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 -캉! ​ 단 몇 합 만에 뼈저리게 통감했다. ​ 놈과의 실력 차이를. 벌써, 놈의 일격에 당해 세 번도 넘게 나가떨어졌다. ​ 정면으로 맞붙는 순간, 마치 창대가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끝이 점점 감각을 잃어갔다. ​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격돌음. 시야가 흔들리고, 귓속에서 피가 맺힌다. ​ ‘… 망할.’ ​ 시련을 겪은 이후, 수없이 많은 훈련을 했다. 발전도 있었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난 지금 이 자리에서 송장이 되어 있었을 테니까. ​ 내가 느낀 것은, 내가 아직 이 싸움에 있을 수준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수천번의 죽음 끝에 얻은 경지는 결코,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것. ​ 나는 공중에서 몸을 틀어 다시 한번 도약했다. 그와 동시에, 분신을 직조하기 시작했다. ​ ‘카테나치오.’ ​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팔랑크스까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이었다. ​ 모 아니면 도다. 더 늦기 전에 반드시 해야만 했다. ​ 박광철이 바르커스를 붙잡고 드잡이질하며, 이목을 끄는 지금. ​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창을 쥐었다. ​ 벌써 몸에 피로감이 가득 쌓였다. ​ 이를 악물고 마나를 끌어올려, 분신들을 전개했다. 마침내 바르커스를 둘러싼 10개의 창날이 동시에 그를 향해 겨눠진다. ​ 그러나 그 순간. 놈의 시선이 번쩍이며, 날카롭게 이쪽으로 쏠렸다. ​ 그리고. ​ “갈(喝)!!” ​ -콰아아아앙! ​ 폭풍이 휘몰아치듯이, 바르커스의 사자후가 울려 퍼졌다. ​ 거대한 진동이 공간을 가르며, 허공에 떠 있던 모든 분신이 동시에 터져 나갔다. 산산이 조각난 환영들이, 피처럼 붉은 잔상만 남긴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압도적인 파동이 전신을 덮쳤다. ​ “크으….” ​ 순간적으로 귓속이 멍해졌다. 산산이 부서진 돌 조각들이 흩날리며, 내 몸과 함께 땅속 깊숙이 박혔다. ​ 사지가 저릿하다. 가슴이 찌그러지는 듯한 압박감. 머리가 멍해진다. 둔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서서히 퍼져나갔다. ​ 그 순간, 시야 한쪽에서 박광철이 피를 토하는 모습이 보인다. ​ 영감 역시, 입술을 질끈 깨문 채 팔라딘의 사제에게 치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치유 마법조차도 버티기 벅찬 듯, 그의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다. 한 번에 나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 “…….” ​ 나는 완벽하게 인지했다. 순수한 내 힘으로 닿을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 이제는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 나는 눈을 감고, 카타스트로피를 쥐었다. 붉은색으로 음각된 문양이 칼날을 따라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 이내. ​ [알데바란의 첫 번째 권능(權能), '무답(無踏)'을 각성합니다.] [알데바란의 두 번째 권능(權能), '귀참(鬼斬)'을 각성합니다.] ​ [내게, 보여라.] ​ 뼛속 깊이 울리는 음성이 전신을 꿰뚫었다. ​ [널 선택한 이유를.] ​ 첫 번째 시련. 그리고 두 번째 시련을 통해 얻은 알데바란의 힘이 깨어났다. ​ 그러나 몸이 치유되거나 회복되는 일은 없었다. 온몸이 만신창이였고, 근육은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쑤셨고, 찢어진 피부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내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어섰다. ​ 놈은 여전히 나를 보지 않는다. ​ 그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즉, 나 따위는 상대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 ​ -쾅! ​ 그때, 눈앞에 신성한 성전이 열렸다. 