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에 앞서 승자와 패자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승자는 유하나.’ ​ 단순한 감이 아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화접검을 직접 그녀에게 전수했으며, 유하나는 동백검이라는 고유의 무구까지 손에 넣었다. ​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사도와의 결전을 통해 죽음과 맞닿았고. 그 경험을 폐관 수련에서 녹여내 깨달음까지 얻은 상태. ​ 둘 모두에게 주어진 포텐셜은 엄청나지만, 현시점의 완성도의 차이는 크다. ​ 그리고,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장면도 예상을 크게 웃돌지 않았다. ​ 윤채하의 전투 스타일은 명확하다. ​ 정면 돌파. ​ 그 근간에 있는 것은 그녀의 마력 연산 능력. 수많은 마법진을 동시에 운용하며, 화력을 겹쳐 적을 짓누른다. ​ “Alo Sum!” ​ 짧은 영창이 입에서 터지자, 그녀의 몸 주위로 주황빛 마법진들이 동심원 형태로 겹겹이 펼쳐졌다. ​ 정확히는 7개. 각도와 위치가 단 하나도 어긋나지 않은, 정교한 배열이다. ​ 일개 학생이라 보기엔 어려울 정도의 동시다발적인 마법 전개. ​ 그녀의 권능, 아 프리오리(A Priori)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계산보다 빠른 직관, 감각적으로 마법진을 완성해내는 능력. ​ 그리고, 그 마법진에서 화염구가 폭풍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 -콰앙! -콰과과광! ​ 불덩이들이 연속적으로 터져나가며 훈련장의 공기를 뒤흔든다. ​ ‘좋아.’ ​ 그 과경을 지켜보는 나조차, 순간 압도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하나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 그녀의 손끝이 고요하게 움직인다. ​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발도. 그녀의 발끝이 미세하게 틀어진다. 허공을 딛는 듯한 가벼운 걸음. ​ 몸이 떠오르며 회전하자, 허리까지 내려온 하늘빛 머리카락이 곡선을 그리며 공중에 흩날렸다. 그 곡선과 함께, 그녀의 칼 끝도 선을 긋는다. ​ “제일식, 춘뢰화(春雷花).” ​ 내가 그녀에게 처음 가르쳤던, 화접검의 가장 기본적인 구결. ​ 순간, 그녀의 검 끝에서 붉은 꽃잎이 흩날리듯 터져나갔다. 허공을 가르는 그 움직임은 마치 나비의 비행. ​ 꽃잎의 우아한 궤적이 날아든다. ​ 꽃잎이 화염구에 닿은 순간, 마치 불씨 위에 물을 뿌린 듯, 화염구의 표면이 일그러졌다. 탄력을 잃은 불덩이는 그대로 제 궤도를 벗어나 허공에서 폭발하거나, 미끄러지듯 사라진다. ​ 그리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두 번째 걸음. ​ “제이식, 이화편우(梨花片雨).” ​ 허공에서 불덩이들을 갈가리 찢어놓은 꽃잎들이. 그대로 윤채하에게,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 마치, 비처럼. ​ “…….” ​ 윤채하의 눈이 조용히 커진다. ​ 이걸로 이미 승부는 났다. ​ 분명 윤채하의 실력은 예상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유하나의 실력은 그 이상을 훌쩍 넘어섰다. ​ 대련이니만큼, 빠르게 몇 합 안에 승부가 날 거라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압도적일 줄은 몰랐다. ​ 윤채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급하게 몇 개의 마법진을 더 소환했다. 주황빛으로 떠 있던 마법진들이, 점차 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 그녀의 눈동자도 그에 맞춰 붉게 타올랐다. 연산 능력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는 증거. ​ “…!” ​ 짧은 영창과 함께, 공중에 떠 있는 마법진이 주변의 열기와 마력을 고속으로 흡수하기 시작한다.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응축. ​ 그때였다. ​ “… 뭐야.” ​ 내 몸 안의 기운이, 그녀 쪽으로 조용히 흔들렸다. 내부에서 과하게 넘쳐흐르던 양기가 마법진과 감응하고 있었다. ​ 자연스럽게 내 몸에서 빠져나와, 그녀 쪽으로 기운다. ​ 이질감은 없었다. 억지로 끌어당긴 것도 아니다. 마치 자석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내 양기가 그녀의 마법진에 흘러들었다. 내 내부의 양이 줄어드는 감각은 없다. 오히려 불필요하게 넘쳐났던 부분만, 조용히 걷어내지는 느낌. ​ 공명과 증폭. 윤채하의 마법진은 점차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고, 형체가 또렷해지며 거대해졌다. ​ 공중에서 유하나의 눈이 확장됐다. 그녀는 곧장 나를 봤고, 다음 순간, 시선을 윤채하로 돌린다. ​ 유하나 또한 이 현상을 감지했다. ​ 그녀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검 끝이 마법진의 축을 향해 내리꽂혔다. ​ -챙! ​ 날카로운 파열음이 훈련장을 울린다. ​ 윤채하가 막 완성하려던 진홍의 마법진이 산산조각났다. 그와 동시에, 흘러나오던 열기와 양기의 흐름도 깨끗이 멈췄다. ​ “윽….” ​ 윤채하의 무릎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다. ​ “후….” ​ 유하나 역시 짧은 호흡을 내뱉는다. ​ 변수는 있었으나, 결국 결과는 예상 한대로다. ​ 그러나 예상외의 수확도 있었다. ​ “고생했어 둘 다.” ​ “응.” “….” ​ 나는 조심스럽게 윤채하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완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 “하… 하아….” ​ “좀만 참아.” ​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윤채하. 나는 그녀의 등에 손을 댔다. 