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다른 형제들 간의 알력다툼이 극심했던 영광에서, 막내였던 그녀. 강아린의 삶은 어릴 때부터 결코 쉽지 않았다. ​ 불과 다섯 살. 다른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고 친구들과 노는 법을 익힐 때, 그녀가 처음으로 배운 것은 사내 정치와 무력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정통성을 지닌 회장 본처의 둘째 딸이었으니까. ​ 주변 세력들의 견제는 너무도 당연했고, 그녀에게 주어진 짐은 어린아이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 그러나 그런 세상 속에서도, 그녀를 지켜주는 존재가 있었다. ​ 오빠, 강유성. ​ 그는 언제나 좋은 방파제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 ​ “우와!” ​ 강아린은 어린 나이에 강기공을 익혀버렸다. 손끝을 따라 검은 기운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여섯 살이라고는 결코 믿을 수 없는 성취. ​ 가정교사 안나는 그녀의 성취에 기뻤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웠다. 재능이… 너무 뛰어나다. ​ 어린 나이에 이런 재능을 보이는 것은 축복이자 재앙이었다. 다른 형제들의 시기를 사기에 충분했고, 아직 자신의 세력을 갖추지 못한 강아린에게는 너무도 위험했다. ​ “아가씨…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로 하는 게 어떨까요?” ​ 따라서 이것이, 가정교사로써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응? 왜?” ​ 강아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음… 일종의 깜짝 파티 같은 거죠. 조금 더 발전시키고 대표님에게 보여드리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요?” ​ “아, 그렇구나~” ​ 착한 강아린은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덧붙였다. ​ “그럼… 딱 오빠한테만 말하는 거 어때? 나머지 사람들한테는 쉬~ 할게.” ​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쉬~’ 하며 장난스럽게 웃는 아이. ​ '강유성 정도라면 괜찮겠지.' ​ 그녀의 친오빠. 심성이 착했고, 무엇보다 어린 동생을 누구보다 아낀다는 것이 보였으니까. ​ “좋아요.” ​ 안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아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뛰어나갔다. ​ ‘딱하다.’ ​ 강아린의 뒷모습을 보며 느꼈다. 비록, 그 감정이 피고용인이 고용인에게 품을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런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다. ​ 강아린이 달려간 곳은, 늘 자신이 믿고 따랐던 오빠의 품이었다. ​ “오빠!” ​ 강유성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힘껏 손을 뻗었다. 작은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맴돌았다. ​ 그녀는 당연히 오빠가 기뻐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 “어때? 멋있지?” ​ 언제나처럼.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대단하다’고 칭찬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굳어 있는 표정. 언제나 부드러웠던 눈매가 이상하리만큼 날카로웠다. ​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익숙한 얼굴을 되찾았다. ​ “잘했네~” ​ 그제야, 언제나처럼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강아린은 그때는 몰랐으나 돌이켜 보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 그리고, 시간이 흘러. ​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 강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믿어.” ​ 졸업을 앞둔 이맘때의 그녀는 지금껏 정해인의 말을 대부분 믿어왔다. 그가 하는 말은 어쩐지 언제나 옳았다. 따라서… 무슨 말을 해도 믿으려 했는데…. ​ 오빠가, 마인의 첩자다? ​ 강아린은 그것만큼은 믿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받아들이는 척했으나 어물쩍거렸다. ​ 그러나, 그의 말은, 이번에도 역시, 옳았다. ​ 강유성은 악신의 부활을 위한 재료로, 한순간에 도시 하나를 불태워버렸다. 도망치는 시민들의 절규. 살려달라고 외치는 목소리. 새까맣게 타버린 건물과 도로. ​ 전부 강아린, 그녀의 작품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 화염 속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오빠의 모습. ​ “아….” ​ 강아린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 마침내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 시공간을 초월한, 절대자의 공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 “이제야 너를 만나는군.” ​ 거대한 그림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강아린의 앞을 가로막고 선 사도(使徒). ​ 거석상 발락(Balak). 