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천루 한복판, 유리벽 너머로 햇살이 반짝인다. ​ 로터스 본사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늘은 가온의 체험 학생들이 방문하는 날. ​ 홍보팀, 인사팀, 각 부서가 나서 학생 맞이 준비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부길드장 유세린은 조금 다른 이 유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 “흐음….” 그녀의 책상 위에는 비서가 갓 출력해온 최근 재무 흐름 보고서가. 손아귀에는 길드장의 최측근인 최 이사의 동선 기록이 쥐여 있었다. ​ 예쁜 손가락의 끝이 한 이름에다 조용히 줄을 긋는다. ​ “이러다 진짜 칼 맞겠어요, 이사님.” ​ 작게 내뱉은 농담 섞인 중얼거림이 집무실을 가른다. ​ 유세린의 시선이 천천히 창밖을 향했다. 멀리 보이는 건물 사이, 햇살 아래로 엷게 가려진 구름. ​ 잠시 후, 그녀는 인터폰을 눌렀다. ​ - 뚜··· ​ 가볍게 울리는 기계음. 곧 비서의 응답이 따라왔다. ​ - 네, 부길드장님. ​ 유세린은 문서를 내려놓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정해인 학생. 인터뷰 요청 좀 넣어줄래요? 식사 대접 정도로 가볍게, 최대한 정중하게… 그래도 너무 과하지는 않게, 그냥ㅡ” ​ 잠시 말끝을 흐린다. 시선을 다시 한번 창밖으로 보낸 그녀는,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덧붙였다. ​ “조금 호기심 많은 선배가, 밥 한 끼 하자고 연락하는 느낌으로?” ​ 인터폰 너머로 비서가 무언가를 묻기 전, 유세린은 손을 들어 먼저 막았다. ​ “아, 굳이 승낙은 안 받아도 돼요. 거절하면… 그걸로 끝. 절대로~ 절대로~ 더 귀찮게는 하지 마요.” ​ 한 박자 늦게,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드린다. ​ “귀찮게 굴면, 휙하고 멀어질 것 같은 느낌이라.” ​ 유세린은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 끝말은 인터폰에 들리지 않았을 터였다. ​ “그럼, 잘 부탁해요!” ​ 유세린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꼬맹이들 만나러 가야지~” ​ 학생들을 맞이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 *** ​ ​ ​ ​ ​ ​ ​ ​ 토요일 오전. 여름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니, 햇빛도 그에 발걸음을 맞추듯 뜨겁게 내리쬔다. ​ 아침 운동을 못하였기에, 일부러 통관소 앞에 대기하는 버스를 타지 않고 뛰었는데…. ​ 나는 원래 더위를 못 견디는 성격이라, 갑자기 괜히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체험의 첫날. ​ 나는 맹주의 본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 [belief_]: 어디야? 나 지금 건물 앞. ​ 나는 건물로 향하며 강아린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1학년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게 나랑 그녀 둘뿐이었으니, 같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 어제 갑자기 연락처를 알려주더라. ​ [RIN]: 해인아 나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담당 영웅한테 말해놨어. [belief_]: 무슨 일 있어? ​ “뭐지?” ​ 갑자기 늦을 만한 이유가 있었나? 딱히 그런 일은 없어 보였는데. ​ 워낙 바쁜 시기기도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건물로 향하는 그때. ​ - 띠링띠링. ​ 갑자기 워치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 [조서윤]: 안녕하세요 정해인 학생, 로터스입니다. 인터뷰 요청 드립니다. 간단한 식사 자리이며,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정은 편한 시간에 맞춰드리겠습니다. ​ “…….” ​ 로터스? ​ 건물로 향하던 발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연락처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았을 테고…. ​ 조서윤. ​ 조서윤…. ​ “아.” ​ 기억났다. 설명회 때, 유세린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여성. 그 사람이다. ​ 유세린 라인이고, 지금 이렇게 먼저 연락이 왔다는 건. ​ 아무래도, 길드장의 수작을 눈치챈 모양이다. '잘 찾았네.' 그때 유세린에게 한 마디 던져주긴 했었다. 그러나 그냥 헛소리라 넘겨도 무방했을 텐데 감이 좋은 편이다. ​ 그렇다 해서 답변해줄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 [belief_]: 괜찮습니다. [조서윤]: 네. 확인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답변은 즉시 도착했다. ​ 의외다. 좀 더 귀찮게 굴 줄 알았는데, 깔끔하게 물러선다. 깔끔한 대응이 마음에 든다. ​ 더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시간이 코앞이라.​ 나는 워치를 닫고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사옥 앞. 유리로 덮인 출입구와, 정면에 설치된 개찰구가 날 막아섰다. 워치를 들어 출입증 코드를 띄우자, ‘삑’ 하는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 “와.” ​ 무심코 내뱉은 감탄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 겉에서 봤을 땐 그냥 높기만 한 건물인 줄 알았는데, 내부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넓게 트인 로비, 끝없이 이어지는 천장. ​ 궁전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 그 홀 중앙, 여러 학생들이 무리를 이루고 서 있었다. 굳이 안내가 없어도, 저곳이 오늘의 체험 장소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어? 해인 학생인가요?” ​ 중앙 쪽에서 단정한 수트를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 어깨엔 얇은 배지가 달려 있었고, 손엔 태블릿이 들려 있다. 딱 봐도 실무자 같은 느낌. ​ “체험 1학년, 정해인 맞으시죠? 