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강은 주변을 둘러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 “이게 던전이라고?” ​ “그러게.” ​ 길은 너무나도 단순했다. 한두 번의 갈림길을 지나며 제대로 된 함정은커녕, 몬스터라고는 일전의 고블린이 끝일 정도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대로 진행하다 보면 중심부까지는 금방이었다. ​ 벽면에는 고풍스러운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엔 한참 부족했다. ​ “형이 가온 던전 수업 지랄 맞다고 하던데, 별거 없네?” ​ 한이리는 대수롭지 않게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우린 그냥, 어떤 팀 만날지나 생각하면 돼.” ​ 주한강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 한이리는 잠시 멈춰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 “넌 누구 만나고 싶은데? 요한?” ​ “요한은 1대1은 모르겠는데, 걔네 팀은 못 이기지.” ​ 요한이 모의 던전에 데려간 팀원들은 후에 나가서도 함께할 팀원들이었다. 용사와 그를 수호하는 크루세이더였으니까. ​ “그럼 누구?” ​ 한이리는 다시 물었다. ​ “정해인.” “솔직히, 천여울도 빠졌겠다. 내가 시드일 줄 알았거든? 근데 무슨 낙하산 새끼가… 전에 팀도 유하나랑 했다며?” “어. 그렇다는데.” ​ 주한강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 “개 버스지 무슨.” ​ 한이리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넌 누구 만나고 싶어?" ​ 주한강의 질문에 한이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대수롭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 솔직히 말해서, 학기 시작 첫눈에 반했다. 한이리는 원래 고백을 받는 쪽에 가까웠지, 스스로 마음을 전하는 쪽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계속 다가가려 노력했다. ​ 그러나 매번 결심하고 다가갔지만, 그녀의 답변은 늘 같았다. ​ ‘미안해, 친구 만나러 가야 해서.’ ​ 게다가. ​ ‘나한테는 성 붙이라고 하더니….’ ​ 한 번은 호기롭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봤다. ​ ‘하시온이라 불러.’ ​ 그날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순간부터 그녀가 항상 찾아간다는 ‘친구’는 그의 신경을 긁어대는 존재가 됐다. ​ “나도.” ​ 결국 그는 무심한 척 대답했다. ​ “나도 정해인.” ​ 질투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단순한 경쟁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그녀 앞에서 ‘정해인’을 이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 “뭐, 그냥… 어떤 놈인지 궁금해서.” ​ 한이리는 그렇게 말하며 덤덤하게 웃어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 한편 반대쪽. 정해인 팀의 위치는 안전 지역이었다. ​ “헉… 해인아….” ​ 팀 정해인은, 벌써 일곱 번째 함정을 발동시켰다. 몬스터는 덤이며, 김대현은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훈련, 전투보다 힘겨움을 느꼈다. ​ “미로형 던전이 원래 이렇게 힘들어…?” ​ -하하하 그래 죽자 그냥!! ​ 그들 옆의 윤상혁은 실성한 상태였다. 여섯 번째 돌파 후, 가랑이 사이를 스친 화살이 마지막 트리거였던 것 같다. ​ “아니.” ​ 당황스러운 건 정해인도 마찬가지였다. ​ 그러나 옆의 시온은 숨을 고르며 답했다. ​ “미로형이긴 한데, 거기다가 출구형까지 혼합된 상태인 것 같아.” ​ 출구형 던전은 입구와 출구의 구분이 명확해 포탈도 양쪽으로 2개가 생성되는 던전이다. ​ 입구부터 중심부까지 난관과 함정이 집중된 반면, 출구는 거의 방해 없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구조를 띤다. ​ 그래서 실전에서는 출구를 먼저 찾아 거꾸로 공략하는 방식으로 '개꿀' 던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 던전은 보통 하나의 성격을 중심으로 설계되지만, 가끔 두 가지 이상의 특성을 혼합한 형태로 나타날 때도 있다. ​ “중심부에 가까워지니 느껴져. 이 던전은 중심부가 끝이 아니야. 출구로 이어진 길도 있는 것 같아.” ​ 그러니 이번 던전은 몬스터가 드문 미로형과 풍부한 함정과 몬스터로 가득 찬 출구형이 결합된 상호 보완적인 악질적 형태의 던전이라는 것이다. ​ 이를 시온이 설명하자 실성한 줄 알았던 윤상혁이 길길이 날뛰었다. ​ “아니, 그러면 우리가 입구 쪽이라는 거고 반대편에서 오는 놈들은 개꿀 빨고 있다는 거 아니야?” ​ “그런 셈이지.” ​ 윤상혁의 불만 섞인 외침에 정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뭐 이런 게 다 있…!” ​ “그리고….” ​ 그러던 중, 시온이 윤상혁의 말을 끊고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 “아마 한 번만 더 돌파하면, 중심부야.” ​ ​ ​ *** ​ ​ ​ 선택받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모의던전이 단순한 실습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그들의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각 팀의 영상은 단순한 학습자료를 넘어선 최고의 구경거리였다. ​ “와, 씨. 