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쎄에에에에엑-! ​ 여러 발의 화살이 연속적으로 격발된다. 탁, 탁, 팡! ​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허공을 가르며 내리꽂힌 화살들. 과녁판은 순식간에 고슴도치처럼 변해버렸다. ​ 광활하게 탁 트인, 한적한 들판. 그 중심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 하시온. 그리고 그녀의 조부, 하태성. ​ “좋구나.” ​ 영감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 직접 칭찬이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 하지만 시온은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볼을 살짝 부풀렸다. ​ “……왜 안 여셨어요?” ​ “음?” ​ “체험이요. 뱅퀴셔 말이에요. 가온에 공고 안 올리셨잖아요.” ​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말끝에는 미묘한 투정이 묻어 있었다. ​ 덕분에, 해인이를 홀랑 뺏겨버렸다. 적어도 선택의 기회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 시온의 바람과 달리, 그녀의 조부는 모집 공고를 올리지 않았다. 결국 체험 데이트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 물론 이렇게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같이 활을 쏠 날이 다시 온 것 자체로도 너무 기쁘다. 늘, 그저 감사할 뿐이었지만… 시온의 귀여운 욕심이었다. ​ 영감은 조용히 과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 말없이 시온에게 손을 내민다. 활을 달라는 제스처. ​ 시온은 순순히 활을 건넸다. ​ “활은 오랜만이구나.” ​ 영감이 활을 당긴다. ​ “너에게 가르쳐준 이후로… 처음인가.” ​ 조용한 혼잣말과 함께, 하태성은 활을 당겼다. ​ 그 동작은 망설임 하나 없는 완벽한 흐름이었다. 연속적이고, 우아하며, 정확했다. ​ 시온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전생부터 지금까지 추구했던 동작들, 시온은 아직도 저 움직임을 완벽히 따라 하지 못한다. ​ - 팟! ​ 쏘아진 화살은 곧바로 시온이 먼저 쏜 화살을 정확히 가르며. 정중앙에 꽂혔다. ​ 엑스텐. ​ “허리가 아직은 쓸만하단 말이지.” ​ 하태성은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 그리고는 다시금 과녁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시온에게 닿는다. ​ “이 할아비는 무섭구나.” ​ 뜻밖의 말이었다. 시온은 눈을 깜빡였다. ​ “사도.” ​ 그가 조용히 말했다. ​ “이해조차 가지 않는 강함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 그리고 천천히 이어갔다. ​ “그놈들과 맞대고, 뼈저리게 느꼈다. 비록 자처한 적은 없으나, 인류 최강이라 불리는 집단이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걸.” ​ 그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 “이런 상황에서 어리고 유망한 아이들을 받는다면… 그래. 기쁘긴 하겠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너무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뱅퀴셔는, 늘 최전선에 서야 하니까. 그래서 말이다, 시온아 너도….” ​ “싫어요.” ​ 시온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 그리고는 그대로, 영감의 손에 쥐어져 있던 활을 빼앗듯 들어 올렸다. ​ 두 손에 단단히 쥐어든 활. 조용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한다. ​ “누가 할아버지한테 지켜달래요?” ​ 말과 동시에, 활시위를 천천히 당긴다. ​ 쩌적ㅡ 하며 당겨지는 시위. 묵직한 무게감이 손끝에 전해진다. 평소 그녀가 쏘는 활보다, 더 무겁고, 강하다. ​ - 팟! ​ 공기를 찢고 날아간 화살 하나가. 과녁의 심장을 향해 정확히 날아든다. ​ - 쾅! ​ 묵직한 충격음. 화살은 합금으로 만든 과녁판을 꿰뚫고, 그 너머까지 박혔다. ​ “후….” ​ 하태성의 눈빛에 이채가 서린다.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올라온다. ​ “…….” ​ 시온은 말없이 그 표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말한다. ​ “우리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믿어줘요.” ​ 영감은 눈을 감았다. ​ 그때. ​ - 부우. ​ 멀리서 하얀색 수리부엉이가 날아들었다. ​ “필립?” ​ 부엉이의 입에는 편지가 물려있었다. ​ - 부우부우. ​ 필립. 뱅퀴셔의 전서구를 담당하는 환수였다. ​ 영감은 부엉이의 입에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 봉투에는 단정한 필체로 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윤채하] ​ 익숙한 이름이다. 최근 해인이와 이곳저곳 어울리는 여학생. 마법이 주특기로 알고 있다. ​ 하태성은 종이를 펼쳐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To. 뱅퀴셔 ​ 안녕하세요. 윤채하입니다. 해인이 친한 친구이자 멘토멘티이고, 또 그냥 엄청 친해요. ​ 다음이 아니라, 이번 체험에서 왜 공고를 안 여셨는지ㅡ 그게 좀 궁금해서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 솔직히 너무 아쉽네요. 왜냐하면… 제가 지원하고 싶었거든요. ​ 뱅퀴셔, 꼭 들어가고 싶어요. ​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긴 한데 저 나름…. 아니다, 이 말은 안 할게요. ​ 아무튼 다음엔 꼭 열어주세요. 준비하고 있을게요. ​ 그리고 이건 그냥 작은 바람인데요. ​ 정해인. 얘 좀 꼭 붙잡으세요. ​ 요즘 자꾸 이곳저곳, 어디선가 데려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제가 봤을 때는 그런 학생 또 없어요. ​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시지 않길, 진심으로 바랄게요. ​ 아무튼 긴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FROM. 