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반집 이겼네.” ​ 조용히 돌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자, 윤채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밥을 먹고 남은 시간을 활용해, 우리는 보드게임 동아리 방으로 향했다. ​ 그리고 지금은 바둑판 앞. 잠깐 적막이 이어졌다. ​ “… 아, 그러네.” ​ 뚫어지게 바둑판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표정이 좀 억울해 보인다. 지금도 머릿속으로 복기 중일 것이다. ​ 윤채하는 오늘, 고등어에 이어 연어, 장어, 심지어 꽁치까지. 교내식당에 존재하는 모든 생선을 섭렵했다. ​ 물론 가시를 바르는 방법은 몰랐기에 전부 내가 다 발라줬다. ​ 입에 들어갈 때마다 감탄하며, 연달아 젓가락을 들이밀던 모습이 기억난다. ​ 처음엔, 그녀 성격상 ‘가르쳐줘.’ 같은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당연히 이것마저 배우려고 들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윤채하는 어느 순간부터 젓가락을 내려두고 가만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 ‘내가 바르는 방법을 알려줄….’ ​ ‘다음에, 일단 지금은 먹을게.’ ​ 마치 당연하다는 듯, 내가 손질한 생선 살을 조용히 받아먹고. 막상 받아먹고는 자기도 조금 창피하긴 한 건지 살짝 눈을 피하며 물 한 모금. ​ 내 전인(全人)이라는 특성은 전장에서뿐 아니라 이런 잡스러운 일에서도 빛을 발한다. 젓가락 하나로 뼈와 살을 완벽히 분리해내는 손놀림.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거의 예술 수준인데…. ​ 그녀는 아기 새처럼 그걸 받아먹기만 했다. 몇 번 눈치를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젓가락을 내려놨다. ​ 그냥 나한테 맡기는 게 합리적이라고 그녀의 눈으로 나름대로 ‘분석’한것 아닐까 싶다. ​ “슬슬 갈까.” ​ 나는 워치를 내려다보며 시각을 확인했다. 바둑을 두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5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응.” ​ 윤채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조만간 다시 하자. 바둑.” ​ “왜, 억울해?” ​ 나는 사뭇 장난스레 물었으나. ​ “그런 건 아니고. 슬슬 알 것 같아서.” ​ 정작 그녀는 진지하게 답했다.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실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 역시 윤채하는, 자극해야 성장하는 원석이다. ​ 나는 슬쩍 웃고, 그녀와 함께 복도를 걸어 나갔다. ​ 강당 입구에 도착했을 무렵, 이미 몇몇 학생들이 입장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담당 교관도 무대 한쪽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 ​ 나와 윤채하는 강당의 구석, 조용한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 오후 5시. 정각이 되자, 무대 한편에서 천천히 교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 교관이 단상에 오르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자연스레 잦아든다. 강당 안은 이미 꽉 차 있었다. 교류의 장 학생들 30명, 그들의 멘토들까지 포함해 총 60명. 자리는 어느새 만석이었다. 교관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 “자, 다 오신 것 같으니. 집중해주세요.” ​ 조용히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오늘은 교류전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 그리고 단체전의 팀 편성 방식에 대해 안내해 드릴 겁니다.” ​ 교류전의 첫 실질적 준비가 시작된 순간. ​ “우선, 오전에 전달받은 대로 교류전은 개인전과 단체전.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 그는 시선을 천천히 옮기며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바로 단체전의 팀 구성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 팀 편성. 예상대로 교류전과 관련된 내용의 호출이었다. ​ “현재, 교류의 장에 참여하고 있는 학생은 총 30명.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멘토도 30명. 총 60명이죠.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이미, 같은 조 입니다.” ​ 전에 말했던 대로 멘토와 멘티는 이미 같은 팀이다. ​ “이제 그 멘토, 멘티 세트를 둘씩 묶어, 하나의 작은 팀을 구성합니다. 즉, 두 멘토와 두 멘티. 총 4명이 먼저 하나의 교류팀이 되는 셈이죠.” ​ 잠시 스크린이 바뀌며, 시각화된 팀 편성 구조가 나타난다. 학생들의 눈이 조금 더 집중된다. ​ “그리고 이 교류팀에 가온 소속 학생 4명이 추가로 배정됩니다. 그렇게 총 8인, 한 팀으로 편성됩니다.” ​ 즉, 정리하자면…. ​ 총 8명의 팀원. 멘티 둘, 멘토 둘, 그리고 가온의 학생 4명. ​ 그렇게 15개의 팀. 꽤 큰 규모다. ​ 이 세계의 설정상 8명부터는 ‘준 공대’ 취급이다. 던전을 공략하거나, 고위 마물을 토벌할 때 구성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 ​ 전술. 구성. 팀워크. 모든 것이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개인이 있어도 결과는 보장되지 않는다. ​ 가온과 칼로스가 합작하는 만큼, 그 과제도 상당히 어려울 것이고. ​ 그러나 그때. ​ “자, 여러분. 그러나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 교관의 목소리가 갑자기 한 톤 부드러워진다. ​ “교류의 장은, 결국 축제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워가는 과정 그 자체가 목적이니까요.” ​ 웃기고 있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따라서, 구성 인원만큼은 여러분들이 이곳 가온으로 오기 전, 친하게 지냈던 학우분과 자유롭게 팀을 이룰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가온의 추가 인원 넷은 형평성을 고려해 랭킹을 기준으로 배정합니다.” ​ 즉, 두 팀을 합치는 부분까지만 자율적이고 강제 편성은 아니란 소리다. 두 세트를 결합해 4인. 그리고 여기에 가온 출신 4명이 더해져서 최종 8인 편성이 완성된다. ​ “자, 그러면 여러분들. 지금 바로 조를 짜주세요!” ​ 웅성웅성. 교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칼로스 쪽 학생들이 벌떼처럼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셋씩 넷씩. 