유하나가 요한 이기겠는데?” ​ “강아린 쟤는 학생이 맞긴 한 거야…?” ​ 센터 화면에는 이미 몇몇 팀들이 중심부에서 충돌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애초에 무조건 만나게 만들려는 뜻이었으리라. ​ 그러나 랭킹 100위권의 학생, 용현성은 다소 소외된 팀의 영상을 보고 있었다. 아직도 만나지 못한 두 팀이었다. ​ “뭐야? 쟤네는 아직도 못 도착했어? 진짜 느리네.” ​ 한 학생이 그에게 물었다. ​ “그렇긴 한데….” ​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미로형 던전을 비추는 화면으로 옮겨갔다. ​ ‘둘의 난이도가 달라도 너무 달라….’ ​ 처음에는 단순히 정해인 팀의 공략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뚜렷했다. ​ 한이리 팀의 던전은 지나치게 단순했다. 함정은커녕 눈에 띄는 몬스터도 없이, 그냥 길만 걸으면 중심부에 도달할 것처럼 보였다. ​ 반면, 정해인 팀의 던전은 완전히 달랐다. 함정과 몬스터의 연계는 물론이고, 그냥 전체적인 난이도의 차이가 분명했다. ​ 그러나 그 난관을 차근차근 공략하는 중심에는 정해인이 있었다. 몬스터를 베고 함정을 회피하며 돌파하는 그의 모습은 실습이라는 틀을 넘어선 마치 프로 영웅들이 펼치는 전투처럼 보였다. ​ 용현성의 시선이, 점차 화면 속 정해인의 움직임에 고정됐다. ​ 그러다 조용해진 주변에 용현성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 “와… 뭐지?” ​ 어느새 학생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정해인의 화면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영상을 보며 비웃던 이들조차, 이제는 조용히 정해인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 처음에는 몇몇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반 전체가 그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기 시작했다. ​ “….” ​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강렬했다. ​ “뭐야, 쟤…?” ​ 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 말은 마치 신호처럼 울려 퍼졌다. 주변의 학생들이 서로의 얼굴을 슬쩍 보며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쟤, 아니 정해인은 확실히, ​ 뭔가 달랐다. ​ ​ ​ *** ​ ​ ​ 결국 우리는 마지막 난관까지 돌파해, 최후의 안전 구역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그러나 마지막 안전 구역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타이머가 돌아가고 있었다. 쉬지 말고 빨리 중심부로 진입해 싸우라는 따뜻한 교관의 배려였으리라. ​ “119… 118…117….” ​ 윤상혁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흘러가는 타이머의 시간을 샜다. ​ “죽고 싶다….” ​ 나는 굳게 닫힌 중심부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 “다 알고 있겠지만, 지금 이 문 너머에는 상대 팀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 “그리고 쟤네는 출구를 공략했을 가능성이 높아. 우리보다 체력도 더 많이 남겨놨겠지.” ​ 시온과 김대현은 내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대현의 방패는 반쯤 부서져 있었고, 시온은 머리칼이 살짝 흐트러진 것 외에는 여전히 차분했다. ​ “그래서?” ​ 내가 망설이자 윤상혁은 누운 채로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 나는 다음 말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능성은 있었지만, 설마 하는 마음도 절반쯤 섞여 있었다. ​ 내 침묵이 길어지자, 시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종용했다. ​ “해인, 할 말 있으면 계속해도 돼.”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썼을까?” ​ 윤상혁은 고개를 들고 한참 생각하더니, 눈을 크게 뜨며 다시 쓰러지듯 눕더니 중얼거렸다. ​ “…에이 설마… 개X끼도 아니고.” ​ 그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었다. ​ 옆의 김대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 “설마… 함정을 말하는 거야?” ​ 그의 추측은 정확했다. 대인 전투에서 함정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특히 점령전 같은 상황에서는 함정이 전술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 ​ 이를 위해 대인전 수업에서도 반드시 함정 활용법을 가르친다. ​ 하지만 이건 모의 던전 수업이다. 