어서 오세요.” ​ 그녀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정작 나는 주변 분위기에 잠시 멈칫했다. ​ 그녀의 뒤 내게 시선을 보내는 고학년들. ​ 그들의 복장은 하나같이 과했다. ​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전투복, 어깨에 걸쳐진 갑주, 번쩍이는 무기. 심지어 손가락에는 반지도 몇 개씩 끼워져 있었다. ​ 거의 현직 영웅 수준. ​ ‘과하긴 한데···.’ ​ 체험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설령 실전 임무가 있다고 해도 제한적일 텐데, 그런데도 저렇게 무장하고 나온 건…. ​ 아마도 보여주기.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어쩄든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할 테니. ​ 그에 비해 나는 편한 차림이었다. ​ 그냥 셔츠 한 장. ​ 좀 성의 없었나. ​ 그걸 인식한 순간부터, 나를 향한 시선이 더욱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말없이 내 장비 없는 몸을 훑어본다. ​ "하, 참." 학생들 사이에서 작게 새어 나오는 코웃음까지. ​ 그때, 앞에 서 있던 여성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 “자, 이제 다들 주목해 주세요. 본격적인 일정 시작 전, 오늘 하루의 스케줄을 간단히 안내해 드릴게요.” ​ 단정한 수트 차림의 그녀. 말투는 부드럽지만 명쾌하다. ​ “A급 영웅, 김하은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안내를 맡게 될 담당 영웅이에요.” ​ 여유 있게 미소를 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 “첫날은 각 부서를 간단히 돌아보며, 맹주의 조직 구조를 체험하는 데 초점을 둘 거예요. 직접 실무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운이 좋으면 할 수도 있겠네요. 아니, 나쁘다고 해야 할까요?” ​ 살짝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 “여러분은 출동 중인 영웅들을 지원하는 형태로 실무를 접하게 될 겁니다. 전장에 직접 나가긴 하니… 조심하는 게 좋겠네요.” ​ 그 말에 학생들 사이로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몸을 세우고, 허리춤의 무기를 한번 만지작거리는 학생도 보인다. ​ “우선 첫 번째 장소는… 연구동입니다. 다들 저를 따라와 주세요.” ​ 그녀는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연구동은 2층이었다. 계단을 오르며, 그녀는 설명을 이어갔다. ​ “연구동은 맹주의 기술 기반이죠. 던전 분석, 전장 지도 설계, 무구 실험, 아티팩트 복원까지... 맹주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 이동하면서 담당 영웅의 말이 이어진다. ​ 그러나 입을 여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뒤에서 작게 속삭이듯 들리는 목소리. ​ “근데 진짜 왔네?” ​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나를 보고 한 말이었다. ​ “강아린… 님이야 그렇다 치고, 1학년은 원래 안 뽑는 거 아니었나?” ​ 다른 학생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속닥이긴 했지만, 충분히 들릴 만큼의 거리였다. ​ “랭킹이 높은 것도 아니고…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니고… 나도 이럴 거면 메두사나 썰 걸 그랬네.” ​ 상당히 저급한 뒷담이다. 학생끼리나 통할만한, 그런 뒷담. '이야···.'​ 나는 살짝 당황했다. 이게 정녕, 맹주에 올 만한 학생이 맞나 싶다. ​ 저들은 모르는 정말 무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사실, 이 건물에 들어온 순간부터 학생들이 하는 모든 대화는 녹취된다. ​ 앞에서 웃으며 안내를 이어가고 있는 김하은 영웅. 그녀는 사실, 뒤에서 일어나는 이 가십을 전부 듣고 있다. 귀에 걸린 이어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 맹주의 기본 정신은 단순하다. 강함 그리고 정신. ​ 그러니까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에도ㅡ 저들의 점수는 서서히 깎이고 있다는 뜻이다. ​ 아주 조용하게. ​ ‘쯧.’ ​ 이대로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 그래도, 한 번쯤은 막아줄 의향이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렸다. ​ 얼굴을 보자 기억났다. 몇 번 본 적 있다. 2학년이다. ​ “선배님.” ​ 나는 미소를 싱긋 지으며 말했다. ​ “입 다무시죠.” ​ 입을 다물게 만드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말. 그 말에, 상대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그락불그락해졌다. ​ “푸흡!” ​ 맨 앞에서 안내하고 있던 김하은이 폭소한다. 학생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간다. ​ “아아… 죄송해요. 푸흡.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요.” ​ 그 상황에 눈앞의 선배는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노려본다. ​ “야… 너.” ​ 그러나 그때 그 옆, 뒤쪽에 서 있던 또 다른 남학생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 “다물자. 현수야.” ​ 그리고는 내 쪽으로 시선을 슬쩍 주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조용히 말한다. ​ “우리, 후배님이. 다물라네.” ​ 말투는 유들유들하지만, 눈빛은 아니다. ​ 직접 나서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는 부류. 역시, 시키는 놈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 “다들, 조용히, 이동해주세요~” ​ 김하은의 명랑한 목소리가 앞에서 울린다. ​ 이제, 적당히 하고 따라오라는 뜻이다. ​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때, 김하은의 눈과 마주쳤다. ​ 그녀의 눈빛에는, 흥미로움이 담겨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