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커스는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분명 뇌기를 폭발시켰다. 이 정도면, 저따위 인간쯤은 불타올라 재가 되어야 했다. 적당히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버텨내고 있었다. ​ “크아아….” ​ 살점이 타들어 가는 냄새 속에서도, 놈은 여전히 창을 쥐고 있다. ​ 쥐새끼 같은 기습이었다. 허술한 틈을 파고들어, 마치 목덜미를 물어뜯는 야수처럼. 그의 역장은 단 한 순간에 찢겨나갔다. ​ ‘대체 왜?’ ​ 바르커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분이 내려주신, 축복이자 금제. 이 역장은 결코 인간 따위가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창날이 심장 깊숙히 박혔다. 그 날에 깃든 불길한 기운의 마나가, 상처 치유를 막고 있었다. 천천히 상흔을 갉아먹는 것처럼. 심장이 회복되지 않는다. 상처가 점점 깊어진다. ​ 놈을 올려다봤다. 이미 기절했다. 온몸이 바싹 타올라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 그런데도, 창만큼은 절대 놓지 않고 있다. ​ 게다가, 주위를 둘러싼 번개의 폭풍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는, 벌레떼들. 바르커스가 놈을 떨쳐낸다 해도. 상처 입은 자신을 끝장내려 벼르는 것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다. ​ 슬금슬금 눈에 불을 켜며 틈을 노린다. 아무리 바르커스 본인이라도 해도 이 몸상태로는 쉽지 않다. ​ ‘죽음.’ ​ 그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분의 위대한 계획에 누가되어서는 안 된다. ​ 이놈에게 허점을 드러낸 것도, 방금 들은 비보 때문이다. ​ ‘바르커스를 제외한 사도(使徒) 넷, 전원 퇴거(退去).’ ​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장에서, 바르커스를 제외한 모든 사도가 철수했다. 성공한 것이 아니다, 강제 퇴거였으니까. ​ 바르커스의 머릿속에, 다른 사도들이 패배한다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따라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 무엇이 되었든, 반드시 살아가야 한다. ​ 이번 집행을 위해, 그분이 내려주신 또 다른 권능. ​ 그는 하찮은 벌레 따위를 제거하기위해 사용하는 것에 환멸감을 느꼈으나. ​ 이제, 정말 가릴 것이 없었다. ​ ‘여기서, 내가 죽을 수는 없다.’ ​ 적어도, 퇴거. ​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기 위해. ​ 주위를 덮는 뇌기의 장벽. 그 안에서, 공간이 뒤틀린다. ​ 심장에 창이 박힌 채로, 바르커스의 몸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 -팟. ​ 바르커스가 일순간 사라졌다. ​ 흑색의 번개가, 정해인을 감싼다. ​ 그리고 이내, 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 ​ ​ *** ​ ​ ​ ​ ​ ​ 시공간이 멈춘 무(無)의 공간. 바르커스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전신을 감싸는 충족감을 만끽했다. ​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그것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 바르커스는 이 권능을 내려주신, 위대한 존재를 향해 경건히 되뇌었다. 솟아오르는 충심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나고, 그는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제 벌레를 밟을 차례다. ​ 기습이었다. 방어와 모든 것을 도외시한 혼신의 일격. 순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허용해버리고 말았다. ​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우수하다. 벌레치고는, 뛰어나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에서나. 분명, 흠집 하나조차 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창끝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 ‘마나.’ ​ 그 불길할 정도로 정순한 마나가 역장을 찢어버리고 회복을 막았다. ​ “….” ​ 어째서인지, 불길한 감각. 이 자리에서 끝내야만 한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 바르커스는 무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놈에게 향했다. ​ 그러나. ​ ‘허.’ ​ 분명 기절한 채로 널브러져 있을 줄 알았다. 예상을 비웃듯 놈은 멀쩡히 앉아 있다. 피범벅이 된 몸을 간신히 일으켜,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있었다. ​ “놀랍군.” ​ 아직도 버틸 여력이 있다는 것인가? ​ 이미 심지가 다 타버린 촛불 같은 존재다. 