외부 침입자나 마인 같은 위협은 전제되지 않았고, 단순히 팀 간 만났을 경우의 교전만을 상정한 상태다. ​ 그런데도 상대가 함정을 설치했다는 건, 그들이 단순히 주어진 공략에 집중했다기보다는 이후에 있을 전투를 더 신경 썼다고 봐야 한다. ​ 게다가 함정이란 건 보통 흉악한 수배자들이나 마인 같은 고위험 대상이거나, 몬스터들에게나 사용하는 극단적인 수단이었다. ​ 일반적인 교전 수업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사용하기에는 좀 많이 과했다. ​ “그러면, 해인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 시온은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 타이머의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며 귀에 맴돌았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 “나는….” ​ ​ ​ *** ​ ​ ​ “됐어, 그만하고 빨리 올라와!” ​ 던전의 중심부. 한이리 팀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 아무래도, 던전의 보상을 받으려면 양쪽의 문이 전부 열려야 되는 듯했다. ​ 그러나 상대 팀은 아무리 기다려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이때 주한강이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 ‘함정을 설치하자.’ ​ 처음에 팀원들은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주한강은 교관의 "반드시 이겨라."라는 말을 인용하며 일장 연설을 펼치니, 결국 그의 뜻은 통하고 말았다. ​ 그들의 머릿속에서, ‘교관의 진짜 뜻이 던전에 상대가 올 것을 예측하여 함정을 설치해 상대를 무력화하라는 것인가?’ 라는 의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이기겠다는 욕망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주한강은 함정 설치를 꼼꼼히 마무리한 뒤, 유적처럼 펼쳐진 던전 중심부의 2층 난간에 팀원들과 함께 매달려 대기했다. ​ 그들의 시선은 오직 반대편 문으로 향했다. ​ “근데… 진짜 많이 다치면 어떡하지?” ​ 처음부터 반대하던 팀원이 주한강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 “어차피 실습이라 많이 안 다쳐.” ​ 주한강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한이리가 웃음을 덧붙였다. ​ “그리고, 이 정도 던전을 느려터진 속도로 오는 새끼들이 문제 아냐?” ​ “그러네. 그냥 함정에 끝나는 거 아니야?” ​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 -쿵 ​ 그때였다. 반대편 중심부의 문이 열리고 중앙에서 던전의 보상이 생성됐다. ​ “왔다.” ​ 긴장되는 순간, 4개의 형체가 재빠르게 진입했다. ​ 그리고, 이내. ​ -콰과과과광! ​ 폭발.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모래바람이 사방을 뒤덮었다. 시야는 암전되고, 압력으로 공기가 흔들렸다. ​ “야! 대박이다!” ​ 폭발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대 몬스터용으로 설치하길 잘했다. 연금술 전공 팀원이 직접 만든 수제 마력 폭탄은 그들의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켰다. ​ ‘이 정도면, 요한이어도 이긴다.’ ​ 주한강은 희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모래바람이 걷히기를 기다렸다. 서서히 먼지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반쯤 겉힌 먼지 속에서 실루엣이 드러났다. ​ 그리고 그들은… 서 있었다. ​ ‘서 있다고?’ ​ 주한강은 당황했다. 먼지가 반쯤 걷히자, 썩은 표정으로 휙휙 손짓하며 먼지를 날리는 정해인이 눈에 들어왔다. ​ 그리고 그 옆에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단번에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한 하시온까지. 그녀의 입이 달싹거리며 우리의 위치를 알리는 듯했다. ​ “야 이 양심도 없는 새끼들아!!!” ​ 옆에서 튀어나온 윤상혁의 목소리가 실습장을 울렸다. 머리칼이 땀에 젖어 산발이 된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누굴 죽이려고 이런 걸 만들어놔??” ​ 넷의 상태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주한강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 폭발에 의해 크게 조각난 트롤의 사체들을. 4개의 인영이 아니었다. ​ ‘아.’ ​ 빠르게 던져진 4개의 몬스터 사체가, 함정을 발동시킨 것이었다. ​ ‘들켰구나.’ ​ 정해인의 시선이 마침내 그들에게 닿았다. 차가운 눈빛이 그들의 위치를 꿰뚫듯 고정되었다. ​ 그는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이며 내려오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 “나와.” ​ 차갑고 시린 그 표정에. 한이리와 주한강 등에는 싸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