완벽한 성전은 아니다, 흉내 내기에 불과했지만. 그 의지만큼은, 찬란하게 빛난다. ​ 팔라딘 전원. 그들은 한 발 한 발을 맞추며 대형을 유지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금빛의 성광이 서서히 확장되며, 그들의 발밑에서 성스러운 문양이 떠올랐다.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 마침내. 그 신성한 행진이, 마침내 바르커스에게 맞닿는다. ​ -콰르릉!! ​ 놈의 손끝에서 번개가 폭발했다. 흑색의 전격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팔라딘의 성전을 유린한다. ​ "큭…!" ​ 선두에서 방패를 세운, 팔라딘의 리더가 이빨을 악물었다. 성광의 장벽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어리석은 짓이다." ​ 한 손을 펼친 채, 번개를 증폭시킨다. ​ 그때. ​ -텁. ​ 놈의 발밑이 움푹 꺼졌다. 유칼이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읊조리며 바닥에 마법진을 새겼다. ​ "Qolais... sio... kal!" ​ 붉은 마법진이 바닥에 새겨지고, 거대한 사슬에 묶인 손들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바르커스를 덮쳤다. 거대한 마법진이 발동하자, 각 진의 사각지대를 맹호의 마법사들이 메워 보충했다. ​ 유칼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아직 일전의 데미지를 치유하지 못했던 모양. ​ -촤아아악! ​ 사슬이 놈의 팔다리를 감싸며 단단히 조였다. ​ “흡!” ​ 사슬을 뿌리치는데 걸리는 시간. 단 1초. 그래도, 그것이면 충분했다. ​ 놈의 뒤로, 이도현과 성아라가 돌진했다. ​ 이도현의 쌍검이 눈부신 궤적을 그리며 놈의 허리를 베어 가르고, 성아라의 철권이 직격으로 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놈의 역장이 짙게 흔들린다. ​ “파리떼가!” ​ 바르커스는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엄청난 반동이 두 사람을 튕겨냈다. ​ 그러나, 끊임이 없었다. ​ -슥. ​ 청풍대가 틈을 파고든다. 그들의 병장기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놈의 맹렬한 역장을 두들겼다. ​ 바르커스가 역장을 폭발시켜 방어한다. ​ 마치, 정교하게 짜인 그물을 보는 듯.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놈을 옥죄어 갔다. ​ 거대한 고래를 잡기란, 원래 힘든 법이다. ​ 비록 처음 맞춘 합이지만, 이들은 인류 최선봉의 전사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 그들 모두 피부로 와닿고 있다. ​ 사도(使徒)란 존재가 얼마나 괴물 같은지.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단 한 명이라도 끝내지 못한다면, 어떤 끔찍한 비극이 뒤따를지를. ​ 따라서 전장의 모든, 칼날이. 바르커스를 향한다. ​ 차륜전(車輪戰). ​ 차바퀴가 계속 굴러가듯, 교체해가며 연속적으로 덤벼든다. ​ 이건 단순한 난전이 아니다. 각각의 세력이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적을 몰아간다. ​ 뱅퀴셔 하나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던 일. 서로 다른 팀들이 빈틈을 메우며, 목숨을 걸고 사도를 향해 덤벼든다. 시련 속에서 수없이 바라본 미래를 바꾸기 위해 준비한 안배가. 지금 여기서. 빛을 발한다. ​ 나는 그저 숨었다. ​ 웅크렸다. ​ 이 전장의 열기에. 숨어들었다. ​ 나라는 존재를 잊게끔. 기도비닉하며, 때를 기다린다. ​ “….” ​ 눈앞에서 동료들이 비산한다. 날아가고, 튕겨 나가고, 피를 토한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지켜보는 것은,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다. ​ 그래도 해야만 한다. 저 역장을 찢어발길 비수(匕首)가 되기 위해. 목덜미를 물어뜯을 이리가 되기 위해. ​ 더욱 갈고 닦고, 숨어든다. ​ 첫 번째 권능(權能), 무답(無踏). ​ 카테나치오, 그리고 이어지는 팔랑크스. ​ 어디까지나 공중기(空中技)이며, 하늘로 도약하지 않으면 결코 펼칠 수 없다. 