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서희는 순간 당황하는 듯했지만, 곧 표정을 다잡았다. 눈빛이 흔들린 건 찰나였다. 금세 평소처럼 단정하고 차분한 표정을 되찾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좋습니다. 사도 제거라는 거대한 업적을 세우신 만큼, 저희가 맞춰드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 박서희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곧 다시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 “따라서, 이 부분은 협회 내부의 심의를 거쳐 추가적인 보상안을 다시 결정해 정해인 영웅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시죠.”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즉석에서 바로 더 내어주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일 것이다. 보상을 너무 쉽게 내어주면, 원래 줄 수 있었는데도 안 줬던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 ​ 뭐, 상관없다. 어차피 협회는 돈이 많고,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 너머에는, 지금도 수많은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겠지. ​ ‘뭘 주지? 뭘 줘야 이쪽이 납득하고, 불만 없이 받아갈까?’ ​ 뭐 이런 느낌으로. ​ “그럼 이제….” ​ 박서희는 방금까지의 서류를 정리하며, 한층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 “지금부터는 배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영감에게로 향했다. ​ 나는 등을 의자에 기대며 숨을 가볍게 들이마셨다. ​ 협회의 책임, 그리고 그것을 받아내는 과정. ​ 지금부터는 영감의 차례였다. ​ ​ ​ *** ​ ​ ​ 영감과 나는 협회의 복도를 걷고 있다. 협상은 끝났다. 결과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 협회 또한 자신들의 잘못과 이번 전투가 지닌 가치를 완벽히 이해한 듯했다. 맹주의 2팀, 맹호에서 복구한 녹화 자료를 시청했으니, 이제 그들도 모른 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결국 협회는 기분 좋게 창고를 개방했다. 원작에서도 열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진 협회의 금고를, 이렇게 빠르게 개방하게 만들 수 있을 줄은 몰랐다. ​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협회는 다른 세계의 협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협회를 정부 기관으로 관리하는 반면, 대한민국의 협회는 철저히 사립이다. 초대 창립자의 의지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을 뿐. ​ 그러나, 이어받은 건 의지뿐만이 아니다. 초대 창립자가 남긴 거대한 유산 또한 함께다. ​ 협회의 금고는, 일전에 방문한 가온 창립자의 금고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 얘네는 그냥 돈이 많다. ​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중. ​ "살다 보니 아주 별일을 다 보는군." ​ 영감이 앞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 "협회가 불가람의 공방 개방을 약속하고." ​ 그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게 별로라며 다른 걸 더 요구하는 녀석을 보게 될 줄이야." ​ 나 또한 걸음을 멈추고, 영감을 바라봤다. 살짝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부족한 건 부족한 거죠.” ​ 내 손에는 붉은빛 열쇠가 박힌 투명한 큐브가 들려 있었다. ​ ‘추가적인 보상은 심의를 통해 이른 시일 내에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도, 협회는 공방의 열쇠를 회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본 계획대로 정해인 영웅님이 개방하시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 박서희는 보상과 별개로, 공방의 개방을 약속했다. ​ 잠재성이 뛰어난 영웅의 앞길을 지원하는 것 또한 협회의 의무. 그들이 내건 명분은 그랬다. ​ 이걸로 확실해졌다. 협회는 내가 반드시 그곳을 열기를 바란다. ​ 나는 손안의 투명한 큐브를 굴리며 가볍게 피식 웃었다. 그때, 영감이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최근에 아르카디아에서 협회에 공방의 열쇠를 달라고 요구했다던데… 완전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겠군." ​ 그는 비웃듯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교단에서는 요한을 밀어주기 위해 물밑에서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다면. 공방은 한 번 열리면 일정 시간 동안 굳게 닫힌다는 것. 그리고 다시 열리기까지 기간은…. ​ 최소 10년. ​ 딱히 미안하지는 않다. 애초에 협회가 허락했을 리도 없고, 설령 요한이 공방에 들어간다고 해도, 불가람의 불호령과 함께 쫓겨날 게 뻔하니까. ​ 복도의 끝. 정장을 차려입은 요원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거대한 철제 서류 가방이 열려 있다. ​ “여기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 나는 손을 뻗어 열쇠를 가방 안에 내려놓았다. 붉은빛이 반짝이며, 투명한 큐브 안에서 잠시 흔들리다 조용히 가라앉았다. ​ 굳이 내가 직접 들고 갈 필요는 없었다. 개방의 때가 오면, 다시 받아 가면 될 일이다. ​ 나는 요원들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섰다. ​ ​ ​ *** ​ ​ ​ 하시온은 할아버지와 해인이를 접견실로 올려보낸 후, 1층의 카페로 내려왔다. ​ 한쪽 자리에 앉은 그녀는 몇 시간 전부터 계속 진동하던 워치를 힐끔 내려다봤다. 알람이 연속해서 울리더니, 화면을 여는 순간 엄청난 양의 메시지가 폭탄처럼 쏟아졌다. 어디서부터인지 감을 잡기 위해 천천히 스크롤을 올렸다. ​ 대화의 시작은 오전이었다. ​ [Rin]: 다 있어? 나 할 말 있는데. ​ [1000_y]: ㅇ ​ [Rin]: 다른 년들은? ​ [1000_y]: 유가년은 폐관수련. [1000_y]: 하씨년은 안 봐도 뻔해, 해인이 기숙사 침대에 누워있겠지. ​ 시온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 알고 있던 모양. ​ 변명하자면, 그가 의식을 잃은 지도 어느새 2주. 