윤채하 ​ P.S. 전 진심이에요. 입단이든, 뭐… 해인이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허허.” ​ 편지를 다 읽은 하태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종이를 턱 밑으로 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 단 열 줄 남짓한 글인데도, 느껴졌다. 이 아이가 얼마나 당돌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지. ​ 그는 조심스레 종이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표정에는 뭔가 즐거운 게 떠오른 듯한 미소가 피어 있었다. ​ “재밌구나.” ​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간다. 손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 이렇게 당돌하고, 또 자신감 넘치는 후예들이 있다. 고개를 살짝 젖혀, 박살 난 양궁장을 바라봤다. ​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 뒤를 맡길 수 있는 아이들이, 분명히 있었다. ​ “… 누구예요?” ​ 옆에서 뭔가 낌새를 눈치챈 시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태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천천히 미소 지었다. ​ “시온아.” ​ “네?” ​ “정해인… 그놈이랑은 잘 되어 가느냐.” ​ “네, 네?!” ​ 시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확 붉어졌다. 당황해서 눈도 못 마주친 채, 볼을 감싼다. ​ ‘반응을 보면….’ ​ 하태성은 느꼈다. 자신의 손녀는 옛날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음이 확실히 있어 보인다. ​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정해인이라는 얘기다. ​ 하태성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 최근 들어 유 씨네 유무진. 또 영광, 강 씨네 강윤혁까지. ​ 자꾸 정해인에 대한 질문이 들어온다. ​ ‘힘내야겠구나.’ ​ 정해인을 노리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었다. ​ ​ ​ ​ ​ *** ​ ​ ​ ​ ​ 수업이 한창인 강의실. ​ “그러니까, 역장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환경 요소도 분명 중요….” ​ 교수의 열정적인 강의가 이어진다. 그러나, 예상하자면 분명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 5분 뒤. ​ 각 단체의 체험 명단이 발표된다. ​ 마침 수업 종료 시각도 정확히 5분 후. 타이밍은 완벽했다. ​ “…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강의실을 나섰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 그저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 “나 지금 가온 입학할 때만큼 떨려.” “심호흡해, 심호흡.” ​ 강의실에는 낮은 숨소리와 긴장된 침묵만이 감돌았다. ​ 내 옆에 앉은 것 윤채하와 천여울은 평온하다. 둘 다 신청하지 않았다. ​ 그야, 천여울은 어차피 주말이면 무조건 교단에 가야 했고, 윤채하는 뱅퀴셔가 아니면 갈 생각이 없었다. ​ 그런 그녀들이 체험을 신청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 그에 비해, 유하나는 청풍대에 신청했다고 했다. 오늘 아침 러닝할 때, 땀에 젖은 채로 슬쩍 흘리듯 말했었다. ​ 시온은 뭐…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 “한 1분 남았나.” ​ 내가 중얼거리자. ​ “확, 안 붙었으면 좋겠다.” ​ 윤채하가 엎드린 채로 대꾸했다. 퍼질러 자는 줄 알았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말은 잘한다. ​ 그러다, 잠시 뒤. ​ “… 뻥이야. 가서 잘하고 와.” ​ 갑자기 좀 미안했는지 덧붙인다. ​ “너 뭐야.” ​ “… 뭐가.” ​ “좀 귀엽네.” ​ 어째 하는 짓이 좀 귀엽다. 이런 캐릭터였나. ​ “……… 뭐래.” ​ 윤채하는 몸을 뒤척이더니 고개를 푹 박았다. ​ “어차피, 맹주는 1학년은 안 뽑겠지? 원래 2, 3학년만 뽑았잖아.” “그렇지, 관례니까….” “그럴 줄 알고, 나는 맹주 빼고 다 넣었지.” ​ 맞는 말이다. 실제로 맹주는 1학년은 좀처럼 뽑지 않는다. ‘아직은 검증 안 된 신입’이란 이유였다. ​ 적어도 2학년 정도는 되어야, 옥석을 가릴 만 하다고 판단하는듯했다. ​ 어차피 2학년이든 3학년이든, 맹주가 오라 하면 올 수밖에 없으니까. ​ 그래도 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뽑아주지 않을까 하긴 하는데… 살짝 떨리는 것 같기도. ​ 학생들의 수다도 막바지에 달한다. ​ 그리고 그 순간. ​ - 띠링. ​ [가온 체험 활동 단체별 명단 공개.] ​ 워치가 울렸다. ​ “떴뜨아아아아!” ​ “어우 깜짝아.” ​ 학생들 몇몇이 소리쳤다. 나도 스마트워치로 확인했다. ​ [맹주] ​ 즉시 맹주의 명단을 확인했다. ​ [4학년] ​ 비어 있다. 예상대로다. ​ [3학년] [윤두준] 랭킹 6위. [장현수] 랭킹 11위. … ​ [2학년] 이름이 주르륵. 대부분 상위권 학생들이다. ​ 그리고 마침내 1학년. ​ [1학년] ​ [강아린] 랭킹 1위 [정해인] 랭킹 없음 ​ “어이구 씨.” ​ 1학년은 딱 둘이었다. ​ 딱 둘. ​ 나하고, 강아린. ​ 결국 체험은 고학년들과 함께하게 생겼다. ​ 내 이름 아래엔 짧은 설명이 달려 있었다. ​ [정해인]: 일전 메두사와의 전투에서 보여준 전투력과 상황 판단, 팀 리더의 자격을 충분히 갖춘 자. 랭킹은 없으나, 극상위권이라 판단됨. ​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 학생들은 하나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례적인 일이기도 하고, 또, 1학년에서 명단에 올라간 사람은 나하고 강아린 뿐이었으니까. ​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강아린은. ​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로.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미소 짓고 있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