그래도, 화풀이 상대 정도는 되어줄 터. ​ 그때. ​ “… 줬어.” ​ 놈이 중얼거렸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무언가를 되뇌듯이. ​ “뭐라?” ​ 바르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 “정말, 잘해줬어. 네가… 나보다 나아. 정말로.” ​ 그제야 놈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 바르커스의 눈이 살짝 흔들린다. 놈의 표정에 깃든 감정은, 죽음에 대한 공포도, 분노도 아니었다. 대신 순수한 미소가 떠올라 있을 뿐. ​ 놈은 환히 웃고 있었다. ​ 기쁨에 찬 눈물을 흘리며. 뭔가를 초월한 듯한 표정으로. 짊어진 짐들을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하게 날아가듯, 환하게. ​ 분명 울고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울음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 놈이 몸을 일으킨다. ​ -우드득. ​ 신체에서 나는 섬뜩한 파열음이 공간에 울려 퍼진다. 한계 이상의 가동으로 인해 나오는 소리.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이 없었다. ​ “쯧.” ​ ‘이미 끝났었나.’ ​ 흥미가 사라졌다. ​ 일어난 것은 용한 일이지만, 이미 싸울 능력조차 없는 벌레의 잔재다.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바르커스는 흥미를 잃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것보다, 다른 사도들의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아봐야 했다. ​ “그때도, 지금도.” ​ 그때. ​ 스산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바르커스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렸다. ​ “너는 또 도망을 가는구나.” ​ 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얼굴. 그러나 그 눈빛만큼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 입을 여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듯, 입술이 바들바들 떨린다. 그럼에도, 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존재 자체가, 불공평의 극치이면서.” ​ 바르커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처음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허공에 내뱉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여겼다. 그런데. 어느새, 놈은 창을 쥐고 있었다. ​ 분명, 방금 상대했던 놈이다. 싹수는 있었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 그런데. ​ ‘누구란 말인가.’ ​ 처음 보는 놈이다. 같은 얼굴이지만, 같은 존재가 아니다. ​ “이제야.” ​ 놈이 목을 천천히 틀었다. ​ -뿌드득, 뜨득. ​ “저울의 균형이 맞는 것 같네.” ​ 놈의 입술이 서서히 말려 올라갔다.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 위로,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 “두 번은 안 놓쳐.” ​ -슥. ​ 그 순간, 놈의 형체가 사라졌다. 바르커스의 팔이 저절로 들려졌다. 본능적인 방어 반응. 그러나 그것조차 늦었다. ​ -콰직. ​ 눈앞에서 놈의 형체가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창날이 팔을 뚫고 들어와 있었다. ​ “너와 나는 원래 절대 만날 수가 없었는데….” ​ 이글거리는 시선에, 비웃음 섞인 속삭임. ​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 너의 신에게 감사를.” ​ 큭, 하는 소리와 함께 비웃는다. ​ “감히!” ​ 바르커스의 심장이 요동쳤다.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분을 향한 조롱이라 느꼈다. ​ 급히 주먹을 내질렀다. 온몸이 쏠렸다. ​ 그때. ​ -콰직! ​ “크아아!!” ​ 몸이 쏠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조차, 놈의 의도였던 것처럼.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 놈의 창끝이, 왼쪽 가슴팍의 구멍을 꿰뚫었다. ​ 피와 함께, 마나가 역류하며 터져 나왔다. 바르커스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막을 수 없었다. ​ -콰직, 콰직, 콰직. ​ 거침없이. 집요할 정도로 잔인하게. ​ 바르커스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온몸의 힘을 모아 번개를 터뜨렸다. ​ -콰과과광! ​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역장을 한계까지 증폭시키며, 놈과 거리를 벌렸다. ​ “…….” ​ 그러나 놈은 바르커스의 도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 그 자리에서, 조용히 손을 들었다. ​ -사각, 사각, 사각. ​ 공간이 일그러지며, 땅에서 형태를 이루는 수만개의 형체. ​ 분신이었다. ​ 그리고, 그 분신들이 서서히 모여든다. 