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지 못하거나,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누구는 팝콘을, 누구는 음료를 손에 쥔 채 간만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다. ​ 우수한 학생들의 전투는 언제나 볼거리가 되어줬기 때문. ​ 하지만 모두가 그 볼거리를 즐기고 있는 건 아니었다. ​ “…….” ​ “…….” ​ 화면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두 여인. 바로 천여울과 강아린이었다. ​ 방금 막 화면에서 정해인과 하시온의 교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 -시온 쟤는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그러게 엄청 빠르네. ​ 주변 학생들의 감탄이 섞인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 “네가 그럼 그렇지.” ​ 천여울이 작은 목소리로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평소 같으면 참여하라 해도 한사코 거절할 년이, 팀장을 수락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 -와아! -둘 다 너무…. ​ 교전이 진행된 지 몇 분 만에, 학생들은 수준 높은 전투에 넋을 잃었다. 그러나 천여울과 강아린의 관심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정해인이 마침내 무수한 화살 세례를 뚫고 시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 ​ 곧이어 그가 시온을 그대로 나무 위로 밀어붙이며 그녀를 완벽히 제압했다. 완전히 올라탄 모양새. ​ 다른 사람 눈에는 완벽하고 정석적인 제압 장면이었겠지만, 그녀들은 하시온의 반응에 주목하고 있었다. ​ 그리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 “얼씨구, 아주 방을 잡지 그래.” ​ 강아린은 어이없다는 듯 팝콘을 씹으며 빈정거렸다. ​ -벌떡. ​ 천여울이 참다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어디 가?” ​ 자리에서 일어난 천여울을 보며 강아린이 무심하게 말했다. ​ “어디든.” ​ 천여울은 차갑게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과는 달리, 화면 속 두 사람의 모습은 여전히 뜨겁고 아슬아슬했다. ​ 그 순간. ​ -스윽. ​ 공중에서 비행하며 촬영 중이던 카메라의 각도가 나무 너머로 가려졌다. 시야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 “뭐야, 왜 이래?” ​ 강아린이 갑자기 화면에서 사라진 두 사람 때문에 당황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 -띠링. ​ [적대팀장 하시온 탈락] ​ 화면 한구석에 뜬 글자. ​ “나이스.” ​ 강아린이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 천여울도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돌아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어지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역시 해인이야.” ​ ​ 한편. ​ 본대 쪽. ​ 골렘을 격파하고 민간인의 목전까지 빠르게 다가선 유하나 팀은, 오른쪽 사이드에 있던 한이리로부터 무전을 받았다. ​ -오른쪽으로 꺾자마자 대항팀과 조우 예정. ​ 민간인을 확보하는 지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필연적으로 대항팀과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쾌속으로 돌파를 한 것이 아닌 이상, 전투를 거치지 않고서는 민간인 구출은 불가능했다. ​ 처음부터 가온이 설계한 전투 구도였다. ​ “어떻게 할까?” ​ 김대현이 뒤돌아보며 리더의 의견을 물었다. 정면에서 거친 전투를 이어가고 있던 그는 숨이 가빴다. ​ 현재 정해인의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 만약 사이드가 패배했다면 무턱대고 앞으로 전진했다가는 적대팀 사이드에게 포위당할 위험도 있었다. ​ “전진.” ​ 그러나 유하나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음... 근데 이거 좀 위험하지 않을까?” ​ 그때, 고민준이 신중히 의견을 내놓았다. 정해인의 실력을 모르는 그의 입장에선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 유하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 “괜찮아. 이겼을 거야.” ​ “음… 리더가 그렇다면….” ​ 단호한 태도에 고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의 반론을 멈췄다. 그는 직감적으로 유하나의 의견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 그 순간이었다. ​ -지지지직. ​ -아 아, 들려? ​ 익숙한 목소리. 정해인의 음성이 유하나의 무전기에서 울려 퍼졌다. 유하나는 재빨리 무전기를 들어 입술을 뗐다. ​ “어 들….” ​ -탁! ​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채하가 옆에서 손을 뻗어 무전기를 낚아챘다. ​ “들려! 괜찮아?” ​ 유하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조용히 윤채하 앞에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 “줘.” ​ 무표정한 얼굴, 냉랭한 어조. 그러나 윤채하는 유하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 무전기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 -뭐야? 채하? 나 괜찮아! 방금 상대 사이드 제압했고 지금부터 왼쪽 사이드 쭉 전진할게. ​ 둘도 없는 호재였다. 윤채하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역시 정해인이었다. 절대 질 리가 없었다. ​ “우리 코너만 꺾으면 바로 상대 팀이랑 조우야. 끊을게.” ​ -어 그래? 알겠…. ​ 뚝. ​ 윤채하는 통신을 제멋대로 끊으며, 유하나의 손에 대충 쥐여줬다. 유하나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며 윤채하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 “갈까요? 리더.” ​ 유하나는 무전기를 받아들였다. ​ “하.” ​ 그리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 ​ ​ *** ​ ​ ​ -쾅!!! -쾅!!! ​ 연속적인 폭발음이 귓가를 강타한다. 