그는, 마지막까지 강유성과 내통한 마인(魔人)이었다. 그 모든 파멸을 뒤에서 종용했던 존재. ​ 강아린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 “대뜸 네 오빠를 죽일 때는, 정말 어이가 없었지.” ​ 발락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 “나름, 아껴둔 카드였는데 말이야.” ​ 입꼬리가 뒤틀리며 조소가 흘러나왔다. 거대한 몸체를 지탱한 채,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오만한 웃음과 여유로운 태도. 그는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듯 그녀를 응시했다. ​ 그러나 강아린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흐음….” ​ 눈을 감으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 강유성의 일 이후 그녀는 깨달은 것이 있다. ​ ‘정해인의 말은, 무조건 옳다.’ ​ 세상의 진리(眞理). 너무 늦었지만, 자명한 사실이었다. ​ 발락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전부 내가 한 짓이다.” ​ 목소리가 웅장한 동굴의 울림처럼 울려 퍼졌다. ​ “너의 오빠가 배신을 결심하도록 종용한 것도. 어린 동생의 재능을 목도하고, 그에 대한 공포를 느낀 한심한 놈의 감정을 증폭시킨 것도.” ​ 그는 일부러 한 박자 늦게 말했다. 그 반응을 즐기고 싶은 듯, 기다리듯이. ​ “전부… 나다.” ​ 그러나 그녀는 그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 -촤아악! ​ 검은 강기가 허공을 가르며 놈의 옆얼굴을 베었다. ​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움직임이었을 뿐. 마치 손을 뻗어 유리창을 어루만지듯이. 그러나 그의 바위 같은 피부가 가볍게 찢어졌다. 검붉은 피가 가늘게 흐르며 부스러진 돌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 “….” ​ 발락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 그의 육체는 위대하신 그분이 내려주신 마합금(魔合金). 미스릴로 이루어진 불사의 육신. ​ 깨질 리가 없다. 깨져선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일반적인 바위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나른한 목소리. ​ “보고 싶다.” ​ 그러나 정작 그녀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고 있었다. ​ 그의 도발을 듣고 분노했는가? ​ 전혀. ​ ‘분노’란, 자신의 욕구 실현이 저지당하거나 어떤 일을 강요당했을 때, 이에 대응하여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을 뜻한다. ​ 그에 비해 강유성의 마인화(魔人化)는, 이제 그녀에게 있어서 어떤 감정도 줄 수 없었다. ​ 강아린의 욕구(欲求)는, 어느 순간부터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 완벽한 침착함. 오직 단 하나의 목표만을 향한, 유려한 살기. ​ 강아린은 다시 한번 손을 들었다. 검은 강기가 일렁이며 그녀의 손끝을 타고 흘렀다. ​ -사박. ​ 어디선가 검은 여우 한 마리가 천천히 나타났다. ​ 그녀의 발치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 여우는, 가벼운 곡선을 만들며 그녀의 다리를 감싸듯 움직였다. ​ 강아린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빛이 가늘게 깜빡이다가, 서서히 번져가며 깊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한 번 훑었다. ​ 발락의 거대한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일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 그의 동물적인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 눈앞의 인간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 강아린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어디선가 여우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검은 기운이 공간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 ​ ​ ​ *** ​ ​ ​ ​ ​ 주어진 재능이 한없이, 또 한없이,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는가? ​ “으흑… 흑….” ​ 하시온은 오늘도, 훈련장 한구석에서 숨죽여 울고 있었다. 성시우의 실종. 그의 어깨 위에 다시금,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 얹혔다. ​ 강아린, 천여울, 유하나, 그리고… 성시우까지. ​ 그들은 모두 편린이라는 권능을 받아들여 마인에게 맞설 힘을 얻었다. 필요한 존재들이었고, 그들의 힘은 필수적이었다. ​ 그러나 성시우가 사라진 지금— 그 짐은 더욱 무거워졌다. ​ 신이시여. ​ ‘대체 왜.’ ​ 저에게는 편린을 받아들일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나요? ​ 그녀는 엎드린 채, 땅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 한탄, 통탄, 원망. 그 모든 감정을 속으로 삼키며,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 -꽈악. ​ 다시금, 활을 쥐는 것뿐. ​ 연습. 