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새벽. 라벤더 향이 은은히 번진다. 방 안은 고요했고, 창밖의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시각. ​ 윤채하는 침대에 등을 댄 채,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이불,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 ​ 그녀는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진홍색 눈동자가 그 손끝을 천천히 따라갔다. ​ “…….” ​ 어제 저녁, 유하나의 검이 자신을 가른 순간이 떠올랐다. 그 꽃잎처럼 흩날리던 검격. ​ 정확하게 마법진의 축을 찔러 들어온 날카로운 일섬. ​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 훈련을 계속했지만. ​ 속은. ​ 속에서는. ​ 천불이 나고 있었다. 용암이 끓는 듯한 감각. ​ 그리고, 그 끓어오르는 중심에는 이상할 만큼, 든든한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다. 심장의 깊은 곳. 정해인이 넘겨준 양기가, 은은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 뜨겁고 묵직한 감각. 아직 제대로 다루는 법도 모르고, 다만 느낄 뿐이었지만. 그 존재감만은 분명했다. ​ 오히려 그 감각이 그녀를 더 자극한다. ​ ‘졌어.’ ​ 단순히 진 게 아니다. 무참히, 말도 안 되는 격차로. ​ 그녀는 손을 이마 위에 올리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새벽 공기조차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지금 그녀 안에서 부글대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말린다. ​ “…다음에는 안 져.” ​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말은, 낮고 또렷하다. ​ 방과 밤은 여전히 고요하다. ​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여전히 흩날리는 꽃잎들로 가득했다. ​ 그 밤. 그녀는 수없이 졌고…. ​ 또 수없이, 다시 일어섰다. ​ ​ ​ ​ ​ ​ *** ​ ​ ​ ​ ​ ​ -띠링. ​ 방에서 나갈 채비를 하던 찰나, 워치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화면을 켜자 협회에서 도착한 문자 하나. ​ [정해인 영웅님. 포상안이 준비되었습니다. 편하신 일정에 맞춰 협회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 포상안이 준비됐으니, 시간이 날 때 언제든 방문해 달라는 내용. ​ “…뭘 준비했으려나.” ​ 문자를 읽은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를 포함해 다른 애들이 사용할 수만 있다면 받을 생각이긴 하다. ​ 사실 대상이 나였어서 그렇지, 불가람의 공방의 출입을 허락한 것도 협회에서는 큰 결정이었을 테니까. ​ 어차피 한 번쯤은 들러야 했다. 악신의 보옥 관련해서 윤채하와 함께 협회를 방문할 필요도 있었고. ​ 이번 주말에… 방문하면 딱 되지 싶은데. ​ 토요일. 딱히 일정도 없고, 여러모로 괜찮을 것 같다. ​ 나는 워치의 메시지 입력창을 열어 짧게 입력했다. ​ [토요일 오전쯤 방문하겠습니다.] ​ 전송 버튼을 누르고 화면을 끈다. ​ “아 맞다.” ​ 문득, 넣어둔 영광의 주식이 떠올랐다. 요즘 아주 상승가도를 달리는 것 같던데. ​ 나는 오랜만에 잔고창을 열어 확인해 봤다. ​ “…와.” ​ 입에서 짧은 감탄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훨씬, 아니 상상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 당장 영웅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은 정도인 그런 수준.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 슬슬 일부는 정리해볼 때다. 일부만 꺼내도 꽤 쓸만한 액수였다. ​ 나는 천천히 화면을 닫았다. 나오는 자금으로 옥션을 한번 슬쩍 뒤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 “오케이.” ​ 할 일은 많다. 조급해질 필요는 없다. 차근차근 정리해보면 될 일이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다. ​ 등교할 시간이었다. ​ ​ ​ *** ​ ​ ​ “아 뭔… 진짜.” ​ 가온 아카데미는 체력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영웅의 체력은 국력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불시에 체력장을 실시한다는 전통이 있다. ​ 학년별로 전부 다. ​ 이건 원작에서 체력 훈련을 게을리치 않게 하려 만든 장치이기도 했다. ​ 분명 입원해 있던 동안 이번 달 체력장은 이미 지나간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좋아하고 있었는데…. ​ 아니었다. ​ 오늘이 딱, 그날이었다. ​ 땀은 줄줄 흐르고, 호흡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 체력장을 하는 날은 수업이 없다. 