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더욱 흘러, 교류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늘은, 그 전날.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은 ‘권능학개론’. 가온의 1학년이라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 강의였다. ​ 담당 교수는 현직에서 물러난, 1위 길드 맹주의 전속 트레이너 출신. 실전 경험도 풍부하지만, 그는 늘 전투보다는 성장 방향성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다. ​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칠판에 단어 세 개를 또박또박 적었다. ​ 의지, 경험, 선택. ​ 그리고는 분필을 내려놓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러니, 영웅의 성장과 권능의 확장은 단순히 시간이나 반복된 실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 그는 적은 단어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원으로 감쌌다. ​ “그 모든 결과는, 결국 스스로 어떤 길을 선택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택한 길. 단련과 의지의 방향에 따라, 확장 권능은 전혀 다른 형태로 여러분에게 응답하게 될 겁니다.” ​ 잠깐의 침묵이 강의실을 덮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누군가는 펜을 멈춘 채 그 말을 곱씹었다. ​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인물들의 성장을 이끌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이야기다. ​ 또, 조화의 편린을 2차로 개방해야 하는 나로서는 새겨들어야 하기도 했고. ​ 아는 내용이어도 이렇게 들으면 또 다른 법이니까. ​ 명강의다 아주. ​ ‘기분이 묘하네.’ ​ 내가 만들고 계획한 설정을 누군가가, 그것도 권위 있는 자가 전문적으로 설명해주는 장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 “이상으로 수업을 마칩니다.” ​ 교수의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정적이 깨졌다. 그 순간, 학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런데, 권능, 권능 하다 보니. ​ ‘지금은 어떠려나.’ ​ 나는 문득, 주변 인물들의 시스템이 궁금해졌다. ​ 지금까지는 그저 아는 만큼 알고 있었고, 예상치로 적당히 추측했을 뿐이었다. ​ 윤채하는 예외. 최근에 직접 확인한 적이 있으니까. ​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도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도 급해서 눈깔이 돌았기에 대뜸 요청했던 거지, 평소의 나라면 절대 그렇게 대놓고 요구하진 않았을 것이다. ​ 그녀가 선뜻 동의한 것도 고마운 일이다. ​ 자신의 시스템을 누군가에게 공개한다는 건, 그만큼의 의미를 가진다. ​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 자체로 약점이 될 수도 있으며 여러모로 위험하다. ​ 실제로 TV 방송에서도 다뤄졌었다. 상위권에 속한 영웅 부부들조차 서로의 시스템은 가급적 공유하지 않는다고. 믿고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시스템은 예외라는 이야기였다. ​ 굳이 표현하자면 영웅으로서의 알몸을 보여주는 느낌이라 이해하면 편하겠다. 그만큼 민감하고, 그만큼 조심스러운 문제다. ​ 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윤채하에게 따로 시간을 내 조용히 사과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더니,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었다. ​ -괜찮아…. ​ 윤채하가 쿨한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 “하암….” ​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몸을 쭉 펴는 천여울. 방금 막 깬 듯한 모습. 어깨를 으쓱이며 기지개를 켜더니,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는다. ​ “굿모닝.” ​ “굿모닝은.” ​ 나는 즉시 그녀의 이마에 응징의 딱밤을 날렸다. ​ -딱! ​ “읏!” ​ 천여울은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쓸어올렸다. ​ “이것도 안 들으면 대체 뭘 들으려고.” ​ 저 앞의 강아린과 유하나를 봐라. 수업 내내 교수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를 않으려 하더라. 모범생은 평소 수업에서부터 태도가 드러나는 법이다. ​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윤채하. 그녀는 여전히 책상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 분명 둘 모두에게 이 교관의 수업만큼은 들으라고 했었다. ​ “….” ​ 눈을 감은 채, 숨결도 일정하다. 