수천 개가 하나로 얽혀들었다. ​ 마침내, 그것들이 하나의 거대한 창을 이룬다. ​ 바르커스의 숨이 턱 막혔다. ​ “무슨….” ​ 단 하나의 창이 아니었다. 방금 자신을 꿰뚫었던 그 창이. ​ 위력도, 개수도, 더 이상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대해졌다. ​ ‘50개…? 100개…?’ ​ 셀 필요도 없다. 저걸 맞는 순간,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 창 하나하나가 모두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 ‘이건….’ ​ 안된다. ​ 그러나. 망설일 틈조차 없었다. 놈은 그 순간, 단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 “팔랑크스.” ​ 그와 동시에. ​ -콰과과과과과과광!!!!!! ​ 빛이 터졌다. 굉음과 함께, 공간이 뒤틀렸다. ​ 순간, 바르커스의 의식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 ​ ​ ​ ​ *** ​ ​ ​ ​ ​ 남성이 거대한 구덩이로 걸어갔다. 크레이터. 운석이 박힌 것처럼 생긴 깊고 거대한 구덩이. 그 중심을 향해 그는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 온몸이 번개에 그을려 새까맣게 타올랐다. 멀리서 보면, 마치 흑색 장포를 입은 것만 같았다. ​ 정신력. 지금 남성이 버티는 유일한 힘이었다. ​ 이미 이 몸은 한계에 다다랐다. 아까부터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다. ​ 그런데도, 마무리는 하기 전까지는 쓰러질 수 없었다. ​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 그는, 억제력에 묶여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존재. 그런데 그 억제력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직접 손수 빼내 줄 줄이야. ​ 악신. ​ 놈의 초월적인 직감이. 역으로 기회가 된 순간이었다. ​ 어느새, 눈앞에 도달했다. ​ 놈은 머리와 팔까지, 신체 전체가 반쯤 날아가 있었다. ​ “크…흐흐흐.” ​ 뭐에 그리 우스운지. 피로 범벅이 된 입술이 벌어지며, 바르커스가 웃었다. 희미한, 그러나 기괴한 웃음. ​ “이런 놈이, 있었을 줄이야.” ​ 되뇌인다. ​ "그분에게 보고할 거리가 생겼군." ​ 킬킬거리는 웃음이 잔향처럼 남는다. ​ 그러나 남성 또한 웃었다. ​ 바르커스가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이유. 절대 죽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곳은 놈을 보호해 주는 공간. 녀석들은, 늘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지지 않는 싸움만을 해왔다. ​ 역겨운 놈들. ​ 이제, 그 착각을 바로잡아줄 차례다. ​ 남성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짰다. ​ 그때. 마치 밤하늘의 별이 사라지듯. 그 자리의 모든 것이, 서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 무한한 흑색의 공간. 영역이 펼쳐지며, 거대한 구덩이를 덮었다. ​ 남성은 편린(片鱗)이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만들어 내야만 했다. 고안하고 고심하며, 가능한 모든 행위를 하며 미친듯이 발버둥쳤다. ​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도달한 경지. 마인들의 금제를 찢어내기 위해 창조해 낸, 그만의 이빨. ​ 묵귀(墨鬼)의 영역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 [무위무상(無爲無相)] ​ 절대자든, 초월자든, 신이든. 그 어떤 존재여도 상관없다. ​ 금제? 신성? 시공간? 그 어떤 개념도 이곳에서는 사라진다. ​ 이 영역 안에서, 모든 법칙은 무의미하다. ​ “후….” ​ 남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바르커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말도… 안되는….” ​ 놈이 굼벵이 같은 자세로 땅을 더듬기 시작했다. ​ 연결되어 있던 모든 감각이 끊어지는 느낌. ​ 아마 본능적으로 직감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분조차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 결국 너희도, 한 꺼풀 벗기면 나약한 존재다. ​ 남성은 비틀거리며 창을 두손으로 잡는다. 후들거리는 팔, 그래도. 이대로 내려찍는 것만큼은 할 수 있다. ​ “안돼… 안돼…!” ​ 바르커스의 손이 허우적거리며 남성의 다리를 붙잡았다. ​ 망설일 틈이 없다. 조금만 늦더라도 쓰러지는 건 남성 쪽이다. ​ -푹! ​ 창이 땅에서 뽑혀 놈의 머리 위를 정확히 조준한다. 그리고 그대로. ​ “안돼!!!!!” ​ “됐….” ​ -콰직! ​ “…다.” ​ 단말마와 함께. 남성의 온몸도 동시에 무너졌다. ​ 그리고. ​ 흑색의 영역을 넘어. 시공간이 멈춘 무의 공간이. ​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