수업 뿐만이 아니다, 그냥 모든 일정을 가온에서 취소시킨다. ​ 즉 오늘 예정된 멘토 멘티 일정은 사라졌다. ​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금일 체력장의 순위가 떠오른다. ​ [정해인 3등] ​ 1학년 전체 3등이다. ​ 체력을 중요시하는 것은 가온뿐만 아니다. 영감도 그 방면에서는 철저했기에, 나 역시 체력 훈련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 게다가 아침마다 유하나와 함께 뛰고 있었으니, 감각을 완전히 잃을 리도 없었고. ​ 속속들이 학생들이 트랙을 빠져나와 스탠드로 올라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거나, 가온을 원망하며 투덜댄다. ​ 강아린과 유하나는 각각 1등과 2등. ​ 어째서인지 둘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아마 먼저 샤워하러 가지 않았을까. 땀이 많이 났을 테니까. 완주 후 그대로 기숙사로 향한 듯했다. ​ 그리고 방금 막 도착한 시온이, 헉헉거리며 스탠드에 올라왔다. 나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건넸다. ​ “고생했어.” ​ “응… 근데 가까이 오지 마, 나 땀 때문에….” ​ 시온은 인상을 쓰고는 살짝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대로 기숙사 방향으로 사라졌다. ​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나저나 한 얼굴이 안 보이는데…. ​ “천여울 어디 갔어.” ​ 뻔하다. ​ 아무래도 눈치 빠르게 도망간 듯하다. 괘씸해서 안 되겠다. 만나면 딱밤으로 처벌해야…. ​ 그때, 다시 한번 트랙 저편에서, 누군가 느릿하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 비틀거리는 걸음. 축 처진 어깨. 땀에 흠뻑 젖은 체육복. ​ 윤채하였다. ​ 머리카락은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체육복은 땀에 완전히 젖어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걸었다. ​ 나는 순간 놀랐다. ​ 칼로스 측 인원 중 주서준 외에는 전원 리타이어. 그 주서준조차도 10위 밖이다. ​ 이건 어쩔 수 없다. 당연한 이치였다. ​ 마법사는 체력이 약했고, 칼로스는 마법사 특화 학교였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기권하지 않았다. 느리지만 당당히 완주하고, 스탠드를 걸어 올라오고 있다. ​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눈빛이 보인다. 눈이 마주쳤다. 숨은 여전히 거칠게 몰아쉬고 입술은 바짝 말랐지만, 그녀의 눈동자엔 맹렬한 기세가 살아 있다. ​ 이글거리는 눈빛이 느껴진다. ​ 아무래도 어제의 패배가 그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성격상 잠도 제대로 못 잤을게 뻔했다. ​ 딱 좋은 타이밍이다. ​ 주말에 협회에 데려갈 좋은 구실이 생겼다. ​ “진짜 고생했어.” ​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윤채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 그리곤 그대로 스탠드에 몸을 던지듯 기댔다. 몸에서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어, 이마 아래로 흐르던 땀방울들이 뺨을 타고 흘렀다. ​ 나는 피식 웃으며 그 옆에 앉았다. ​ “좀 쉬어.” ​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게 될 테니까. ​ 내가 뭘 하지 않아도 그녀가 알아서, 더 미친 듯이 파고들 것이다. ​ 체력장으로 인해 수업과 교류전 팀 미팅은 전부 취소됐다. 사실상 오늘 하루는 휴식. 더 이상 특별한 일정은 없다. ​ 그때, 말없이 땀을 식히던 윤채하가 갑자기 눈을 살짝 떴다. ​ “오늘… 저녁에… 멘토링 좀… 해줄 수….” ​ 그리고 그녀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다시 눈을 감았다. ​ “허.” ​ 아무래도, 윤채하의 심지는 제대로 타오른 듯했다. ​ ​ ​ ​ ​ ​ *** ​ ​ ​ ​ ​ ​ 늦은 저녁. 훈련장은 조용했다. ​ 가온의 기습 체력장으로 학생들이 전부 휴식에 들어갔기 때문. ​ 천여울은 그 빈 훈련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 끝, 개인 룸에서는 연속적인 폭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익숙한 감각이 기억을 건드린다. 