수업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자고 싶은 건지. ​ “꼴통이네.” ​ 옆에서 천여울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말하는 본인도 거기서 거기다. ​ “어휴.” ​ 그래, 얘는 뭐…. 일차적으로 확장할 거는 다 했으니까 그렇다 치자. ​ 그래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니까. ​ 나는 앞에 놓인 아이스커피를 집어 들었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끝을 차갑게 적신다. ​ 그리고 천천히. ​ -스윽. ​ 그 차가운 손으로 윤채하의 목덜미를 살짝 붙잡았다. ​ “으엑!” ​ 그녀가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나는 천연덕스럽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일어났어?” ​ “… 씨잉.” ​ 윤채하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살짝 찡그린 얼굴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다. ​ 그때였다. ​ “가자, 해인아.” ​ 멀리서 들려온 경쾌한 목소리. ​ 유하나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내일이 교류전이기 때문에, 오늘 교류전 단체 미션을 공개한다. ​ 나와 윤채하는 일어나 팀장인 유하나를 따라 강당으로 향했다. ​ 강당으로 향하는 길은 평소보다 훨씬 붐빈다. ​ 가온의 파란색 문양과는 다른, 선명한 적색과 금빛이 어우러진 다른 색의 제복들. 그들은 어제 미리 도착한 칼로스의 학생들이었다. ​ 당장 내일이면 격돌할 상대들이지만, 아직은 어색한 탐색전일뿐. ​ “사람 엄청 많네?” ​ “번잡해.” ​ 유하나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고, 윤채하는 투덜거렸다. ​ 그 사이, 강당의 입구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에 달린 프로젝터가 웅장한 조명과 함께 작동했다. ​ 우리는 자리에 앉아 안내를 기다렸다. 늘 비어있던 반대편 강당에는 칼로스의 학생들이 잔뜩 앉아있었다. ​ 마이크를 잡은 교수는 간략한 인사와 함께 주의사항 몇 가지를 전달한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단상 뒤편의 대형 스크린으로 집중되었다. ​ "지금부터 내일 진행될 교류전 단체전의 미션을 공개하겠습니다." ​ 스크린 화면이 바뀌며, 큼지막한 타이틀이 나타났다. ​ [ 교류전 단체 미션 : 고대 유적 수호자 ] 푸른 안개가 스며든 붕괴된 유적이 배경처럼 화면에 띄워진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번 미션의 핵심적인 내용들이 간결하게 요약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 내용은 단순하다. 각 팀은 거점 하나씩을 배정받는다. 총 10번의 웨이브가 차례대로 등장하며, 모든 팀은 동시에 같은 적을 상대하게 된다. ​ 웨이브를 가장 먼저, 완벽하게 전멸시키는 팀이 등수별로 승점을 획득한다. ​ 1년 전, 내가 막아냈던 마물 사태를 모델로 만든 구조다. 10회의 웨이브 동안 얼마나 안정적으로 버티면서도, 얼마나 빨리 마무리 짓느냐가 핵심이었다. ​ 옆자리에서 시선이 자꾸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윤상혁이 느끼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너만 믿는다.” ​ “어우 징그러워.” ​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받아쳤다. ​ 사실 크게 어렵지는 않은 과제다. 어차피 메인은 개인전이었으니까. ​ 교수가 마이크를 한 번 두드리더니, 다시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리고 이어서, 교류전 개인전의 대진표를 공개하겠습니다." ​ 스크린이 다시 어두워지더니 브래킷 형태의 토너먼트 대진표가 나타났다. 이름들이 하나둘 정리되어 뜨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 윤채하. 그녀의 이름이 보인다. ​ ‘무난하네.’ ​ 1회전은 무난하다. 막말로 지기가 더 어려울 상대. 2회전, 3회전까지도 추적해봤으나, 위협적인 이름은 없다. ​ 그러나, 그 반대편. 주서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 큰 이변만 없다면, 윤채하와 주서준이 결승에서 맞붙게 될 것이다. ​ 나는 옆자리에 앉은 윤채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누가 전해달라던데.” ​ “뭘?” ​ “옛날이랑 많이 달라졌다고. 그거, 알고 있으라고.” ​ “그래?” ​ 윤채하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 잔잔한 목소리지만, 그 안에는 자신감이 담겨있었다. ​ 그렇게 개인전 대진표 확인까지 마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팀 유하나, 총 8명은 강당 앞에 하나둘 모였다. ​ “어쨌든, 내일 진짜 잘해보자.” ​ 평소에 차분하던 김대현이 의외로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던 순간. ​ -띠링! 띠링띠링띠링!! ​ 갑작스럽게 유하나의 워치에서 미친 듯한 알림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뭐지…?” ​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워치 화면을 들여다보는 찰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입술이 떨렸다. ​ “잠깐만, 나 먼저 갈게! 