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르커스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주위로 번개를 머금은 검은색 먹구름이 둘러졌다. ​ 뇌운(雷雲). ​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 -우르릉…. ​ 공간이 떨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 “유칼!!!” ​ 유칼이 즉시 반응했다. 양손을 크게 벌리며 마법진을 펼친다. 그리고 크게. 크게. 더 크게. 그 크기는 점점 커지며, 전장 전체를 아우르는 방어막을 형성했다. ​ -콰과과과과과광!! ​ 눈앞이 일순간 멀 정도로 번쩍였다. 하늘을 가득 메운 번개가 방어막을 강타한다. ​ “크으으….” ​ 유칼은 고통스러운지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손이 떨리며 방어막이 심하게 요동친다. ​ 팔라딘이 입을 달싹거리며 급하게 성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리더로 보이는 여성이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성스러운 기운이 방어막에 깃들며 서서히 두꺼워진다. ​ 맹주 2팀, 맹호의 마법사들도 그를 도와 방어막을 펼쳤다. ​ -둥둥둥둥…! ​ 바르커스의 번개가 방어막을 마구 두들겼다. 막을 두드리는 충격이 공기마저 흔든다. ​ 나는 이를 악물었다. ​ 이러다가, 찢어진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방어막이 깨지기 전에, 먼저 가야 한다. ​ 나는 힘껏 바닥을 박찼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가 날아가고 있었다. ​ 영감이었다. ​ 하늘로 솟구치며, 그가 주먹에 두른 권강(拳剛)이 번개를 찢어냈다. ​ “시온은 어디 있느냐---!!” ​ 포효가 터졌다. 순간적으로 번개의 굉음이 묻힐 만큼, 우레 같은 외침이었다. ​ 바르커스를 향한 맹렬한 기세의 돌진은, 놈의 낙뢰(落雷)를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 -쾅!! ​ 거대한 충돌음과 함께 영감과 바르커스가 격돌했다. ​ 영감이 휘두른 주먹이 바르커스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반대쪽 주먹을 날렸다. ​ -퍽! ​ 바르커스의 머리가 살짝 젖혀졌다. 그러나. 놈은 웃고 있었다. ​ “그분께서 처리하라 할 때는, 의문을 품었었지.” ​ 바르커스는 천천히 고개를 바로잡았다, 붙잡고 있던 영감의 왼쪽 팔을 비틀었다. ​ -뚜두둑! ​ 관절이 비틀리며 기괴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영감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 “헌데, 이제 알겠군.” ​ 바르커스의 눈 속에서 치직— 번개가 휘몰았다. ​ “가히… 인간 최강이라 할 만하구나!” ​ 그 순간, 난타전이 시작됐다. ​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친다. 영감이 틈을 노리고 바르커스를 가격한다. 바르커스도 지지 않고 번개를 타고 움직이며 응수한다. ​ 속도만 보면 동수에 가깝지만…. ​ 바르커스의 번개는 정확히 영감의 몸을 꿰뚫듯 적중한다. 그러나, 영감이 휘두른 권강은 바르커스의 역장에 가로막혀 허공을 가를 뿐이다. ​ “이것뿐인가? 내가 고작 이것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 ​ 바르커스의 외침이 공간을 메운다. ​ 처음엔 막아내고, 받아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바르커스는 점점 속도를 올렸다. 반면, 영감의 움직임은 점점 무거워졌다. ​ 그가, 지치고 있다. ​ 나는 이를 악물었다. ​ ‘안돼.’ ​ 영감은 버틸 수는 있어도, 놈을 이길 수는 없다. 악신이 그들에게 내린 절대적인 권능은,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손상시킬 수 없는 금제(禁制)에 가까우니까. ​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다. 창을 쥔 손이 부들거리며 떨린다. ​ 천여울, 유하나, 강아린, 시온. 그녀들은, 사도에게 납치당했다. 막지 못했다. 눈앞에서 손을 뻗었지만, 허공만 움켜쥐었다. 그녀들이 끌려가는 순간, 나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도가 올 것을 예상했고, 이번에야말로 대비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들을 불러들인 것이 오히려 사지로 내몰았다. 내가 한 선택이, 그녀들을 잡아먹었다. ​ 나는 그녀들을 구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가. ​ 절망감으로 가득 차오른다. 