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나는 본성이 착하다. ​ 타인과의 관계가 매끄럽고, 성정이 우수하며, 모난 구석도 드물다. ​ 단. ​ 정해인과 관련된 일은 예외. ​ [마지막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환수. 무각 유니콘.] ​ 정적을 가르며 전광판이 울렸고, 전장에 하얀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털, 번뜩이는 금안. 뿔이 사라진 자리에 몸의 색과 대비되어 어둡게 일렁이는 칠흑의 털까지. ​ “전투준비.” ​ 모든 대원의 시선이 환수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유하나의 시선은 그 환수가 아닌, 한 남자를 향해 있었다. ​ 그녀는 그를 향해 아무도 모르게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 그러나 폐 끝까지 찬 공기의 향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 ‘라벤더.’ ​ 그의 체취가 아닌, 그녀의 잔향. 윤채하의 것이, 아직도 그 주변에 희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 상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답답했다. 숨이 막혔다. ​ ‘참아.’ ​ 그녀는 조용히 속을 달래며, 이성을 붙들기 위해 자신을 붙잡았다. ​ 본디 넷. ​ 그녀들을 포함해 그를 아끼는 이들은 이미 오래전, 서로가 서로를 탐탁지 않아 하더라도 하나의 ‘계약’을 맺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선은 넘지 마.’ ​ ‘너무 모호한뎅….’ ​ ‘너만 조심하면 돼.’ ​ 이유는 단순했다. ​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 존재 자체가 역천인 그녀들이기에, 필요 이상의 감정적 교류는 반드시 부작용을 동반한다. 따라서 정해인이 성장하기 전, 그가 그런 것들을 쉬이 감당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넘지 않을 것. ​ 이미 상상이나, 속으로는 선을 넘다 못해 그 끝을 봐버린 여성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가 준비될 때까지는 그녀들은 그 선을 넘지 않기로 결정했다. ​ 결국 그녀들은 지금, 그가 성장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상태였다. ​ 그러나. ​ 눈앞의 윤채하가 정해인의 등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금세 두 볼이 붉어지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깍지 낀 손을 뒤에 진다. 앞발꿈치로 바닥을 톡, 톡 건드리며 작은 원을 그렸다. ​ 사랑을 막 시작한, 소녀의 수줍음. ​ -한 달 본다. 한 달. ​ 그녀들 중 누군가가 이미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했었지만…. 막상 이 상황이 현실로 닥쳐오자 숨이 턱 막힌다. ​ 유하나는 결코 선을 넘을 수 없다. 원하더라도 넘을 수 없기에,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저 여자는 다르다. ​ 마치, 치트를 쓰는 게임 플레이어처럼. 규칙 무시, 규율 무시. ​ 그녀들이 세운 것들은 윤채하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매력적인 남성에게 호감을 가진 매력적인 여성이 접근하는 그 자연스러운 과정을, 유하나는 막을 수 없다. ​ 그게 유하나를 미치게 했다. ​ -푸르르릉! ​ 눈앞의 마수가 푸릉거리며 콧김을 강하게 내쉰다. 땅을 쾅쾅 구르자, 땅에서 허연 유령들이 튀어나왔다. ​ “채하야 역장. 최대한 넓게, 얇아도 되니까 최대한 넓게만 펼쳐.” ​ “알았어.” ​ 정해인이 윤채하에게 지시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따른다. 그 모습에, 유하나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 -푸릉! ​ 환수가 고개를 젓는 순간, 땅을 뚫고 나온 수십, 수백의 허연 유령들이 정면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 “지금!” ​ “ㅡㅡ!” ​ -화르르륵!! ​ 윤채하는 대답 대신, 곧장 손을 뻗어 마나를 전개했다. ​ 쏟아지는 수백의 유령들이 윤채하가 펼친 역장에 닿기 시작한다. 시야는 불꽃과 연기로 가려졌다. ​ 윤채하가 펼친 역장을 놀라울 만큼 견고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짜인 마나의 그물. ​ 팟! 파직! 닿는 족족, 타오른다. 유령의 형체는 윤채하의 역장에 닿는 순간 그대로 사그라들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야는 불길 속에서 희뿌옇게 번진다. 얇지만 오밀조밀하게 짜여져 조금의 틈도 없는 그물의 코는, 유령들이 절대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 윤채하는 작게 숨을 골랐다. 입가에 미소가 스며든다. ​ ‘나, 잘하지?’ ​ 정해인의 칭찬을 기다리며, 들뜬 마음으로 연기 너머를 바라봤다. 서서히 사라지는 연기. ​ 그러나 그 순간. ​ -툭. ​ 무언가 둔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 연기 너머, 등지고 선 누군가의 실루엣. 바람이 불자, 짧은 치맛자락이 나풀거린다. 스르륵,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흘러내린다. ​ 그녀의 발끝 아래엔, 잘려 나간 거대한 목이 있었다. 무각 유니콘은 금빛 눈을 감지도 못한 상태로 명을 다했다. ​ “…뭐?” ​ 유하나였다. ​ 피 한 방울 없는 검을 가볍게 털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든다. ​ 그리고 윤채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에는, 압도적인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이 자리에서 윤채하만은 느낄 수 있었다. ​ 씨익. 유하나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 그러자 어디선가 은은하고 짙은 꽃향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향이 씻겨지는 듯한 감각을 느낀 윤채하는 고개를 돌려 눈앞을 바라봤다. ​ 그리고 그곳에서, 정해인이 유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은 약간 벌어져 있었고, 시선은 완전히 그녀에게 빼앗겼다. ​ “…와.” 