두드렸다. 강수진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앞에 있는 칠판을 돌렸다. ​ - 쓱. ​ “그래 그럼··· 이거나 물어볼까.” ​ 칠판의 뒷면엔 빽빽한 수식, 구조도, 적색 마커로 그어진 회로망이 가득했다. ​ 그런데, 뭔가 익숙하다. ​ ‘… 이거 혹시.’ ​ "이게 말이지, 니들 편린 알지? 편린." ​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 “저번에 내 사촌오빠가 하나 보내준 가설이거든? 편린의 힘을 추출하기 위한 필수 요건. 참고로 내 사촌 오빠는 니들 교수야.” ​ 이어 말한다. ​ “무슨 갑자기 한 학생이 세운 이론이라면서 나한테 대뜸 보내던데, 무시하려다가 보니까… 이거 봐라? 꽤 일리가 있네? 학생 이름이 뭐더라… 정 뭐시기였던 것 같은데.” ​ "간단히 말하면, 편린의 에너지를 추출하려면 '시스템의 선택'이 필요하다는 거지." ​ 슥— 동그라미를 크게 친다. ​ [시스템의 선택] ​ "근데 말이지, 문제는 여기야. 이게, 어떤식으로 선택이 이루어지고, 또 어떤식으로 반응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어.“ ​ 강수진이 고개를 돌렸다. ​ “이 반응, 이거 대체 어떻게 알아낼래? 자, 그러면 여기서. 아이디어 있는 사람?” ​ 학생들이 얼타기 시작한다. 그야 당연했다. 말이 안 되는 문제였다. 일류 연구자인 강수진조차 해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니까. ​ 강수진이 덧붙였다. ​ “편하게 해.” ​ 학생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 "어··· 뭔가 생명 신호에 반응하는 거 아닐까요? 개인마다 고유 주파수가 있고···." ​ 가장 앞줄에 앉은 남학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 “오케이, 다음.” ​ "특정 유전자나… 질병으로 발현될 가능성이요." ​ “어 다음.” ​ 몇 번의 말들이 이어졌지만, 그녀의 눈빛은 점점 피로해졌다. 그렇게 여러 의견을 듣던 강수진은 이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얘들아, 고생 많았어. 김하은 씨~ 이제 얘들 데려가.” ​ “헉, 넵.” ​ 김하은이 재빨리 반응한다. ​ 그 순간에도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 ‘이걸 말하면 도움이 될까?’ ​ 맹주는 강아린의 길드, 편린에 대한 연구 진척도가 올라간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편린과 대상, 둘 다 준비가 안 된 거 아닐까요?” ​ 벌써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강수진의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한다. 김하은이 다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 “아~ 그만그만, 우리 연구자님이 바쁘셔서~” ​ “잠깐만.” ​ 강수진이 그녀를 막아 세운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 쪽으로 까딱이며 말했다. ​ “계속해볼래?”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 “시스템의 선택이라는 건 결국, 반응이 일어나야만 관측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대상이 편린의 에너지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다면, 반응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거죠.” ​ 원작에서도 편린을 찾기 위해서는 등장인물들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실제로 내가 편린을 맡길 첫 번째 인물로 유하나를 점친 것도, 그녀가 그 경지에 가장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다. ​ 즉, 현재로서는 선택의 대상이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편린도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 그리고 그 등장인물이 경지에 오르면? 편린은 즉시 반응한다. ​ “편린은 고차원의 에너지잖아요. 추출하려면 마땅히 강해야죠. 결국 대상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당연히 아무 반응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 말을 마친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근처 연구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있었다. ​ “그러니까….” ​ 에라 모르겠다. 이미 여기까지 말했다. ​ 나는 그대로 칠판 앞으로 걸어갔다. 빽빽한 수식들 사이, 비어 있는 공간 하나. ​ 나는 거기에 과감하게 X를 그었다. ​ “애초에 '시스템의 선택' 같은, 존재하지 않을 반응을 염두에 두고 계산을 하니, 답이 나올 리가 없는 거 아닐까요?” ​ 순간, 연구실 안이 정적에 잠겼다. 강수진은 책상을 툭툭 두드린다. 무표정이다. ​ 한 연구원이 작게 속삭였다. ​ “저… 수진 연구원님 이거….” ​ 강수진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 쉿. ​ “그럼, 준비가 언제 되는데?” ​ “그건 모르죠 저도.” ​ 어디까지 꽁으로 먹으려고. ​ 그제야 강수진은 피식 웃었다. 분위기가 다르게 흐른다는 걸 눈치챘는지, 김하은도 가만히 있었다. ​ “이름이 뭐야?” ​ 강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다가오며 말한다. ​ “정해인입니다.” ​ “정해인? 정해인… 아… 역시 너였구나? 사촌오빠가 네 얘기 많이 하더라.” ​ 저번에 내게 대학원을 권유했던 교수. 