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잔재에 대한 확인은 끝냈다. 다행히도, 내가 예상한 그것이 맞았다. ​ ‘악신의 잔재.’ ​ 아마 앞으로 여자 한 명과 자주 오게 될 공간이 될 터. 잔재가 놓인 지하 공간을 뒤로하고 우리는 최상층 가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 협회의 접견실. ​ 국가 간의 중요 거래나, 인물들과의 협상을 할 때만 개방되는 공간이다. 일전, 이아노의 유물 건으로 들어간 공간은 협의실. 당시에도 이곳에 들어가지는 못했었다. ​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방이 지금 열리고 있다. ​ -탁. ​ 문이 열리자, 고급스러운 향이 먼저 퍼졌다. 협회의 최상급 접견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 나는 무심히 룸 안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미 자리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 회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 나이에 비해 느껴지는 중후한 분위기에, 날카로운 눈매. ​ 협회의 부협회장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국 영웅협회의 부협회장, 박서희라고 합니다.” ​ 차분한 목소리가 마음을 진정시킨다. 아마 이런 목소리 또한 그녀의 능력일 것이다. ​ 영감은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나 또한 그 옆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전체적인 협상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영감이 진행하되, 가끔 중요한 부분에서만 참여하지 않을까. ​ 시온은 동행하지 않았다. 관련은 되어있었지만, 정작 그녀 스스로 회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 ‘해인, 잘 부탁해.’ ​ 시온은 나한테 전권을 일임했다. 그녀는 짧게 말한 뒤, 1층의 카페로 향했다. 결국, 협상은 나와 영감이 도맡게 되었다. ​ 박서희는 조용히 숨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 “우선, 이야기 시작 전에. 이번 사안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 “함경도 마인 군락 제거 임무에서 발생한 변수는, 협회 측에서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한 채 말을 이어간다. ​ “그렇기에, 이번 사건이 뱅퀴셔를 위험에 빠뜨리기 위한 정치적 계책이라는 일각의 주장 또한 사실이 아니….” ​ 나는 피식 웃었다. 정치적 계책? ​ 그런 걸 꾸릴 여유가 있었을 리가. ​ “알고 있소.” ​ 영감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무덤덤한 목소리에, 박서희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까지 예측하지 못했다고 하여, 협회를 억측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 영감은 손을 깍지 낀 채, 천천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룸 안에 울렸다. ​ “그러니, 중요한 건 협회의 대처요.” ​ 박서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점에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변명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 그녀는 우선, 준비해온 서류를 펼쳤다. ​ “우선, 아르카디아의 팔라딘, 맹주의 2팀 맹호, 그리고 청풍대의 참전과 관련된 의뢰비에 관한 내용입니다.” ​ 그녀는 서류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본래 추가적인 용병의 고용은, 의뢰를 수락한 팀에서 부담하는 것이 맞으나 협회 측에서도 이들의 참전이 이번 전투에서 필수적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세력들의 참여 수당은 전부 지급하는 것이 옳다 판단했습니다.” ​ 깔끔한 대처다. 본디 의뢰를 수락한 팀에서 감당하기 다소 까다로운 건은 용병을 고용하여 같이 참여하기도 하니까. 그런데, 이를 필수적인 요소로 협회에서 받아들여 금액을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 영감은 별다른 반응 없이 바라봤다. 나는 조용히 지켜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그리고 두번째.” ​ 박서희는 살짝 말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 “지금부터는 협회의 실수로 인한 배상과, 업적과 관련된 포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박서희가 들고 있던 펜이 가볍게 흔들렸다. ​ “그런데 배상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포상 부분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 그녀는 살짝 말을 더듬으며 서류의 특정 페이지를 가리켰다. ​ “이 부분이… 솔직히, 조금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 나는 흥미를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박서희가 내민 문서에는 청풍대, 아르카디아, 맹주에서 제출한 각 세력의 참여 명단이 있었다. ​ "확인 결과, 팔라딘, 청풍대, 맹주… 참여한 모든 세력이 정해인 군을 자신들의 포상 대상 공로자로 포함했습니다." ​ 그녀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머리를 살짝 싸매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 “저요?” ​ 나는 되물었다. ​ 나는 천천히 문서를 훑었다. 내 이름은 총 네 번 적혀 있었다. 각 세력의 보상 대상자 명단에. ​ “네… 저희가 전부 유선으로 직접 확인을 해봤으나….” ​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전부 맞다고 합니다. 일전 가온의 입찰전에서 정해인 군을 입찰한 기록을 근거로 삼아, 포상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 영감이 피식 웃고, 나 또한 실소했다. ​ 저게 무슨 뜻이냐고? ​네 개의 조직이 모두 나를 영입 대상으로 삼고 있고, 그 환심을 사기 위해 이번 포상을 최대한 챙겨주려 한다는 뜻이다. ​ “이것이 의미하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마… 정해인 군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 시스템상, 가온의 입찰전을 통해 특정 학생을 입찰하면, 그 순간부터 해당 학생에 대한 정식 협상권을 획득한 것으로 인정된다. ​ 아마 각 세력 모두가 내 실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한 듯했다. 이해는 간다. 