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여울의 기분은 나날이 고공행진하고 있었다. ​ 가장 염려하고 긴장했던 사도(使徒)전이 무사히 끝났다. 병상에 누워 있던 정해인 또한 씩씩하게 일어났다. 그녀가 알고 있는, 그녀가 기대하던 그의 모습 그대로. ​ 이제 걱정했던 일들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당분간은 평온할 터. ​ 그가 어떤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있을 때는, 절대 그를 귀찮게 하거나 앵기지 않는다. 이건 그녀 스스로 정한 규칙. 그러나 최근 너무 연속적으로 바빴기에 슬슬 참기도 지쳐갈 무렵이었다. ​ “히.” ​ 그녀는 마침내 책임을 내려놓고, 잠시나마 즐길 차례가 왔음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 정해인이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여인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다양한 영약을 가져왔다. 재생과 회복에 용이하며,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귀한 것들. ​ 그러나 문제는. ​ ‘이것 봐라….’ ​ 하나같이, 또 다른 곳에도 용이하게 쓰이는 영약들이라는 점이다. ​ 천여울은 단숨에 깨달았다. 성법과 치료에 능한 그녀에게, 이 조합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 그 와중에, 상황이 절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마침 유하나는 폐관 수련에 들어갔고. ​ 강아린은 같은 반이긴 하나, 신념을 운운하며 적어도 가온에서는 정해인과 가급적 접촉을 피하려고 한다. 그가 기업 오너와의 구설에 휘말릴 수도 있다나 뭐라나. ​ 하시온은 애초에 다른 반이니, 이 상황을 방해할 일도 없다. ​ 무엇보다, 이 영약들이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전부 명확히 모르는 눈치였다. ​ 그렇다면? ​ 이 상황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뿐. ​ ‘기회.’ ​ 아마 깨어나고 나서, 몸 내부의 넘쳐나는 기운을 눈치챈다면, 이미 늦었다. ​ 물론 그의 탁월한 능력이라면 금방 기운을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하루는 걸릴 것이다. ​ 천여울,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 ​ 잘 익어가는 과실을 가장 먼저, 가장 맛있게 따 먹을 기회가. ​ “성녀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 그녀의 표정이 보기 좋았는지, 교단에서 근무하는 한 사제가 환한 미소로 물었다. 천여울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가려고요.” ​ “오! 정말요?! 성녀님 저도요! 저도 사주세요!” ​ 순진한 반응. 그저 흘려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 “절대 안 돼요.” ​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학교로 향하는 길이 오늘따라 더없이 상쾌하다. ​ 그렇게 그의 지정석, 창가 구석 자리 옆에서 앉아 조용히 대기하던 그때. ​ -스으윽. ​ 문이 열리고,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그가 문으로 들어온다. ​ ‘일루와잇!’ ​ 기대감이 가득 찬 그녀의 마음이 설렘으로 두근거릴 찰나…. ​ “…?” ​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정해인. 어디 병든 병아리색의 머리를 한 년에게 직행한다. ​ 천여울의 표정이 굳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푹, 꺼진다. 눈앞이 아찔해지기 시작했다. ​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절망했다. ​ 비상 상황이다. ​ 죽 쒀서 개 주게 생겼다. ​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차츰 강의실의 앞으로 돌아간다. 두 눈이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 강아린. ​ 언젠가부터 그녀 또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에 가까운 표정. 살짝 벌어진 입술. ​ ‘….’ ​ 천여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 다 알고 있었구나. ​ 그녀만 눈치챈 게 아니었다. 잘못 생각했다. 애초에 모를 리가 없었다. ​ 전부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뿐. ​ “쯧.” ​ 그녀는 작게 혀를 찼다. ​ ​ ​ ​ *** ​ ​ ​ ​ ​ 이거 대체 언제 끝나는…. ​ 수마의 위협에 정신을 붙들고 있기도 힘들어질 무렵. ​ “…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 반쯤 죽어가는 표정으로 강의를 이어가던 도한성 교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교실 곳곳에서 희미한 안도의 숨이 새어 나왔다. ​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 그의 결단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물론 머릿속에서만. ​ “아마 1학년 학생 여러분들은 오늘 오후 일정이 없겠지만….” ​ 그는 잠시 말을 끊고 교실을 한 번 훑었다. ​ “멘토 멘티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은 조금 다릅니다.” ​ 도한성 교관이 빙긋 웃으며 손짓했다. ​ “대상자들은 오후 5시까지 강당으로 모여주세요.” ​ 대충 짐작은 간다. ​ 교류전. 