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원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천여울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 에리엘의 신성이 그녀 안에 깃든 순간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후보가 아니다, 여신의 그릇으로써 차곡차곡 그 힘을 쌓아갈 것이다. ​ “기분은 어때?” ​ 나는 천여울을 바라보며 물었다. ​ 천여울은 천천히 눈을 떴다. 풀린 듯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 “…황홀해.” ​ 천여울이 조용히 속삭였다. 열이 오른 얼굴, 살짝 풀린 눈매,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고, 숨은 조금 가빠 있었다. ​ 신앙심이 강한 그녀로서 최고의 충족일 것이다. 행복감이 있을 수밖에. ​ -또각. ​ 그때, 천여울의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로브 자락이 바닥을 스친다. ​ 루크 주교였다. ​ 그는 잠시 천여울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 “…성녀시여.” ​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 “에리엘 님의 뜻이 머무셨습니다.” ​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 “이제 더는 후보가 아닌 진정한 성녀로 거듭나셨음을, 아르카디아 교단을 대표하여 경축드립니다.” ​ 천천히 고개를 든 주교의 눈엔, 믿기지 않는 감격이 서려 있었다. ​ 그 순간, 천여울을 지지하던 교단 인원들이 자연스레 손뼉을 쳤고, 건너편의 용사 세력도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마지못해 박수를 보탰다. ​ 성녀와 용사가 정식 지위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내려진 신탁을 온전히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나 천여울은 그 절차조차 뛰어넘어 버렸다. 물론, 명목상 수행을 하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명목일 뿐이다. ​ 아직 요한은 후보 딱지를 떼지 못했다. 이걸로 성녀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 그런데 그 순간. ​ 내 소매 끝이, 사르르 당겨졌다. ​ “해인아아….” ​ 익숙한 음성. 조심스럽게 소매를 붙잡은 그녀는 양손으로 내 팔을 살짝살짝 흔들고 있었다. ​ “끝나고… 약속 있어?” ​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 질문보다는, 부탁에 가까운 말투였다. 말끝은 살짝 올라가 있었고, 눈빛은 평소보다 더 또렷했다. ​ “커흠!” ​ 루크의 반대편에서 용사 파의 주교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을 끊었다. ​ “성녀로 거듭나셨으니, 몸가짐을 더 정숙히 하셔야…” ​ 하지만 그녀는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시선을 나에게 고정했다. ​ “있냐고오오.” ​ 말을 있는 힘껏 늘리며 투정을 부린다. 게다가 손까지 살짝살짝 흔들며 다시 묻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 “어, 해야 할 게 있어서.” ​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알았어….” ​ 잠깐의 침묵.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루크 주교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 “아마 눈치채셨을 테지만 에리엘님의 티아라입니다. 흡수는 잘한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 다시 천여울에게 시선을 돌려 살펴봤다. 그녀는 눈을 똘망하게 뜬 채 고개를 갸웃했다. ​ “네… 뭐, 케어가 좀 필요할 수도 있겠네요.” ​ 담담하게 던진 말에, 루크 주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몇 번을 말해도 감사가 부족할 겁니다.” ​ 그의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다. “해인 님은, 저희에게 늘 도움만 주시는군요.” ​ 주교는 고개를 낮추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 “아르카디아는 결코 은혜를 좌시하지 않습니다. 이른 시일 내에, 반드시… 만족하실만한 방향으로 보답하겠습니다.” ​ “네. 그러세요.” ​ 대답은 했지만, 솔직히 상관없었다. 적어도 직접 키워내고 있는 중요한 인물들에 대해서만큼은, 어떤 대가도 필요 없었다. ​ 호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다. 내가 살려고 하는 거다. 살려고. ​ 그 말에 함께 루크 주교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뒤에 줄지어 서 있던 성녀 파의 성직자들 또한 일제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 눈앞의 천여울마저도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으로 가져온 뒤, 천천히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 나 또한 고개를 살짝 숙여 답했다. ​ “수고하세요.” ​ 이런 분위기가 딱히 불편하다는 건 아닌데, 취향은 아니었다. ​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 ​ ​ ​ ​ ​ *** ​ ​ ​ ​ 협회의 최하층, 윤채하는 감탄하며 들어섰다. ​ “와….” ​ 정해인의 판단은 맞았다. 