본대에서는 이미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 전형적인 6인 대 6인의 구도. ​ 통상적으로 공대에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다면, 이들을 보호하면서 화력을 집중시키는 마법사를 위주로 한 전술을 펼치게 된다. ​ 마법사가 퍼붓는 공격의 파괴력과 효율성은 궤를 달리했으니까. ​ 가온과 칼로스의 인원을 일부러 섞어 놓은 것도, 이런 협력과 전술적 판단력을 기르기 위한 가온의 의도였다. ​ 몇몇 인원들은 마법사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고, 나머지 인원들은 각자의 상대와 교전을 펼치며 전선을 유지했다. ​ 그러나 윤채하와 유하나라는 비대칭 전력이 있음에도, 전장은 생각보다 팽팽했다. ​ 그 이유는 마법의 특성에 있었다. ​ 마법은, 상성을 많이 탄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상성에서 우위를 점한 쪽이 무조건 유리한 구조다. ​ “힘들긴 하겠네.” ​ 멀리서 윤채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모습이 보였다. ​ 윤채하가 가장 능숙하게 다루는 속성은 결국 화(火) 속성. 문제는 상대 팀의 마법사 두 명이 모두 수(水) 속성을 다룬다는 점이었다. ​ 조유리 또한 빙(氷) 속성의 마법이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 물론 윤채하의 실력이라면 다른 속성을 전개해 어렵지 않게 적을 제압할 수도 있었겠으나…. 지금의 그녀는 그런 선택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치이이이익! ​ 윤채하가 전개한 붉은 마법진에서 맹렬히 솟구친 불길이 상대의 푸른 물줄기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치열한 마력 충돌로 인해, 허공에는 뜨거운 증기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땀이 흘러내리는 윤채하의 이마 위로 물방울이 튀었다. ​ 벌써 4번째, 윤채하 특유의 고집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불 속성으로 저 끈질긴 물의 벽을 관통하겠다는 집요한 고집이. ​ “윤채하. 이대로는 어려워.” ​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상대가 한 명이었다면 그나마 순수한 실력 차로 뚫어냈겠지만, 지금은 둘이다. 두 명이 하나의 속성의 동시에 전개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 화염구로는, 어렵다. ​ -구어어어어…. ​ 나는 본대의 뒤쪽, 사이드에서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본대의 상황도 계속 눈에 담고 싶었고, 무엇보다 얘네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본대가 어지러워지기 십상이었으니까. ​ 어 그래, 저것처럼. ​ 방금 막 상대의 본대 후방에 골렘이 도달했다. ​ 전위의 주의가 골렘 쪽으로 순간적으로 쏠린 찰나. ​ “ㅡㅡㅡ!” ​ 윤채하가 짧은 영창과 함께 강력한 화염구를 발사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불길이 상대 전사에게 정확히 명중했다. ​ “크윽!” ​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상대의 형체가 흐릿해진다. ​ 차츰 사라지는 형상. 탈락이었다. ​ “크으….” ​ 하지만 곧이어, 전위에서 버티고 있던 김대현 또한 상대 학생에게 창격을 허용했다. 상대는 순위권의 가온 학생이었다. ​ 이러면 다시 5 대 5의 팽팽한 상황. ​ 그러나 악재는 또다시 찾아왔다. ​ 오른편 사이드에서 기척을 감추고 있던 누군가가 본대를 향해 빠르게 뛰쳐나왔다. ​ ‘주한강.’ ​ 반대편 사이드의 승자는 상대 팀이었다. 그는 본대의 후방을 지키는 대신, 상대 본대를 공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 나는 즉시 몸을 한계까지 꺾었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마나가 날카롭게 창끝에 응축됐다. ​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창을 투척했다. ​ -쐐애애애액! ​ 직선으로 날카롭게 뻗은 투창이 주한강의 몸을 정확히 꿰뚫었다. ​ “컥!” ​ 작은 신음과 함께 그의 형체가 흐릿해지며 서서히 사라졌다. ​ 윤채하가 고개를 홱 돌려 투창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가, 천천히 짙은 진홍색으로 반짝였다. ​ 나는 무전기를 입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 “배워서 어디다 쓸래.” ​ 그녀가 이 말을 듣고 알아들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윤채하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영창을 잠시 중단한 채,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러기를 몇 초. ​ 이내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뻗었다. ​ 그녀의 진홍빛 눈동자가 미친 듯이 불타올랐다. ​ 아까보다 한층 길어진 영창 소리와 함께, 그녀의 머리 위 허공에 거대한 붉은 마법진들이 겹겹이 형성됐다. ​ “ㅡㅡㅡㅡㅡㅡㅡ!!” ​ ‘똑같은 건 안 돼.’ ​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그때, 마법진들이 동시에 회전하며 크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마침내 마법이 발동된다. ​ -화르르륵. ​ 마법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고작 화염구가 아니었다. ​ 그 중심에서 나타난 것은 무수히 많은 창(槍). ​ 화염으로 이루어진 수십 자루의 창들이었다. ​ "뭐야, 저거!?" ​ 상대 마법사들이 당황하며 급히 물의 장막을 펼쳤다. ​ 하늘이 불타는 창으로 빽빽하게 메워졌다. ​ 이 장면과 구도, 어디서 본 적이 있다. ​ ‘카테나치오.’ ​ 윤채하는 내가 그녀의 앞에서 펼쳤던 그 기술을 완벽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구현해냈다. ​ “보여준 보람이 있네.” ​ 나는 미소를 지었다. ​ -쐐애애액! -쐐애애애액! -쐐애액! ​ 붉게 타오르는 창들이 하늘에서 일제히 쏟아졌다. 화염의 폭우가 수(水)의 벽을 거세게 두들기며,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방어막을 찢어버렸다. ​ -콰과과광! ​ 종잇장을 찢듯이 파고든 화염창들이 도달하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상대의 본대가 불길 속에 완전히 휩싸였다. ​ 거대한 먼지구름과 연기가 걷힌 후에는 상대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후방을 습격하던 골렘마저 재로 돌아갔다. ​ 단 한 순간에 전황을 뒤집어버린 게임 체인저의 면모. 역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 -하아… 하아…. ​ 윤채하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무전기 너머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 나는 무전기에 다시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 “잘했어.” ​ 기특한 모습이다. ​ 내 말이 들린 걸까. ​ 윤채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가 입술 끝에 천천히 피어올랐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기쁨이 가득 번져 나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