아마 교류전과 관련된 내용일 것이다. ​ 팀의 구성은 아직 명확히 발표되지 않았지만, 멘토와 멘티로 묶인 인원은 무조건 한 팀이다. 이건 이미 고정된 내용일 것이고. ​ 그리고 추가적인 팀의 인원 편성을 위해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지금 시간은 12시. 아직 여유가 좀 있다. ​ 애매한 시간이다. 집에 돌아가기엔 얼마 안 있어 바로 나와야 하고, 강당으로 바로 가기엔 턱도 없이 이르다. ​ 이런 시간에는 일단 밥부터 먹는 게 깔끔하다. ​ “…쿨.” ​ “?” ​ 옆자리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완벽한 낮잠 자세. ​ 그녀는 누구보다 편안한 낮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나는 그녀를 흔들흔들 깨웠다. ​ “일어나.” ​ “에.” ​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다시 감는다. ​ “일어나세요.” ​ “에….” ​ 다시 한번 부드럽게 흔들자, 그녀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반쯤 감긴 눈,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약간 풀린 입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 그때, 앞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 그러면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주도 힘내시길 바랍니다.” ​ 도한성 교관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학생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며 삼삼오오 몰려 나갔다. 그 와중에도 윤채하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 그 모습이 퍽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를 보며 가볍게 중얼거렸다. ​ “오늘 멘토 멘티나 할까?” ​ 내 말에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 “오늘?” ​ 이제야 제대로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아주 비몽사몽, 평소에는 힘도 없어 보이면서, 좋아하는 주제만 나오면 이렇게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 마치 평소에는 전력을 끊은 것처럼 축 늘어져 있다가도, 장난감 하나만 흔들면 바로 반응하는…. ​ 고양이 같달까. ​ “어, 일단 밥부터 먹자. 뭐 먹을래?” ​ 내 말에 윤채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아무거나.” ​ “라면?” ​ “그건 좀….” ​ “돈까스?” ​ “…그것도 좀.” ​ “….” ​ 아무거나라며. ​ “야, 일단 나와.” ​ 나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자연스럽게 손목을 잡아끌었다. ​ “앗….” 반쯤 잡은 상태로 그대로 문을 나서려던 순간. ​ -탁. ​ 누군가의 그림자가 문 앞을 가로막았다. ​ “해인아!” ​ 익숙한 목소리. 활기찬 톤. 고개를 내려다보니, 하시온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오늘 나랑 할아버지 집에 좀….” ​ 그녀의 시선이 옆으로 자연스럽게 흘렀다. 내 손에 잡힌 윤채하의 손목. 그리고 윤채하를 따라잡아 당기던 내 모습. ​ 시온의 표정은 변함없이 밝았다. ​ “오늘은 좀 힘들겠는데? 교류전 때문에 호출이 좀 있어서.” ​ “아… 그래?” ​ “어, 그리고 오늘 형, 누나들 전부 협회 가서, 가봤자 아무도 없어. 진짜 한 명도 없을걸?” ​ “응, 그렇구나. 정말 몰랐어.” ​ 하시온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분위기가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잠깐의 정적. ​ “아 맞다, 해인아 잠깐만.” ​ 그녀의 손이 윤채하의 손목을 잡고 있던 내 팔로 향했다. 그리고 팔을 잡고 끌고 간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윤채하를 놓쳤다. ​ 시온은 내 팔에 매달린 작은 장신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활력의 팔찌. 시온이 선물해준 그거 맞다. ​ “…응 괜찮네.” ​ 그녀는 손가락으로 팔찌를 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 “왜?” ​ “아니… 내 건 살짝 오버플로? 뭐라고 해야 하지, 과충전 상태가 됐다고 하더라고. 네 것도 그런가 해서.” ​ … 나도 조금 오버플로이긴 하다. 아까부터 자꾸 손목을 쪼물딱 거리는 느낌인데, 사실 지금 시온이 이렇게 만지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태. ​ 빨리 가라앉히든가 해야지. 