윤채하가 카페에 얌전히 앉아 있을 리 없었다. 로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결국 그의 손에 목덜미가 붙잡혀 협회의 최하층으로 끌려왔다. ​ 도착 직전까지도 볼거리는 1층에 더 많았다며 투덜거리던 그녀는, 막상 도착한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벽 너머, 고요하게 떠올라 있는 하나의 구체. ​ “마법? 현상? 이건 대체….” ​ 윤채하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 협회에서 시행한 정밀 검사 결과, 마기는 감지되지 않았다. 겉에 붙은 마기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고 한다. ​ ‘그래도 조심해야….’ ​ 하지만 정해인은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 이 구체는 엄연히 악신의 잔재. 이해 불가능한 무언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 그게 정해인이 윤채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였다. 그녀의 권능이면 굳이 건들지 않고도 분석할 수 있기 때문. ​ 벽 너머에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녀의 권능 아 프리오리(A priori)가 이 있기에 할 수 있는 방법이다. ​ 지금부터는 그녀의 몫이다. ​ “한 번 맘대로 해봐.” ​ 정해인이 조용히 말했다. 윤채하는 뭔가에 홀린 듯, 유리 벽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 “대신, 절대 건들면 안 돼.” ​ 당부의 말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우우웅…. ​ 구체는 마치 살아 숨 쉬듯, 낮게 울리며 반응했다. ​ “눈으로만 분석해. 안될 것 같으면, 그냥 포기해도 돼.” ​ 윤채하의 눈이 크게 열리며 눈동자가 타올랐다. ​ ‘마력 덩어리.’ ​ 선도, 악도 아닌 그 자체로 모순인 마력의 덩어리였다. 윤채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천히, 신중하게 그 구조를 해체하듯 분석하기 시작했다. ​ 그녀의 권능이 그 뜻을 따라가며, 하나하나 뜯어보려는 찰나…. ​ -파지직! ​ 구체가 순간적으로 진동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 “야!” ​ 정해인의 외침과 함께. 윤채하의 시야가 새까맣게 뒤집혔다. ​ ​ ​ ​ *** ​ ​ ​ ​ 그녀는 다시금 눈을 떴다. ​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낯선 공간에 떨어졌다. ​ 하얀 구름. 빛으로 가득 찬 천정. 향긋한 꽃향기. 발아래 펼쳐진 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꽃밭. ​ 그녀는 거대한 낙원 한복판에 서 있었다. ​ ‘천국?’ ​ 그게 윤채하의 평가였다. ​ 구체를 분석하던 중 정신이 끊겼는데, 눈을 뜨자 이곳이다. ​ 사방은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고, 공중에는 작은 천사들이 날아다닌다. 하얀 기둥, 황금빛 천장. 천국이라 불러도 무방한 공간이다. ​ 그녀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묘하게, 안정되는 기분. ​ 그때였다. ​ [오셨군요.] ​ 부드럽고 따뜻한 음성이 윤채하의 머릿속을 울렸다. ​ 그녀의 눈앞, 높고 장엄한 왕좌에 여신이 앉아 있었다. ​ 금빛의 긴 머리칼과 자애로운 미소. 그리고 황금 장식으로 둘러싸인 신성한 로브. ​ 그 여신은 천천히 왕좌에서 내려와, 윤채하에게 다가왔다. ​ [지혜의 눈을 가진 자, 그대의 용기를 칭찬합니다.] [당신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는 자입니다.] ​ “… 제가요?” ​ 갑작스러운 칭찬에 윤채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그렇습니다.] ​ [이곳에 당신이 온 것 또한, 위대한 운명의 일부분입니다.] ​ 여신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한 걸음 더 다가왔다. ​ [그대의 뜻으로, 그대만의 정의를 실현하세요.] ​ 그리고 여신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마치, 선택을 기다리듯. ​ 윤채하는 갑작스럽게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곱씹었다. ​ 갑작스러운 상황, 가끔 듣고는 했다. 특별한 인물들이 ‘시스템’의 축복을 받는다는 이야기. ​ 자신 역시 어렸을 적, 시스템의 총애를 받아 권능을 얻었다. 그것이 바로 [아 프리오리]였다. ​ 그러나 뭔가, 확연히 다르다. ​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공간.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분위기. 그리고 친절한 여신. 그런데도, 그녀의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서 강하게 경고음이 울렸다. ​ 너무 완벽하기에, 오히려 가짜 같다. ​ ‘잡지 마!’ ​ 정해인이 심어둔 몸속의 그 기운이, 작게 타오르며 반응했다. 