무심결에 새어 나온, 짧은 감탄. ​ 윤채하는 말없이 손끝을 움켜쥐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 그녀가 듣고 싶었던 반응. ​ 그 눈빛과 목소리는. ​ 지금, 유하나가 가져갔다. ​ ​ ​ ​ ​ ​ *** ​ ​ ​ ​ ​ “그러니까, 이런 분이 처음에는 리더를 안 하시려 했다?” ​ 윤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고민준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 “너무 그러지 마.” ​ 유하나는 머쓱한 듯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보통 과제 끝나면 서로 탓하기 바쁜데, 우리 팀은 분위기가 유독 좋았다. ​ 그야. ​ [1위 팀 유하나] ​ 단체전 최종 결과. 우리 팀 이름이 전광판 맨 위에 떠 있었다. ​ “나이스!!” ​ “후….” ​ 함성. 그리고 안도의 한숨. 1등 팀에게는 부상이 수여된다. ​ 개인전에 비하면 부상은 약간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했다. 애초에 단체전은 실적보단 경험이 중요하니까. 서로의 합과 빈틈, 위기 때의 대응을 체험하는 것. ​ 그게 단체전의 취지다. ​ 나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잠시, 유하나를 바라봤다. ​ ‘성장이… 엄청난데.’ ​ 이번 웨이브의 핵심은 유령, 하나같이 실체가 희미하다. 환수는 유령을 무한으로 소환해 시야를 가리고, 혼란을 유도한다. ​ 대부분 역장이나 방어를 통해 버티는 데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 유하나는 연기가 사라지고, 유령이 다시 만들어질 그 사이에 직접 목을 치러 나갔다. 처음에는 내가 갈 생각이었다. 상황을 보고, 조금 피로해진다 싶으면 바로 할 준비 중이었는데. ​ 그보다 먼저인 게 유하나였다. ​ 무모한 게 아니라, 확신을 갖고 간 타이밍. ​ 나는 늘 두 번째 편린을 누구에게 먼저 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셋 중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는 사람에게 먼저 편린을 건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 아무래도 이 상황이라면, 큰 변수가 없는 이상 유하나가 첫 번째가 될 것 같았다. ​ 역시, 개입 없이 스스로 생각할 시간은 준 건 맞는 판단이었다. 나는 내 방식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게 됐다. ​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 “야… 저기 저분 내가 아는 그 분 맞냐?” ​ “미친.” ​ 뒤편에서 갑작스럽게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쏠린다. ​ 나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나도 모르게 몸을 반듯이 폈다. ​ 유 가(家)의 가주, 유무진. 청풍대의 주인이자, 유하나의 아버지. ​ 그가 직접 가온의 휴게실까지 행차한 순간이었다. ​ 그 순간. 유하나가 조용히 내 앞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 그녀는 나와 유무진 사이를 막아서듯 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 “아빠. 여긴, 학교예요.” ​ 그에 유무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딸아, 정말 많이 강해졌더구나. 깜짝 놀랐다.” ​ “집에서 하면 되잖아요…. 그런 얘기는.” ​ “그래, 알았다. 알았어.” ​ 그 청운검제가, 딸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다니. 주변에 있던 학생들, 심지어 교수들까지도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 그러나 나는 느꼈다. 어째서인지 유무진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 조용히 유하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그녀를 옆으로 비켜 세웠다. ​ 잠시 놀란 듯 고개를 든 유하나. 하지만 곧, 이해한 듯 작게 끄덕인다. ​ 나는 유하나를 지나, 유무진 앞에 섰다. ​ “정해인입니다. ” ​ 주변이 조용해졌다. ​ “말씀 있으시면, 제가 듣겠습니다.” ​ 유무진의 눈이 눈을 살짝 감았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선다. ​ “그래.” ​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울렸다. ​ “악수나 한 번 할까.” ​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손바닥은 말할 것도 없고, 손등에까지 굳은살이 빽빽하다. 그가 살아온 세월이 그대로 묻어나는 손이었다. ​ 나는 조용히, 그 손을 맞잡았다. ​ 꽈악. ​ 잠깐의 악력. 힘을 준다. ​ 상당한 압박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움찔했을 것이다. 손끝이 떨리거나, 얼굴에 미세한 일그러짐이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 나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그 악수를 받아냈다. ​ 다소 무식한 방법이나, 그것이야말로 유무진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는 말보다는 몸으로 확인하는 것을 선호하는 자였다. ​ 그러나 내가 익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영감에게 심심할 때마다 당하던 고문과 비슷했기 때문. ​ 그 정적 끝에, 유무진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 “정해인.” ​ 턱턱. ​ 그가 내 어깨를 툭, 툭. 두 번 묵직하게 두드린다. 그러곤 말없이 돌아선다. ​ 곧바로, 유하나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는다. 유하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 유무진은 잠시 애틋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 이름 기억하마.” ​ 나는 짧게 숨을 고르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 “영광입니다.” ​ 이건, 그의 인정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