온몸이 무겁다. 그러나. ​ [『명경지수(明鏡止水)』가 정신을 일깨웁니다! ] ​ 머릿속에서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내면의 동요가 가라앉는다. 잔잔한 수면처럼, 시야가 맑아진다. ​ 뿌옇게 물든 안개가 사라지니. 지금 해야 할 일. 그것만이 호수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 지금 이 자리에서, 바르커스를 실질적으로 해칠 수 있는 자. ​ 팔라딘을 제외한다면. 편린(片鱗)의 힘을 가진 유일한 존재. ​ 나뿐이었다. ​ 손끝이 서서히 뜨거워진다. 피가 끓는 감각. 숨을 들이마셨다. ​ 그리고ㅡ ​ 나는 그 자리에서 튕겨 나갔다. ​ -콰직! ​ 발밑이 산산조각났다. 전신의 힘을 끌어모아, 공간을 가르듯 몸을 날린다. 눈앞의 풍경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그러나, 나만이 아니었다. ​ “영감!!!!” ​ 외침과 함께, 왼편에서 붉은 폭발이 일었다. ​ 박광철이 나와 함께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르며 허공을 가로지른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가 맴돌았으며, 온몸은 폭발적인 기세로 응축되어 있었다. ​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 전장이 깨어나고 있다. ​ 뱅퀴셔, 맹호, 팔라딘, 청풍대, 모두 정신을 차렸다. 얼어붙어 있던 영웅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도 소중한 자들을 놓쳤지만, 결코 멈춰 있지 않았다. ​ 나와 박광철이 놈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전장의 모든 투지가 단 하나의 적을 향했다. ​ 바르커스. ​ 놈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두 발짝 물러서며, 손을 들어 올린다. ​ “와라.” ​ -파지지지지직! ​ 공중에서 검은 번개가 요동쳤다. 휘몰아치는 전류가 살을 에듯 퍼져나갔다. ​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없다. ​ 그 번개 속으로ㅡ ​ 우리는 몸을 던졌다. ​ 전투의 막은, 이미 한참전에 올랐다. ​ ​ ​ ​ ​ ​ *** ​ ​ ​ ​ ​ 천여울은 눈을 떴다. ​ 붉은 사슬이 팔목에 감겨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손목을 한 번 털었다. ​ -챙. ​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사슬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미줄처럼 엉켜 있던 속박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듯. ​ 천여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 폐허가 된 신전. ​ 거대한 기둥들은 금이 가고 갈라져 있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운 건축물. 하늘은 짙은 보랓빛으로 물들어 있다. ​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기괴하게 선명했다. ​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감각… 그리고…. ​ 그 순간. ​ “아름답지 않아?” ​ 듣기 싫을 정도로 간지러운 목소리. 콧소리가 섞인, 비릿하고도 여유로운 음성. ​ 천여울은 시선을 돌렸다. ​ 그곳에는 누군가 공중에서 둥둥 떠 있었다. 메어리였다. ​ 요염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팔을 늘어뜨린 채 한쪽 손으로 턱을 괸 그녀의 입술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메어리는 손끝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실오라기 같은 마력이 퍼져나갔다. 신전의 벽과 기둥을 타고 흐르며, 이 공간을 물들이듯 감싸기 시작했다. ​ “위대하신 그분이, 손수 내린 공간이셔.” ​ 메어리의 목소리는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천여울은 조용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초월한 공간. 참… 뭐랄까, 너희를 잡기 위한 덫으로는, 여러모로 아깝지?” ​ 콧소리를 섞어 비웃듯 속삭였다. ​ 악신의 권능이 담긴 이 공간에서. 사도는 불사(不死)다. 쓰러질 지언정, 결코 죽지는 않는다. 