나는 조심스럽게 팔을 빼냈다. ​ “시온 우리 밥 안 먹었는데, 같이 먹을까? 채하 넌 괜찮아?” ​ 그녀는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작 시온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 “아니, 밥 생각은 딱히 없네. 둘이 잘 먹어.” ​ “알았어.” ​ 나는 그렇게 시온을 뒤로하고, 윤채하와 교내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다 복도를 걷던 중, 윤채하가 문득 내게 물었다. ​ “… 무슨 사이야?” ​ “누구? 시온?” ​ “방금 문 앞에서 만난 애 이름이 시온이면, 맞아.” ​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이.” ​ “… 끝?” ​ “끝이지.” ​ 윤채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그런 느낌….” ​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식당 앞에 도착해 있었다. 줄을 서서 키오스크 앞에 서니, 메뉴 선택 화면이 뜬다. ​ 사실, 나는 윤채하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고 있다. 다만 아직 그녀조차 그걸 모를 뿐. ​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키오스크에 떠 있는 메뉴를 눌렀다. ​ “고등어구이? 비린내 나겠다.” ​ 그녀는 코를 살짝 막는 시늉을 하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녀가 고를 차례였지만. ​ -띡. ​ 그러나 나는 가볍게 추가로 치즈 돈까스까지 눌러 총 2개의 음식을 주문했다. ​ “…? 뭐 하는?” ​ “치즈 돈까스 먹어, 치즈 돈까스.” ​ “아니 내가 뭘 먹을 줄 알고….” ​ “사주는 대로 먹도록.” ​ 윤채하는 잔뜩 투덜거리며 뒤에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의 볼이 살짝 부풀어 오르는 게 눈에 보인다. ​ 나는 피식 웃으며 음식을 받으러 갔다. ​ 점심시간인 만큼, 식당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적당한 자리로 이동한 후, 받은 음식을 각각 앞에 내려놓았다. ​ 윤채하는 여전히 투덜거리며 돈까스를 내려다본다. ​ “이게 뭐야.” ​ “맛있게 먹어. 멘토가 사는 거야.” ​ “… 일단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 그녀가 한숨을 쉬며 나를 흘겨보는 사이, 나는 젓가락을 들어 고등어의 살을 살짝 발라냈다. 그리고 쫑알대는 그녀의 입에 툭 넣었다. ​ “…읍?!” ​ 윤채하가 눈동자를 드르륵 굴린다. 입안에서 생전 처음 맛보는 식감이 퍼지자,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 그녀는 설정상 비린내, 즉 생선에서 나는 향을 아주 싫어한다. ​ 그러나…. ​ 그렇게 몇 초간 조용히 입 안을 굴리던 그녀는 생선살을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매끄럽게 풀어진 고등어 살이 혀끝에서 녹아내리듯 퍼지자, 그녀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 입 안 가득 은은한 감칠맛과 부드러운 식감. 그리고 비린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풍미. ​ 윤채하는 입술을 살짝 떼었다가, 다시 다문다. 그러고는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 “… 안 비려.” ​ 나는 안다. ​ 그녀는 생선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 다만, 평생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을 뿐. 그리고 아마 내가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먹을 일은 없었을 것. ​ 그녀는 포크를 들어, 천천히 자신의 돈까스로 향했다. 다소 천천히, 뭔가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 그때,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접시를 그녀 앞에 밀었다. ​ “바꿀래?” ​ “…?” ​ “이거 먹던가.” ​ “… 좋아.” ​ 윤채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내 접시를 가져갔다. ​ “고마워.” ​ 그렇게, 접시가 교환되었다. 윤채하는 내색은 안 하지만, 젓가락이 점점 바빠지고 있었다. ​ 나는 조용히 치즈 돈까스를 썰었다. ​ 생선을 가장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혀로 만들어놓고. 비린내를 싫어하는 설정이라…. ​ 참, 누가 설정했는지. 다시 봐도 악독하다. ​ 평생 이 맛을 모르고 산다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손해 보는 느낌이 아니겠는가? ​ 그때. ​ -깨작깨작. ​ “저기….” ​ “어?” ​ “… 이거 어떻게 발라먹어?” ​ 그녀는 젓가락으로 생선을 전부 뒤집어 놓은 상태였다. 먹고는 싶은데, 가시를 바를 줄 몰라서 일어난 참사. ​ “허.” ​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새 젓가락을 꺼내 그녀의 생선을 손수 발라주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