이미 구성이 완료된 듯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팀을 짜느라 정신없었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윤채하를 바라봤다. 그녀는 내 시선을 감지하듯 슬쩍 몸을 틀더니, 반쯤 날 노려보며 말했다. ​ “왜, 왜, 봐?” ​ 입을 삐쭉 내밀며 묻는다. 나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 칼로스의 학생들이 모여서 팀을 이루는 동안에도. 윤채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딱히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 왜냐. ​ 윤채하는 친구가 없다. ​ 그나마 친구라도 할 수도 있을 만한 사람이라면…. ​ 멀찍이 떨어진 자리. 훤칠한 외모의 남학생 하나가 칼로스 여학생들의 중심에 서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는 주서준이었다. ​ ‘쟤긴 한데….’ ​ 문제는 주서준의 멘토다. 그의 멘토는… 요한이다. ​ 요한의 교단과 주서준의 집안은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왔고. 생각 이상으로 꽤 돈독하게 얽혀 있다. ​ 따라서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다. ​ 그리고, 그 요한과 내 눈이 마주쳤다. ​ 딱 1초. 그 짧은 순간조차 못 견디듯, 요한은 고개를 돌려버린다. ​ ‘쯧.’ ​ 이래서는 힘들다. 주서준과 같은 팀을 이루기는 어렵겠다. ​ 윤채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앞의 책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평소답지 않게 풀이 죽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 사실, 누구랑 팀이 되는지는 상관이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인원들을 물색했다. ​ 그때, 누군가가 교관이 있는 단상으로 향했다. 칼로스의 학생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 ‘혼자네?’ ​ 그 여학생은 교관에게 무언가를 조심스레 말하더니, 교관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단상 위 서류를 뒤적였다. ​ 이윽고 마이크를 집어 든 교관이 천천히 말했다. ​ “혹시, 유하나 학생과 아는 사이 있으신가요?” ​ 유하나? ​ 지금 폐관 수련 중인데…. ​ 나는 무심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 교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당 출입문이 스르륵 열렸다. ​ -끼익. ​ 그 누구도 일부러 문을 보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도 모든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쏠렸다. 조용히 들어선 한 여성의 실루엣. ​ 허리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린 하늘빛 머리칼, 습기 어린 수련복 아래로 땀이 배어 있다. 마치 막 수련을 마치고 달려온 듯한 모습. ​ 유하나였다. ​ “조금 늦었습니다 교관님. 조유리 학생 멘토, 유하나입니다.” ​ 짧고 단정한 인사. 그녀는 그 한마디만 남긴 채,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무대 위로 쏠리던 시선이, 어느새 그녀를 따라 움직인다. ​ 나는 놀랐다. ​ 단순히 그녀가 교류의 장의 멘토였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었다. 멘토, 멘티 활동 당시 대부분 외부로 나갔기에, 그녀가 멘토인지 미처 몰랐던 건 그럴 수 있었다. ​ 그러나 진짜 놀란 부분은. ​ “허.” ​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세(氣勢)였다. ​ 예전의 유하나와는 전혀 다른 감각. 움직임 하나, 숨결 하나에도 깊게 깃든 무게감이 있다. ​ ‘대체 안에서 뭘 한 거야?’ ​ 의문점이 생길 정도로, 그녀의 성장은 엄청났다. 옆의 윤채하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붉게 타오른다, 윤채하에게 있어, 그것은 곧 흥미의 증표였다. ​ 나는 시선을 유하나에게 고정한 채 조용히 물었다. ​ “어때?” ​ 윤채하는 말없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필요 없었다. ​ 우리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강당 앞으로 향했다. ​ 유하나는 이미 조유리에게 다가가 있었다. 짧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멘티는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부축하듯 일으켜 세웠다. ​ 그 순간, 유하나의 시선이 나를 향해 고정됐다. ​ 한순간이었지만, 그 짧은 눈맞춤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얼마나 큰 성장을 이뤄냈는지. ​ 이 정도면…. ​ ‘됐다.’ ​ 나는 대강 가늠하려다가 이내 그만뒀다. 어차피, 더 성장할 그녀였으니까. ​ “왔어?” ​ 내가 조용히 묻자, 유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 “응.” ​ “대체 뭘 한 거야?” ​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 “그건… 차차 알려줄게.” ​ 살짝 낮아진 음성. 속삭이듯 스며드는 목소리. 그리고 덧붙인다. ​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나만 그래?” ​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 “채하… 맞지?” ​ 조심스럽고 다소 수줍은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유하나의 멘티로 보이는 여학생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다, 용기를 낸 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 “나… 너 진짜 팬인데. 혹시… 나랑 같은 팀 하려고 온 거야?” ​ 예상치 못한 관심에 윤채하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러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듬거린다. ​ “어… 어? 어… 맞는데….” ​ 적잖이 당황한 듯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뭐랄까. 고양이 카페에서 낯가리는 고양이에게 먼저 다가가 주는 다른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나는 유하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 역시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잘 부탁해.” ​ “내가 더.” ​ 새로운 팀의 탄생이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