메어리는 그분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몰랐다. ​ 이제, 그분이 내린 임무를 수행할 차례였다. ​ 그녀가 손짓하자, 천여울의 주변에서 붉은 사슬이 다시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바닥에서, 허공에서, 어디에서든 끊임없이 뻗어 나온다. ​ 신전이 붉게 물들었다. ​ “잘 가.” ​ 메어리가 손끝을 살짝 튕기며 속삭였다. 붉은 사슬이 일제히 튕겨 올라, 천여울을 삼키려 들었다. ​ 그러나. ​ 천여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 그녀는 무심하게 고개를 떨궜다. ​ 그리고. ​ “아하… 아하하하!” ​ 천여울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메어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신이 내린 순수한 힘?” ​ 천여울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너희 신, 확실히 감은 좋네. 눈치챌까 했는데…. 결국 챘구나.” “그런데….” ​ 그녀가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네.” ​ “뭐?” ​ 그제야 메어리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붉은 사슬. 그녀가 직접 지배하는 신의 속박. 끊임없이 눈앞의 여성을 구속해야 했을 그것이, 천여울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천여울이 발을 딛는 곳마다, 붉은 사슬들이 피하듯 물러났다. ​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둔 최선의 수였겠지.” “그런데.” ​ 천여울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신전의 공기가, 일순간 뒤틀린다. ​ “그건, 악수(惡手)였어.” ​ 그리고. ​ 천여울의 눈앞에 작은 균열이 열렸다. ​ -짹짹. ​ 그 틈속에서ㅡ 하얀 깃털이 흩날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 천여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 “응, 오랜만이야 백령(白翎). 나도 보고 싶었어.” ​ 새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쪼았다. 마치 오래된 인연을 확인하듯. 그녀 또한, 손에 앉은 새에게 가볍게 입맞춤했다. ​ 짹짹거리던 새는, 이내 빛의 형상이 되어 그녀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 메어리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왜 그분이, 이 인간을 반드시 제거하라 했는지. ​ 그녀의 내부에서,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메어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 천여울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 -쿵! ​ 그녀가 발을 딛는 순간, 신전을 감싸던 붉은 사슬이 타들어 간다. 마치, 편린(片鱗)의 힘을 받아들인 것처럼. ​ 그 때. 천여울의 뒤편에서 거대한 신전이 떠올랐다. 공간의 법칙이 재편성된다. ​ 공간의 주인은, 더 이상 메어리도, 위대하신 그 분도 아니었다. ​ “성전(聖殿)이 열렸습니다.” ​ 천여울이 담담하게 선언했다. 일전의 모라스와의 결전에서 펼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성전(聖殿). ​ 이 공간은, 시공간을 초월한 신의 영역. ​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악수(惡手)였다. ​ 신이 내린 이 공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 회귀 전. ​ 전장의 성녀(聖女)로 이명을 떨쳤던. 당시의 천여울을ㅡ ​ 재림하게 했다. ​ “너희 신은. 틀렸어.” ​ 천여울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양손에 법진이 그려졌다. 왼손에는 성법(聖法). 빛이 깃든, 신성한 각인. 성녀의 권능을 담은, 순수한 힘. ​ 오른손에는 마법(魔法). 차갑고 정교한 마력의 흐름. 숙련된 마법사만이 구현할 수 있는 정밀한 조율. ​ 빛과 어둠. 질서와 혼돈. 성(聖)과 마(魔)의 조화. ​ 그것은 훗날 천여울만이 개척할 고유의 경지(境地)였다. ​ 천여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참고로.” ​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 “난 너한테 져본 적이 없어.” ​ 그 순간. ​ 공간이 빛으로 물들었다. ​ -콰아아아아앙-!! ​ 사도(使徒)와 성녀(聖女)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