무답(無踏)은 더 이상 하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아도, 마치 날아오른 것처럼. ​ 중력 따위, 이제 내게는 무의미하다. ​ 두 번째 권능(權能), 귀참(鬼斬). ​ 카타스트로피의 극(戟)이 흔들린다. 붉게 각인된 문양이 서서히 타오른다. 그 불꽃의 기세가 강해질수록, 나는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 ‘파사현정(破邪顯正).’ ​ 사악한 것을 필히 부순다. 편린의 멸마(滅魔)의 기운이 창에 깃든다. ​ 넓게, 더 넓게. 마치 세상을 가를 일격처럼. 강화된 검강이 형체를 갖춘다. ​ 귀참(鬼斬). ​ 뜻 그대로, 귀신을 벤다. ​ 나는 창을 고쳐 쥐었다. 고개를 들어, 놈을 바라본다. ​ 마치, 이 공간에 나와 놈, 단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 [『명경지수(明鏡止水)』가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진화합니다.』] ​ 그때의 내가, 무아지경(無我之境)을 습득했다면, 지금의 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이다. ​ 오로지 하나에 집중한다. 흩어짐 없이, 단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놈을 향한, 살기를 갈무리한다. ​ 놈의 움직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진다. 심장 박동, 숨을 들이켜는 소리. 하나하나 들린다. 모든 감각이 놈에게 집중된다. ​ 그리고. ​ 그 순간. ​ 놈이 고개를 돌린다. 무언가에 놀란 듯. 항상 여유롭던 놈의 표정이, 불가해(不可解)한 현상을 본 것처럼 일그러진다. ​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 “이 병신들, 대체 뭐 하는…!” ​ 이윽고 놈이 고개를 사방으로 돌린다. ​ “넷, 전부…?” ​ 의문이 깃든 얼굴. 그리고 단 한 번도 틈을 보이지 않았던 놈에게, 거대한 틈이 드러났다. ​ ‘지금.’ ​ 숨겨온 이빨을 드러낼 시간. ​ 무답(無踏). ​ 나는 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각으로 파고든다. ​ 이미 나는, 아까부터 놈의 사각(死角)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각(死角)은, 놈을 죽일 단 하나의 길이 되어줄 것이다. ​ 직선으로 쇄도한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 ‘카테나치오.’ ​ 이걸로는 부족하다. ​ ‘팔랑크스.’ ​ 이걸로도, 부족하다. 아니 부족할 것이 분명하다. ​ 귀참(鬼斬). 창끝에 녹옥빛의 거대한 검강이 일렁인다. ​ 멸마(滅魔)의 기운이 응축되어 검강으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이것만큼은, 반드시 통한다. ​ 폭풍같이 쇄도한, 내 창끝이. 마침내 놈의 역장에 닿았다. ​ -콰드드드드득!! ​ “무슨…!” ​ 쥐도 새도 모르게 접근한 나를 보고, 놈은 기함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눈빛 속에서 안도감이 스쳤다. ​ 바르커스는, 아직도 나를 벌레 취급하고 있었다. ​ 그게, 네가 죽게 될 이유다. ​ 놈을 지켜줘야 할 역장이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하고, 내 창에 의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 그리고. ​ -콰득! ​ 창끝이, 마침내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 “크아아아아악!” ​ 비명. 절규. 괴성이 터져나온다. ​ 손을 뻗어, 필사적으로 창을 붙잡는 놈. ​ 어디서 본 장면이다. 분명, 그때는 부족했지만…. ​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 -콰과과과광!! ​ 놈의 심장에서 거대한 번개(閃雷)가 폭발한다. 찬란한 섬광이 눈을 찌르고, 하늘을 뒤흔든다. 눈부신 섬뢰(閃雷)의 파도가, 내 온몸을 집어삼킨다. ​ 타들어 가는 감각. 근육이 찢어지고,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 번개의 포효가 내 신경을 갈가리 물어뜯는다. ​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 “크으으으…!” ​ 내 입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온다. ​ 그럼에도. ​ 심장에 박힌 창만큼은, 단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