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들의 설명회가 끝난 지 며칠 후. 오늘은 가온 체험 활동의 공고가 나오는 날이었다. ​ 수업 중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수업에 집중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 그리고 그때. ​ 학생들의 워치가 동시에 진동했다. ​ - 띠링. - 띠링. ​ “떴다.” ​ 누군가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순간, 수업 중이던 강의실 안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손목을 들었다. ​ 물론 교수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듯, 묵묵히 책상에 기대고 서서 학생들의 반응을 지켜볼 뿐이다. ​ 각자의 워치 화면에는 곧 시작될 체험 프로그램의 참가 길드 명단이 정렬되어 떠 있었다. ​ 나는 조용히 명단을 살폈다. 명단은 단정하게 정렬되어 있다. ​ [맹주] [로터스] [블룸스] [아르카디아] [청풍대]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단체들. 역시,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건 맨 위에 적힌 이름. ​ 영광의 산하 길드이자, 랭킹 1위 길드, 맹주였다. 조용한 강의실 안, 학생들의 반응이 하나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까요.” ​ 교수가 인자하게 웃으며 책을 덮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변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 “야, 너 어디 넣을 거야?” “나 일단 로터스.” “로터스 개 빡세다던데….” “그래서 난 그냥 이번 체험은 쉬려고 맹주에서 뽑아줄 것 같지도 않고… 몸 사릴래.” ​ 체험은 어디까지나 신청이다. 물론, 대다수의 학생이 참가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전원이 참가하는 건 아니었다. ​ 대부분 주말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일정이다. 굳이 체험에 참여하지 않아도 특별한 불이익은 없었다. 가온이란 곳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걸 중시하는 곳이니까. ​ 웅성거리는 학생들 사이로, 나는 다시 워치에 시선을 돌렸다. 단정하게 나열된 이름들. ​ 그때 옆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 슥, 슥, 슥. ​ 워치를 빠르게 스크롤 하는 손끝. ​ “없어….” ​ “뭐가?” ​ 윤채하였다. 워치 화면을 마구 내리며, 살짝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뱅퀴셔… 없어….” ​ “그래?” ​ 그렇게 됐나. ​ 내심 궁금하긴 했다. ​ 지금 이 세계선은, 뱅퀴셔가 살아 있는 최초의 세계선이다. ​ 따라서 뱅퀴셔가 체험에 학생을 모집하는 공고를 낼지 안 낼지는 알 수가 없다. 과연 추가적인 인원이 필요한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는데…. ​ 영감은 굳이 뽑을 필요를 못 느낀 모양이다. 시온도 있고, 굳이 따지면 나도 있었으니까. ​ 결국, 공고에는 없었다. ​ “아아아아….” ​ 윤채하는 아쉬운 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살짝 투정까지 묻어 있다. ​ [마탑] ​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의 의외로, 가온의 체험 공고에는 마탑이 있었다. ​ 원래 마탑은 가온에 가급적 공고를 넣지 않는다. 마법사 계열이 적기도 하고, 대부분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인재를 발굴하기 때문이다. ​ [모집인원: 2명] ​ 그런데, 이렇게 공고가 들어왔고, 모집인원도 딱, 2명이라는 것은…. 의도가 명확해 보였다. ​ ‘윤채하, 주서준.’ ​ 그래서 나는 물었다. ​ “마탑이라도 신청할 거야?” ​ “아니…….” ​ “그럼 뭐하게?” ​ “몰라 그냥 쉴래 이번에는….” ​ 흥미를 쏟던 대상이 사라지자, 윤채하는 순식간에 노곤한 고양이처럼 변했다. 책상에 푹 기대어 엎드렸다. 눈동자엔 이미 졸음이 가득했다. ​ 나는 조용히, 등 뒤에 걸린 그녀의 가디건을 돌돌 말아 머리맡에 대줬다. 작은 쿠션을 찾은 듯, 그녀는 고개를 비비적거리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 “히히… 고마워….” ​ 그리고는 정말로 잠들어버렸다. ​ 캐릭터 참 명확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곳에는 천여울이 턱을 괸 채, 윤채하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성녀라고 보기에는 좀 차가운 눈빛이다. ​ “어디 고양이장수는 없나….” ​ 조용히 중얼거린다. ​ “여울아.” ​ “응?” ​ “너는 교단?” ​ “음….” ​ 천여울은 턱을 괸 손을 천천히 내려놓고, 한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살짝 갖다 댔다. ​ “아마 그럴 것 같은데….” ​ [아르카디아] [성별 조건: 여성] ​ 이번 아르카디아는 성기사 보다는 여성 사제를 모집하는 모양이다. ​ 이처럼 체험 공고의 조건을 보면, 각 단체가 현재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대략 알 수 있다. 