그녀는 머릿속에 있던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똑같은 훈련장, 같은 스승, 그 대상만 다를 뿐이었다. ​ “… 성시우.” ​ 정해인이 남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이래서는… 아무도 이길 수 없어.” ​ 단호한 목소리가 훈련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절박했다. ​ 사도로 인해, 뱅퀴셔를 잃었고, 그들의 강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 따라서 희망이라 여긴 성시우에게, 더욱 매몰차게 훈련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의 경고에 성시우는 코웃음을 쳤다. ​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 그는 고개를 들고 정해인을 바라봤다. ​ “나는, 충분히 강하다.” ​ 실제로 그는 얼마 전 요한과의 대련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성시우는 자신이 성장했다고 믿고 있었고, 그 믿음에 취해 있었다. ​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정해인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조급함을, 성시우는 알 리 없었다. ​ “뭐 이것저것 알려주는 건 고맙지만… 선은 넘지 말도록.” ​ 그는 검을 들어 정해인을 가리켰다. ​ “솔직히 말해, 너도 곧 이길 것 같으니까.” ​ 정해인은 죽은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늘 그랬듯, 자신의 과오부터 되짚고 있었을 것이다. ​ ‘내가 너무 조급했나.’ ‘강요였나.’ ‘내 방식이 틀렸나.’ ​ 그리고 언젠가처럼, 또 스스로를 탓했겠지. ​ “…배은망덕한 새끼.” ​ 천여울의 이가 갈린다. 꽉 쥔 주먹에서 피가 새어 나올 지경이었다. ​ 그는 늘 자신을 희생했다. ​ 따라서. 지금, 훈련장 너머에서 반복되는 이 장면이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 혹여나, 조금이라도 그놈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 가차 없이 쳐낼 것이다. 그 놈처럼. 해인이는 너무 착하고, 또 정이 많았으니까. 이건 그녀, 천여울의 몫이었다. ​ 그녀는 조용히, 훈련장의 벽 너머를 투시했다. 사도와의 결전 이후, 다시금 습득한 기술이었다. ​ 그리고 보인다. 산산조각이 난 벽면들, 훈련의 흔적이 깊게 팬 바닥, 훈련장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녀. ​ 윤채하였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고 있었다. ​ 정해인은 워치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 -오늘 고생 많았어. 체력장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이만 쉬자. ​ 단호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어조. 늘 그렇듯, 상대를 존중하는 그의 방식이었다. ​ 윤채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잠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 -너만 괜찮으면… 나는 더 하고 싶어…. ​ 천여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 윤채하의 눈동자는 아까부터 진홍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 그녀는 급히 정해인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턱을 매만졌다. ​ ‘아….’ ​ 천여울은 알고 있었다. 그 행동은, 그가 만족스러울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 게다가. 윤채하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로,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기뻐한다.’ ​ 그가. 정해인이 기뻐하고 있었다. ​ “…흐응.” ​ 천여울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푸른빛으로 일렁이던 눈이 잦아들었다. 더 볼 필요는 없어보였다. ​ “뭐….” ​ 시온의 말이 떠오른다. ​ ‘걔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 맞는 말이었다. 처음엔 의심했고,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다. ​ 그런데 방금 그 장면은, 분명 달랐다. 단편적으로만 봐도, 알 수 있다. ​ ‘인정할게.’ ​ 윤채하는 성시우와는 달랐다. ​ 천여울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훈련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