그리고 조용히, 내 안의 기운과 그녀 안의 기운을 맞물리게 했다. 내부의 양기가 서서히 그녀의 흐름에 녹아든다. ​ 내 기운은 단단하고, 그녀의 기운은 뜨겁고 부드럽다. ​ ‘이건….’ ​ 나눠줄 만하다. ​ 영약의 기운 중 일부를 그녀에게 완전히 넘기기 시작했다. ​ 내게는 지나치게 넘치는 기운이었고, 어차피 다 걷어낼 생각이었다. ​ 우연히 쓸 곳이 생긴 셈이다. ​ 내 손바닥 아래서, 윤채하의 숨이 점차 고르게 변한다. ​ “숨 크게 들이쉬어.” ​ “후우….” ​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그녀는 말없이 따라준다. 순응하는 숨결에 차츰 그녀의 기운도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 윤채하의 들숨과 날숨이 점점 고르게 정돈되어간다. 그 변화에 맞춰 내 안의 기운 또한 차분하게 정리됐다. ​ ‘뭐 더 할 필요도 없겠는데?’ ​ 추가적인 조율도 필요 없을 정도다. ​ 그렇게, 나는 윤채하에게 영약의 기운을 일부 넘기면서도 내 내부의 기운까지 말끔히 정돈해냈다. ​ “윤채하.” ​ “…어?” ​ 느릿하게 고개를 든 그녀. 나는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펴고, 천천히 내밀었다. 아마 그녀도 자신의 안에 새롭게 퍼진 기운을 눈치챘을 것이다. ​ 땀이 가득 젖은 채 나를 바라보는 윤채하. ​ -착. ​ 윤채하는 멍하니 내 손을 바라보다가, 조금 망설이듯 손바닥을 들어 마주쳤다. ​ “나이스.” ​ 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윤채하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호흡을 정돈하고 있던 유하나에게 향했다. ​ “완벽했어.” ​ 나는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 “화접검에 대한 이해가… 이제 내가 평가할 수준이 아닌 것 같네.” ​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 검술은 유하나를 위해서 만들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어느 시점부터는 그녀의 숙련도가 나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었다. ​ 유하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으응, 아직 아니야. 네 도움이 더 필요해.” ​ 겸손하기는. 그녀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에, 괜히 피식 웃음이 났다. ​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 훈련장 내부의 기운은 여전히 뜨겁다. ​ 윤채하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 이제부터가 진짜다. ​ “시작할까.” ​ 나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며 웃었다. ​ 훈련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밤은, 아직 길어 보였다. ​ ​ ​ ​ ​ ​ ​ ​ *** ​ ​ ​ ​ ​ ​ 늦은 저녁, 불이 꺼진 기숙사의 방. ​ 침대. ​ -꼼지락. ​ 한 인영이 이불 속에서 몸을 뭉그적거리고 있었다. 아늑한 감촉, 잔잔한 온기, 흘러넘치는 향.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 -띠링. ​ 그때, 베개 옆에 두었던 워치에서 알림이 울렸다. ​ “아이….” ​ 한창 좋았는데. ​ 이불에서 팔만 쏙 내민 시온이 워치를 끌어당겼다. ​ 여긴 정해인의 기숙사 방. 시온이 세웠던 모든 계획은 수포가 되었고, 그 당사자는 지금 유하나와 훈련장에서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다고 했다. ​ 처음엔 기겁하고 나가려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 윤채하까지도 함께 있다고 하더라. 아마 죽음의 훈련이 이어지고 있을 것. ​ 시온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워치를 바라봤다. ​ [1000_y]: 말걸지마 나 우울하니까. ​ 이건 아까 낮에 왔던 메시지고. ​ [OnE]: 해인이 기운 다 억눌렀어 ​ 훈련 중인 유하나에게 온 메시지였다. ​ [1000_y]: 진짜? 벌써? [OnE]: 좀 애매하긴 한데 그런 듯. [1000_y]: 아니 어떻게? ​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는 짜증 나는 내용이었다. ​ [OnE]: 누가 홀랑 먹어치웠네 ​ “아….” ​ 시온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윤채하의 마법 성질은 대충 알고 있다.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감으로 그려진다. ​ 도둑고양이가 생선을 먹어 치운 모양. ​ 욕설이 난무하는 채팅창. ​ 시온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 유하나는 훈련 중에는 워치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 [시온]: 훈련은 끝? [OnE]: 응 방금 헤어졌어 [시온]: ㅇㅋ ​ “으….” ​ 그녀는 기지개를 쫙 켰다. ​ 그래도 잘 쉬었다. 이제 방 주인이 오기 전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 ​ [1000_y]: 그건 왜 물어봐 ​ 역시 감이 좋네. ​ 시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의 이불을 정성스럽게 정리했다. 준비해둔 탈취제를 꺼내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콧노래가 방 안에 은은히 퍼진다. 시온은 창문 쪽으로 가, 화분에 물까지 챙겨줬다. ​ 모든 준비가 끝났다. ​ “다녀올게요~” ​ 그 말과 함께 기숙사 문을 나선 시온은, 외부 복도를 따라 난간의 끝까지 경쾌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아래로 뛰어내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