그녀는 그의 사촌 동생이었던 것 같다. ​ 그녀는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넨다. ​ “이건 내 명함이야. 언제든 연락해.” ​ 그리고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김하은에게 말한다. ​ “하은씨.” ​ “넵.” ​ 강수진이 그녀에게 푸른색 카드를 넘겼다. ​ "3층 카페 있지? 거기 가서 애들 음료 한 잔씩 사줘. 다들 고생했잖아." ​ “헉 감사합니다….” ​ “아 그리고.” ​ 갑자기 고개를 돌린다. ​ "너는 케이크도 먹어. 한 서너 개. 아니다, 그냥 먹고 싶은 만큼 먹어." ​ 강수진은 내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연구원들에게 소리쳤다. ​ "자, 여러분?" ​ 연구원들은 하나둘씩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 “야근해야겠는데요?” ​ 연구원들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 ​ ​ ​ ​ ​ *** ​ ​ ​ ​ ​ ​ 맹주의 명물. ​ 3층 구내 카페. 내 앞자리엔 김하은이 앉아 있었다. ​ “그니까 이게 엄청난 거라니까요? 강수진 씨가 얼마나 싸가지… 아니 얼마나 싸늘한 분이신데 그분이 명함을 주다니….” ​ “아… 예.” ​ 내 앞에서 케이크를 마구 퍼먹는 김하은. 그냥 전부 핑계고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싶었던 것 같다. ​ 그래도 아마 그쪽에서는 꽤 기쁜 소스였을 것이다. 꽉 막힌 채로, 절대 진행되지 않던 연구에 가닥이 잡힌 거니까. ​ 주요 인물들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편린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 확실히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도 아까랑은 많이 달라졌다. 아까는, 나를 한심하게 쳐다본 느낌이라면···. 지금은 강력한 경쟁자를 바라보는 시선, 경계가 엄청나게 짙어진 느낌. ​ 그러던 찰나였다. ​ “어, 씨 왔다.” ​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고, 누군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안녕하십니까!!” ​ 고개를 돌리자, 강아린이 카페 입구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1학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선 선배들까지 허리를 숙였다. ​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걸음. 강아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내 시선을 정확히 포착한 그녀. ​ 날카롭고 차가웠던 표정이 스르륵 녹는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 “정해인~” ​ “어, 왔어?” ​ 그러고는 곧장 다가와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김하은의 뒤통수를 짧게, 날카롭게 노려본다. ​ 그러더니, 얼굴에 다시 웃음을 띠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자리에 툭, 앉는다. ​ “오늘 뭐 했어? 재밌었어?” ​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한다. 학교에서는 말도 잘 안 걸더니, 본인의 회사라 그런지 상당히 신난 모양이었다. ​ 멀리서 학생 몇 명이 이쪽을 바라본다. 당혹감, 의문, 불신. '대체 강아린이 왜···?'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다. ​ “오! 아린님 오셨어요?” ​ 김하은이 케이크를 퍼먹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강아린이 시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아니 정해인 학생, 진짜 똑똑하던데요? 강수진 연구원님한테 명함도 받았어요!” ​ “아~ 그래요?” ​ “네, 그리고 또….” ​ 김하은의 말을 끊고 강아린이 도중에 물었다. ​ “근데 김하은 영웅님, 호출 있으시지 않아요?” ​ “호출이요? 없는데요? 저 완전 비번. 히히.” ​ “아… 그래요?” ​ 김하은은 신나게 웃으면서 케이크를 퍼먹었다. 강아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워치를 꺼내 화면을 띡, 띡, 두 번 눌렀다. ​ 그러자 갑자기. ​ - 띠링 띠링. ​ 김하은의 워치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 “지금은요?” ​ “아….” ​ 김하은은 황망한 눈으로 워치를 바라보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에구, 빨리 다녀오세요, 여기에 앉아 있을게요.” ​ 강아린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인사했다. ​ 터덜터덜. 케이크도 못다 먹고 떠나는 김하은의 뒷모습. ​ 좀 불쌍한데. ​ “쯧.” ​ 그 모습을 본 강아린이 혀를 살짝 찬다. ​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으로 붙는다. 팔꿈치를 툭, 툭, 내 팔에 부딪히며 말했다. ​ “해인아, 오늘 저녁에… 나랑 어디 좀 갈래?” ​ “어디?” ​ “음….” ​ 강아린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 “파티?” ​ 그리고 조용히 웃는다. ​강아린의 눈동자가 요요히 빛난다. 순간 나는, 백두산에 다시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지금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