그래서 고학년일수록 이런 지표를 꼼꼼히 따지며 참고한다. ​ 나는 천천히 다시 워치 화면을 내렸다. 내가 어디로 갈지. ​ 그것에 대한 사실 고민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 만약 뱅퀴셔가 체험 공고를 냈다면, 분명 고민의 여지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뱅퀴셔는 끝내 체험 공고를 내지 않았다. ​ 이러면, 내가 갈 곳은 하나뿐이다. ​ [맹주] ​ 백두산에서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 [체험 목표: 팀 리더가 지녀야 할 능력 배양] [우대 사항: 실전 경험 보유, 극상위권] 체험 목표가, 지금의 나와 딱 들어맞는다. 난 결국, 리더가 되어야만 했다. ​ 매력적인 선택지다. ​ 우대 사항마저 실전 경험 보유와 극상위권. ​ 이건 단순히 랭킹만을 보지는 않겠다는 뜻과 같다. 과장하자면, 마치 나를 위해 쓰인 공고 같다. ​ 그때. ​ - 똑 똑. ​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고개를 돌렸다. ​ 거기에는, 강아린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 “정해인씨.” ​ 강아린이다.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먼저 말을 건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 강아린이 내 쪽으로 다가오자, 강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은근히 쏠려온다. 그만큼, 그녀가 가진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 백두산에서 그런 일을 함께하고도, 왜 내게 학교에서 직접 말을 걸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 강아린은 살짝 웃으며, 내 귀 가까이 속삭였다. ​ “우리 계약한 사항이 하나 있는 걸로 아는데.” ​ 간드러진 목소리.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워치 화면은 여전히 켜진 상태. 그러나 내 손가락은 선택 버튼 위에서 멈춰 있었다. ​ 그녀가 어깨 너머로 내 팔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손가락을 포개듯 잡았다. ​ 그리고는, 그대로, 천천히 눌렀다. ​ [맹주] ​ [신청 완료.] ​ 어차피 누를 생각이었긴 하지만, 이 방식이 좀 더 재밌긴 하다. ​ 강아린은 다시 속삭였다. ​ “말했지?” ​ 입꼬리가 살짝 올라오며, 그때 그 눈웃음을 짓는다. ​ “너는 내꺼라고.” ​ 말을 마친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끝까지 경쾌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백두산 이후로 오랜만이다. 역시 강아린의 템포는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늘 휘말리는 느낌. ​ “… 쯧.” ​ “…….” ​ 옆자리의 천여울이 혀를 찼다. 조금 전까지 자고 있던 윤채하도 어느새 몸을 일으킨 채, 못마땅한 눈빛으로 강아린의 뒷모습을 노려본다. ​ “방금… 뭐야?” “강아린이 왜….” ​ 순식간에 강의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그때. ​ - 짝. ​ 교수가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 “확인은 다 하셨겠죠? 빠르게 수업 마무리해 봅시다!” ​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뒤늦게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인다. 워치 화면을 끄고, 책을 넘기며 다시 수업에 집중하는 척. ​ '교수님 나이스.' ​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 ​ ​ *** ​ ​ ​ ​ 늦은 밤. ​ 그러나 로터스의 건물은 여전히 환했다. ​ 높은 층 유리창 너머로 빛나는 서울의 야경, 그리고 그 위로 반사되는 집무실의 따뜻한 조명.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공간 안. 유세린은 가만히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정확히, 가온의 서버 시간과 동일하게 흐르는 시계. 초침이 서서히 움직이며, 마침내 12에 도달했다. ​ “흐응….” ​ 이걸로, 체험 공고의 마감 시간은 끝났다. ​ “어떠려나~” ​ 유세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기지개를 쭉 켰다. 손끝까지 쭉, 펼치고 나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 - 똑 똑. ​ “네~ 들어오세요~” ​ 자정이 넘었지만, 로터스 본사에는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은 사무실이 많다. ​ 그 문을 두드린 건, 유세린의 비서였다. 비서는 품 안에서 방금 막 인쇄한 따끈따끈한 서류를 꺼냈다. ​ “방금 마감된 체험 신청자 명단입니다.” ​ 유세린이 기다리는 그것이었다. ​ - 착! ​ 유세린은 받아들자마자 종이를 넘겼다. 