언젠가. ​ 언젠가는 타오를지도 모를 불꽃을 지피는 것뿐이었다. ​ ​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 주위는 완전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소리도, 빛도, 존재도 없다. 이질적일 정도로 고요한 공간이었다. ​ 하시온은 단숨에 깨달았다. 이런 요사스러운 방식을 즐기는 사도는 단 한 명뿐이다. ​ ‘블라그.’ ​ 그녀가 눈을 돌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흰 인영이 서서히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존재. 그러나 분명 말을 하고 있었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리따운 소녀분.” ​ 마치, 스피커가 지지직거리는 소리. 그 목소리 안에는 불길한 여운이 남아있었다. ​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 그것은 천천히 몸을 기울이며 마치 예를 차리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 “저로 말할 것 같으면….” ​ 그 공간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존재. ​ “사도, 제 8석(席), 블라그.” ​ 공허한 음성이 깊숙이 울려 퍼졌다. ​ “저의 공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블라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웃고 있다는 것은 느껴졌다. ​ “저로서도, 궁금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이렇게 위대한 공간을 내려주셨는데, 말이 길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 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 -쾅! ​ 무형의 공간이 진동했다. ​ 시온은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냥 주변을 스캔했을 뿐. ​ 사방이 흰색 안개로 휘감겼다. ​ 블라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 -쫘아악. ​ 그의 이마가 갈라지듯 열렸다. 그곳에서,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 제 3의 눈. ​ 공간 전체가 파문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 “시온 양.” ​ 이마 열린 눈이 가늘게 떠졌다. ​ “당신은 누구입니까?” ​ 블라그의 제3의 눈이 천천히 떠올랐다. 흐릿하던 공간이 일순간 선명해진다. 마치 세상의 이면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시야. ​ 이 눈에 비친 자들은 모두 같은 결말을 맞았다. 숨기고 있던 약점이 드러나고, 필연적인 패배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게 된다. ​ 그러나, 그 눈이 하시온을 분석하는 순간. ​ “…….” ​ 블라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 그녀의 나이, 겨우 20년 남짓. 그렇게 짧은 세월을 살아온 자에게, 이런 기록이 존재할 리가 없다. ​ 마인을 살해한 횟수. ​ 몇천? 아니다. ​ 몇만? 아니다. ​ 그 이상이었다. ​ 그때. ​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심연처럼 어두운 화염. 그러나 그 기세는 성화를 닮았다. ​ 어째서인지, 성스럽기까지 하다. ​ ‘파마(破魔)의 불꽃.’ ​ 하시온은 편린을 가질 수 없었다. 그 선택받은 힘을 가지지 못했다. ​ 그래서, 홀로 마인을 사냥했다. 그들에게 닿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어야 했다. ​ 어차피 사냥하다 죽든, 사도에게 죽든.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처음에는 무모한 사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마인을 죽이는 효율적인 방식을 익혀갔다. 이해할 수 없던 감각이 차츰 익숙해졌다. 마인의 움직임, 살을 뚫고 지나가는 손끝의 감촉,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의 흐름까지. 그녀는 그것들을 읽고, 쌓아가며 하나하나 이해하려 했다. ​ 그렇게 끝도 없이 사냥을 이어가던 끝에. ​ 마침내. 죽음의 끝에서. ​ 그녀는 ‘마(魔)’의 본질이자, 개념을 이해했다. ​ 그녀는 어떤 신의 선택도 받지 않았다. 그녀는 어떤 힘에도 기대지 않았다. ​ 그런데도. ​ 눈앞의 블라그는 직감했다. 그녀는, 마인에게 있어 최악의 포식자(捕食者)이자, 천적이었다. ​ 하시온. 그녀의 눈앞에, 사도가 있다. ​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상황. ​ 이길 수 있느냐? ​ 스스로에게 물었으나,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가능성을 따지고 행동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 그저, 할 뿐. ​ -스윽. ​ 하시온은 말없이 활을 들어 올렸다. ​ -트드드득. ​ 활이 한계까지 당겨진다. 이제, 더 이상 당겨질 곳조차 없는 팽팽한 상태. ​ 눈앞의 사도도, 결국 마인이다. 크건, 작건, 강하건, 약하건. ​ 지금까지 그녀가 살해한, 수십만 마리의 마인들과 다르지 않다. ​ 죽인다. -우우우우웅. 휘몰아치는 불꽃이 활대를 따라 흐르며, 맺힌 화살 끝에 고요한 적막을 만들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쏜다. -팟! 활이, 터지듯 튕겨나갔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