그 뜻은, 명백한 거부였다. ​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정해인은 없었다. ​ 적어도, 옆의 그가 없는 이상 결정을 내리는 건 왠지 싫었다. ​ 최근 들어 그녀는 많은 부분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그가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저는 괜찮아요.” ​ 윤채하가 조용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럴 리가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별로 시간이 없네요.] ​ 여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눈빛은 더 이상 자애롭지 않았다. ​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작은 천사들이 어느샌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작디작은 그 손들. 그러나 그 손끝에 쥐어진 창이 일제히 윤채하를 향한다. ​ “…싫다고요.” ​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분명한 거절이었다. ​ 그러자, 서서히 숨이 막혀왔다. ​ 꽃밭에서 퍼지는 향이 머릿속을 흐리게 한다. 기분 좋았던 그 향이, 이젠 구역질 나는 달콤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 여신이 다가왔다. 손은 여전히 내민 채였지만, 눈빛은 한기를 머금은 채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이 저리기 시작했고, 다리가 점점 말을 듣지 않았다. ​ ‘안…돼….’ ​ 권능 [아 프리오리]가 저항을 시도했지만, 그녀는 마치 깊은 늪에 빠진 듯 빠르게 가라앉았다. 윤채하는 항거할 수 없는 기운에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 그때였다. ​ -화르륵. ​ 심장에서 타오르던 작고 선명한 기운이, 순간 폭발하듯 솟구쳤다. 그 불꽃은 그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퍼졌고, 윤채하를 감싸는 투명한 장막이 형성됐다. ​ -쎄애애액! 팅! 팅! ​ 순식간에 날아든 수십 개의 창이, 장막에 닿는 순간 빗겨나간다. ​ “하아… 하아….” ​ 그녀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 안 가득 익숙한 냄새가 채워졌다. ​ 꽃의 향이 아닌, 그의 향. ​ [아… 이런.] ​ 눈앞의 여신이 작게 탄식했다. 그리고. ​ [그분이... 또!! 실망하시겠어요!!!] ​ 외침과 동시에,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애롭던 얼굴이 찢어진 웃음으로 일그러지고, 눈동자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그 말이 끝나자, 윤채하의 눈이 활짝 열렸다. ​ [권능: 아 프리오리(A priori)가 활성화됩니다!] ​ 거대한 낙원이, 껍질을 벗기 시작했다. ​ 화려한 꽃밭은 피로 물든 양귀비밭으로. 천사들의 미소는 찢어지며, 그 안에서 촉수와 이빨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 [한순간만이라도! 망설였다면! 됐을 텐데!!] ​ 여신의 황금빛 로브가 찢기며 검은 베일로 바뀌었고, 피부엔 붉은 문양이 피어올라 마침내 눈동자가 전부 붉게 물들었다. ​ [사도(使徒) 아리아의 유혹을 이겨냅니다!] [그대가 이겨낸 시련과 위업에 찬사를 보냅니다.] 눈 앞에 떠오른 메세지. 어렸을 적, 권능을 각성한 그 순간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 진짜, 시스템이다. ​ 그때, 윤채하의 몸과 이 낯선 세계의 경계가 흐려지며 분리되기 시작했다. ​ 빛의 틈. 그곳으로, 누군가가 손을 뻗어 그녀를 강하게 깨웠다. ​ “일어나!! 윤채하!!” ​ 날카롭고도 익숙한 목소리. 그녀의 눈앞에, 정해인의 얼굴이 있었다. ​ 당황한 듯 조금 벌어진 입, 걱정으로 가득한 눈. ​ 그녀가 고개를 올리자, 허공에 문구들이 떠올랐다. ​ ==== [권능: 아 프리오리 (A priori)] ①꿰뚫는 눈 ㅡ 숨길 수도, 숨을 수도 없다. ​ ② 선험적 지식 ㅡ본질은 이미 정해져 있다. ​ ③ ??? (미해방) ==== ​ 막혀 있던 세 번째 슬롯. 그 봉인이 풀어졌다. ​ 유리 벽 너머에서 고요히 떠 있던 구체가 갑작스레 파동을 일으켰다. 그 빛줄기가 벽을 뚫고 윤채하의 가슴으로 직선처럼 빨려 들어갔다. ​ 순간, 정해인의 눈이 커졌다. ​ “!” ​ 그는 고개를 좌우로 휙휙 돌리며, 눈 앞의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 [패러독스 스펙트럼(Paradox Spectrum)을 습득합니다.] ​ [선도 악도 아닌, 존재 자체가 모순인 에너지의 정수를 흡수했습니다.] [권능: 아 프리오리 (A priori)와 감응합니다!] ​ [ ③ 허기의 탐구자 ㅡ 있는 대로 먹어 치우고, 분석하고, 흡수합니다.] ​ “아….” ​ 윤채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해인은 그 소리에 곧장 반응했다. ​ “윤채하! 너 기절했었어.” ​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당황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 윤채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없이. ​ 누가 자신을 지켜줬는지. 방금 전, 그 광기 어린 공간 속에서 누구의 기운이 자신을 감쌌는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 없었다. ​ 윤채하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조심스레 웃었다. ​ “응… 괜찮아.”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정해인을 바라보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