아무도 뚫지 못했던 사도의 심장에 창을 박아 넣었으니까. ​ 다만, 편린의 특수성을 아무도 모를 뿐. ​ 박서희는 다시금 서류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 "따라서 저희는, 각 단체의 입장을 존중하여, 정해인 군의 포상을 합산해 별도로 측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 부협회장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 "협회 내부에서 심의를 거쳐, 정해인 군의 공적을 고려한 포상으로…" ​ 그녀는 붉은빛의 열쇠가 담긴 투명한 큐브를 내밀었다. ​ “불가람(不伽藍)의 공방(工房)을, 정해인 영웅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나는 노력했다. 열쇠를 보자마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 ‘약을 파네?’ ​ 영감 또한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아마도 ‘정말?’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뜻은 나와 상반된다. 영감은 협회가 상당한 보상을 내건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나는 손끝으로 큐브를 만지며 피식 웃었다. ​ "오… 괜찮네요." ​ 박서희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 "이번 사건을 고려하면, 정당한 포상이라 판단했습니다. 물론 배상과 별도의 포상금은 별도로 지급될 예정입니다." ​ 그녀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자신들이 예상한 대로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확신 때문인지, 미세하게 여유가 느껴졌다. ​ 불가람의 공방이란. 과거 악신과의 결전에서 숨을 거둔 대한민국 최후의 대장장이. ​ 불가람(不伽藍). ​ 그가 만든 최후의 대장간이다. 그 내부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장비들이 봉인된 채 잠들어 있다. 물론, 나는 내용물은 대충 알고 있다. ​ 그러나, 공방은 그의 유언과 함께 봉인되었다. 불가람이 협회의 초대 창립자에게 남긴 열쇠를 통해, 오직 협회만이 개방할 수 있다. ​ 그마저도 굉장히 뜸하며, 전대 용사가 도전했던 20년 전 이후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 신의 영역에 도전한 대장장이가 창조한 ‘성지(聖地)’였으니까. ​ 그런데 중요한 건 이것이다. ​공방은, 단순한 대장간이 아니다. 그의 영혼이 깃든 시련의 장소다. ​ 즉, 협회가 무구를 임의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공방에 남겨진 불가람의 의지가 선택한 자만이 그의 무구를 얻을 수 있다. 인정받지 못하면 빈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 지금까지 불가람에게 인정받은 사례는 단 한 번밖에 없다. ​ 그럼 나는 인정받을 수 있냐고? ​ ‘무조건.’ ​ 원작에서 불가람의 공방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단 한 번만 입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점은 극의 후반부. ​ 불가람이 주인공을 인정하는 기준은 단 하나. ​ ‘편린(片鱗)의 유무(有無).’ ​ 즉, 현 시점은 극의 초반부지만, 지금의 나는 통과할 수 있다. ​ 나는 확신이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가볍게 말을 던졌다. ​ ‘못 받으면 어쩌게?’ ​ 라는 느낌으로. 최대한 담담히. ​ “그런데 어쩌죠? 제가 자신이 없네요.” ​ 박서희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 “네?” 손끝으로 안경다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뜸을 들인다. ​ 그럴 만도 했다. ​ 불가람의 공방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다. 시대에 한 획을 그을 업적이다. ​ 개방과 동시에, 전 세계 시스템에 알림이 전송된다. ​ [불길이 피를 삼키고, 쇳물이 심장을 두드리는 곳. 불가람(不伽藍)의 공방이 마침내 새로운 주인을 시험한다.] ​ 이 문구 하나가 전 세계의 영웅에게 떠오르는 순간, 협회는 즉시 해당 대상을 공표한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환호한다. ​ 즉, 영웅 협회에서는 새로운 신성(新星) 탄생을 타 국가에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따라서 협회에는 손해가 없다. 사도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린 신성한 영웅의 탄생. 이것을 하나의 마케팅으로 이용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며. 오히려 지금, 내게 어떻게든 이 열쇠를 쥐여 주고 싶을 것이다. ​ 최고의 무구. 최강의 시련. 그리고, 그것을 손에 넣을 단 한 사람. ​ 뭇 영웅들의 가슴을 뛰게 할 이야기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상관없다. 도전한다는 그 자체가, 엄청난 명예였으니까. ​ 그런데 문제는…. 그런 영웅심(英雄心) 따위,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 나는 영웅으로서의 프라이드와 명예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 아마, 불가람이라는 말 하나에 흥분할 줄 알았을 텐데, 크게 착오했다. ​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 “부협회장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최근 공방이 개방된 것이 언제였죠?” ​ “20년 전, 전대 용사님입니다. 매우 명예로운···.” ​ “성공했나요?” ​ “… 그렇지는 않습니다.” ​ “그럼 그 전은요?” ​ “마찬가지입니다.” ​ 나는 심드렁하게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 “그럼 이 열쇠로 협회에서 보장해 줄 수 있는 건 대체 뭡니까?” ​ 박서희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 불가람의 공방,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협회의 통제 밖이다. 협회는 그저 입구를 개방할 수 있을 뿐. 그들이 내게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 영감조차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 눈치다. 모든 영웅이 꿈꾸는 최고의 기회였으니까. ​ 그는 책상 아래에서 은근슬쩍 내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라는 신호. ​ 나는 가볍게 웃으며, 눈앞의 큐브를 내 쪽으로 슬쩍 끌고 왔다. 그리고 큐브를 공중에 던지며 받아냈다. ​ “이건 받겠습니다. 될지는 모르겠는데, 한 번 해보긴 할게요.” ​ 그러나, 이걸로 내 목숨값을 퉁칠 생각은 없다. 협회 또한 나의 요구를 반드시 맞춰줄 수 밖에 없다. 나를 붙잡아야 할 이유는 협회 쪽이 훨씬 더 많으니까. ​ 나는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 “그런데 사도(使徒)를 처치한 것에 대한 포상으로는….” ​ 잠시 뜸을 들인 후, 단호하게 덧붙였다. ​ “좀 부족한데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