빠르게, 또 빠르게. ​ 사람 이름, 나이, 랭킹, 지원 동기. 눈은 가볍게 움직이지만, 속도는 꽤 빠르다. ​ “신청 인원이 역대 최고로 많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부길드장님의 스피치가 학생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이 아닐까하는 분석이 있습니다.” ​ 그를 증명하듯 종이의 두께는 꽤나 두꺼웠다. 그러나 어느새 종이는 마지막 장에 도달해있었다. ​ 유세린은 전부 확인한 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 “없네요?” ​ “네? 혹시 어떤….” ​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음….” ​ 유세린의 목표는 애초에 하나였다. 그녀는 담백하게 말했다. ​ “그 옆에 있는 것도 주시겠어요?” ​ “아, 네.” ​ 비서는 서류철 하나를 더 내밀었다. 맹주의 신청자 명단이었다. 어차피 가온의 데이터베이스 정도는, 로터스 정도 되는 단체였다면 정보원들 통해 얻을 수 있었다. ​ 유세린은 그걸 받아, 천천히 넘겼다. ​ [정해인] ​ 그리고 거기에 떡하니 써 있는 이름. 그녀가 찾던 학생이었다. ​ “아하….” ​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아래로 기울었다. ​ “살짝… 속상하네요.” ​ 그러나 그뿐이었다. 표정엔 실망보다 오히려 재미가 섞인 묘한 웃음이 번졌다. ​ 아무래도 단번에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 어차피 장거리 레이스다. 그녀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을 준비할 시간이다. ​ “우리 이제 집에 갈까…요…?” ​ 유세린이 비서에게 말하던 중.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하나의 서류철을 또 발견했다. ​ 로터스 명단 하나. 맹주의 명단 하나. 더 이상 그녀에게 올 만한 서류는 없을 터였다. ​ “그건 뭔가요?” ​ “아… 이건 그냥 참고용 자료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조금 과민하게 반응한 듯하여서…” ​ “괜찮아요. 어떤 내용이에요?” ​ 비서는 조심스레 서류를 내밀었다. 자신의 판단이 괜한 오지랖일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 그녀의 비서는 유세린이 직접. 손수 뽑아서 앉힌 인재였다. ​ 다시 말해, 철저히 자신의 라인이며 사내에 믿을 수 있는 몇 없는 인물 중 하나다. 전달하는 정보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됐다. ​ “4월 기준으로, 전략기획실이랑 대외협력팀, 그리고 법무팀 간 인사이동이 조금 빠르게 돌고 있습니다. 표면상으론 인사 정비나 순환 배치지만… 묘하게 맞물리는 느낌이 있어서요.” ​ 유세린은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제가 과하게 반응하는 걸 수도 있어서… 혹시 시간 되시면 한 번만 봐주시면…” ​ “아니에요, 두고 가요. 제가 잘 볼게요. 오늘 고생했어요~ 내일은 주말이니까 푹 쉬고… 아 오늘인가.” ​ “넵.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 그리고 다시 정적. ​ 유세린은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생글거리던 표정이 점점 가라앉는다. ​ 표지는 평범했다. ​ [인사이동 변동 / 대내외 협력 부서별 흐름 요약 - 4월분] ​ 서류의 구성은 말끔했다. 보고서처럼 읽히는 정리된 흐름, 각 이동의 명분도 전부 타당했다. ​ 평소의 그녀라면 분명 아무렇지 않게 넘길 정도였다. ​ 그런데 뭘까. ​ 이 이상한 느낌은. ​ 뭔가 걸린다. 논리와 감정 사이, 애매하게 찝찝한 뭔가가 느껴진다. ​ 감각이 경고한다. ​ ‘사람 조심하세요.’ ​ 며칠 전, 엉뚱한 학생이 말했던 엉뚱한 말이 불쑥 떠올랐다. 그 말이 머릿속에 가시처럼 걸린다. ​ 왜 그 말이 자꾸 생각나는 걸까. ​ 왜지? ​ 그녀는 그녀의 감각을 믿는 편이다. ​ 유세린은 다시금 서류에 시선을 내렸다. 한 장, 또 한 장. 조용히 넘겨본다. ​ 각각은 별 탈 없다. 하나하나 보면 납득할 수 있는 명분과 사유. ​ 그런데, 전부를 이어보면…. ​ 묘하게 만들어진다. 하나의 흐름이. ​ 조직 내 세력들이 마치 의도라도 한 듯, 특정 방향을 조용히 둘러싸고 있다. 흩어진 배치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하나의 중심을 포위하는 미묘한 배치이기도 하다. ​ 만약 그들이 뒤를 돌린다면, 그 순간. 그 모든 칼끝은 중심을 향한다. ​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세린이 있었다. ​ “…….” ​ 이 모든 인사이동과 재배치 건의 최종 승인자는 이도겸. 로터스의 길드장이었다. ​ 합법적이고, 정당하며, 문제없는 절차처럼 포장되어 있다. ​ 의식하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는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 유세린은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조용히, 천천히 종이를 접었다. 아니, 쥐어짜듯 구겼다. ​ “만나봐야겠네요.” ​ 이유는 모르겠다. ​ 정해인. ​ 그 학생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