너무 그리워 어쩔 수 없었다. ​ [Rin]: 음 그렇구나.. 다른게 아니고 나 허리가 너무 아파서 ㅎㅎ ​ [1000_y]: 늙었구나? ​ [Rin]: 어찌나 세게 껴안는지.. 역시 남자가 힘이 세긴한가봐 ​ [1000_y]: ? [1000_y]: 무슨 소리? ​ [Rin]: (사진) ​ 스크롤을 내리던 시온의 손끝이 순간 멈췄다. 그리고, 화면을 보자마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이런 씨….” ​ 한 장의 사진. 그곳에는 정해인이 병실 침대위에 앉아, 강아린을 껴안고 있었다. ​ 사진의 구도를 보아하니, 강아린은 정해인에게 안긴 상태에서 등 뒤로 워치를 뻗어 몰래 사진을 찍은 것 같았다. ​ 그러나 시온이 화난 부분은 단순히 포옹이 아니었다. 자세와, 거리감. ​ 너무 밀착된 상태다. 시온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미친 거 아니야?’ ​ 사진 속 강아린은 정해인의 허벅지를 양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있었다. 심지어 상기된 얼굴로 정해인의 어깨에 턱을 살짝 기대고 있다. 뻗은 한쪽 팔이 그의 등을 마구잡이로 더듬는다. ​ [Rin]: 해인이 일어났어. :) ​ [1000_y]: 지금바로갈게 ​ [Rin]: 놉. 해인이 검사해야 해. 끝나면 와. [Rin]: 잘 놀고 있을게 ㅎ ​ 그 이후의 메시지들은 더 볼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욕설이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 “쯧.” ​ 시온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스크롤을 끝까지 내려갔다. 손가락을 움직여, 짧은 메시지를 입력했다. ​ [시온]: 해인이 협상 들어갔어 ​ 그녀들이 인지하는 범위 내, 그의 일거수일투족 공유. 늘 하는 일이다. 물론 그의 사생활은 존중하지만. ​ 따라서 딱 거기까지. 더 말할 필요는 없다. ​ 그녀는 워치를 닫으며,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혀끝으로 퍼지는 씁쓸한 맛이…. ​ 사진. ​ … 입안을 가득 메우며 향과 함께 조화로운 느낌을…. ​ 사진. ​ “아 짜증나네 진짜.” ​ 그 사진. 그 구도. 그 거리감. ​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 ‘누가 먼저 안았지? 당연히 강아린이겠지. 해인이가 먼저 그랬을 리가….’ ​ 신경이 거슬린다. ​ 결국 시온은 다시 워치를 열었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빠르게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 *** ​ ​ ​ -삐리릭. ​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 나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체감상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실상은 거의 3주 만이었다. ​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다. 묵직한 피로감이 몰려오는 순간,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침대로 몸을 던졌다. ​ “어우 푹신해.” ​ 매트리스가 부드럽게 몸을 감싼다. 몸에 잔뜩 스며들어 있던 긴장감이 녹아내리는 기분. ​ “후우….” 길게 숨을 내쉬며 공기를 들이킨다. ​ 그제야 실감이 났다. 거대한 고비를, 하나 넘기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 천천히 숨을 들이켤 때마다 은근하게 퍼지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향. ​ 손을 이마 위로 올리며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편안한 침대에 더 깊숙이 파묻히려다 멈추고, 상체를 일으켰다. ​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 현재 내 몸의 내부는 전쟁 중이다. 갑작스럽게 받아들인 여러 영약이 서로 충돌하며, 각자의 효과를 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 나는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 각 단체가 내게 먹인 영약의 목록을 받아왔다. ​ [아르카디아ㅡ 월령수(月靈水)] 달빛의 정수를 농축한 신비한 영약. 달의 음기(陰氣)가 신체의 양기(陽氣)를 자극해 세포 재생과 성장 속도를 폭발적으로 증진시킨다. ​ [유 가(家)ㅡ 아환단(亞還丹)] 선대 명의(名醫)의 비법으로 제조된 고급 단약. 정(精)과 혈(血)을 조화롭게 순환시켜 체내 에너지를 끌어올리며, 강한 양기를 축적하게 한다. ​ 그리고 맹주의…. ​ ‘뭐?’ ​ “만년화리??” ​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맹주가 내게 먹인 영약은 만년화리(萬年火鯉) 를 건조시켜 빻아 만든 내단이었다. ​ “어디서 이런 걸….” ​ 온천이나 용암 속에서 천 년 이상 살아남은 잉어. 먹는 순간 전신의 혈이 폭발하며 몸속 깊숙이 쌓인 에너지를 강제로 끌어올리는 극강의 보양제이자, 극약. ​ 그냥 순수한 양기(陽氣) 덩어리다. ​ 시뻘건 색이 특징인데, 이걸 나한테 먹일 줄이야. ​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설정 노트를 펼쳤다. 각 영약의 효능과 사용법을 확인하려던 순간, 문득 하나의 위화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 …잠깐만. ​ 나는 다시금 세 영약이 적힌 목록을 내려다봤다. ​ 보통 영약을 투여할 때는 신체의 성장 방향성을 고려해 조율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이번 경우는 급박한 상황이었음을 인정한다. 살려놓고 보자는 게 우선이었겠지. ​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조합을···.” ​ 나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 그러나 문제는 공교롭게도, 이 세 영약이 효과가 우수한 것을 넘어 한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 양기(陽氣)의 폭발적인 상승을 유도하는···. 극양기(陽氣)의 영약. ​ 다시 말해, 남자한테 좋다는 뜻이다. ​ 그것도, 너무. ​ 물론, 양기는 본질적으로 활력과 회복과 직결된다. 그러니 내 회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 “….” ​ 어쩐지 몸이 계속 뜨겁더라. "아니, 그래도 이건 좀…." ​ 나는 한순간, 최악의 경우를 떠올렸다. 넘치는 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에 벌어질 수도 있을 참사. “… 아 씨발.”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삼켰다. ​ 미치겠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