해인아! 내일 봐!” ​ 말이 끝나자마자, 유하나는 그대로 달려 나갔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 ‘뭐지?’ ​ 나는 속으로 고민했다. 갑자기 유하나가 저럴만한 일이…. ​ “뭐야…?” ​ 우리 중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다른 누군가가 워치를 확인하다가 급히 외쳤다. ​ “다들, 이거 봐봐!” ​ 우르르 몰려든 시선들이 한꺼번에 작은 워치 화면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갓 업데이트된 뉴스 알림이 떠 있었다. ​ [속보][ ‘청운검제(靑雲劍帝)’ 유무진, 폐관 수련 종료… 5년 만에 전선 복귀 선언.] ​ 순간, 주변이 잠깐 조용해졌다. ​ 아, 이거였구나. ​ 유하나의 아버지이자. ​ 유 가(家)의 가주. ​ 유무진의 복귀였다. ​ 그제야 유하나가 왜 그렇게 놀라 뛰쳐나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자그마치 5년 만의 귀환. 그리고 그녀에게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 ​ ​ ​ *** ​ ​ ​ ​ ​ 사람이 드나들 수 없었던 유가의 가주 동. 오늘은 오랜만에, 많은 사람이 밝은 표정으로 그 문을 드나들었다. ​ 유 가(家)의 가주, 유무진. 그의 폐관 수련이 길고 긴 세월 끝에 마침표를 찍은 날이다. ​ “유 가가 다시 날아오를 일만 남았어….” “청풍대가 다시… 최고가 되겠구나.” ​ 문전성시. ​ 기뻐하는 사람들과, 청풍대의 제자들 사이로. 유하나는 조용히, 그러나 당당하게 그 걸음을 옮겼다. ​ “아가씨 축하드립니다!” ​ 연이어 들려오는 인사에 유하나는 미소로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던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 “가주님은, 어디 계세요?” ​ 한 사용인이 손으로 가장 큰 기와집을 가리켰다. 유하나는 다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 문을 향해 걸어갔다. ​ -철컥. ​ 거대한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 방 안에는 청명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정좌하고 앉은 남성. 등 너머로도 느껴지는 위엄. ​ “왔구나.” ​ 유무진의 낮고 깊은 음성에, 유하나는 숨을 들이켰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을 꾹 눌러 담았다. ​ “5년 만이구나, 내 딸아.” ​ 아니. 그녀에게는 겨우 5년이 아니었다. ​ 유하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깊이 부복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붙잡은 채, 그녀는 입을 열었다. ​ “유 가의 소녀, 가주님을 뵙습니다. 너무… 오랜만입니다. 가주님.” ​ “… 많이 컸구나. 내 딸.” ​ 유무진은 천천히 돌아앉으며,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기특함. 씁쓸함. 죄스러움. 그 모든 감정이 얼굴 위에 조용히 떠오른다. ​ 그의 손에는 지난 폐관 수련 간 유하나의 학교생활이 담긴 사진들과 몇 장의 신문 기사가 들려 있었다. ​ 이미 너무 유명하게 알려진 사실. 그는 딸바보였다. ​ 그런 딸을 홀로 남겨두고,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듯 폐관에 들어간 것은 피를 삼키는 고통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 그의 시선이 천천히, 유하나를 훑는다. ​ 그녀가 풍기는 기운은, 단순히 유가의 검술만이 아니었다. 이질적인 기운, 그러나 유가의 검술과 조화로이 섞이는 독자적인 기운이, 그녀에게 깃들어 있었다. ​ 그리고 그 곁에 파지한, 붉은 검집의 검. 한눈에 봐도 기운이 범상치 않다. ​ 그녀는 이미, 유가의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 유무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궁금했다. 어떻게 이토록 단단히 성장했는지. 어떤 이들과 함께하며 이 길을 걸었는지. ​ 그러나, 유무진. ​ 그가 지금, 아버지로서 가장 궁금했던 건 그것이 아니었다. ​ “…딸아.” ​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떨리는 손으로 들어 올렸다. ​ “그런데, 대체 이 녀석은 누구냐?” ​ 덜덜 떨리는 손끝이, 유하나와 함께 찍힌 잘생긴 남성을 가리켰다. 사진 속 모습을 보면, 딸의 학교생활 절반, 아니, 대부분을 함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그 남자는 딸의 삶 속에 너무나 자연스레 녹아 있었다. ​ 유하나는 아버지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살짝 들었다. 사진을 바라본 그녀의 입가에,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하지만 미소도 잠시, 그녀는 다시금 깊게 고개를 숙였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그녀가 이름을 불렀다. ​ “정해인.” ​ 달뜬 숨결. 그리고 그 끝에 이어지는, 확신에 찬 목소리. ​ “제가, 평생을 지아비로 섬기며 모실 사내입니다.” ​ 그 말이 끝나자마자. ​ 유무진의 숨이 멎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