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 -턱. ​ 몸이 무너진다. ​ 공중에서 떨어지는 정해인의 몸을, 알데바란은 무심히 앞발을 뻗어 받아냈다.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듯, 축 늘어진 그의 몸에서 잔열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보던 알데바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어깨. ​ 단단했던 외피가 깨져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다. 잔뜩 난자된 상처의 자국이 그의 어깨를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 -흠…. ​ 알데바란은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에는 방향성이 나쁘지 않았다. 살짝 기대한 부분도 있었지만, 결국 이번에도 실패라 여겼다. ​ 그렇게 생각하며, 돌려보내려 했다. ​ 그런데 막판에 기세가 달라졌다. ​ 단순한 분투나, 회광반조라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달랐다. 마치,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는 듯한…. ​ 알데바란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멀리, 심상 세계 외부. 정해인의 곁에 작은 인간 하나가 웅크리고 있다. 흑발의 소녀. 그녀는 정해인의 몸을 꽉 끌어안고 있었지만, 알데바란이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 그것은 그로서도 경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 ​ 알데바란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이 정도면, 과연 그들에게 통할 것인가. 아슬아슬한 선이다. 불가능할 거라 단언할 수도 없고, 확실히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 다만, 이번에는 녀석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에게 지속적으로 흘러들어오는 검은 불꽃이 그 방증이리라. ​ 알데바란은 흐릿하게 웃었다. ​ -좋다. ​ 원래였다면, 절대 시련의 통과로 인정해주지 않으려 했으나. ​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바닥에 놓여 있던 카타스트로피가 염동력에 의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 그리고. ​ 알데바란의 발톱 두 개가 창에 닿았다. 금속이 맞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창대에 울림이 퍼졌다. ​ 카타스트로피의 기운이 강하게 요동쳤다. 흑요석으로 만들어져있던 창신에, 붉은색의 음각이 새겨진다. ​ 이것으로. 시련은 통과다. ​ 이후의 일은 녀석에게 달려있다. ​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길은, 열려 있는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이 이끌어준 길인가. ​ 알데바란은 조용히 정해인이 남긴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 ​ ​ ​ *** ​ ​ ​ ​ “어우 씨.” ​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외피를 깨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 그런데… 그 이후가 기억이 안 난다. ​ ‘설마, 실패했나?’ ​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다, 곧바로 시선을 돌려 카타스트로피를 확인했다. ​ 그곳에는 변해버린 창이 있었다. 검은빛의 단조로운 외관에, 표면을 타고 흐르는 붉은 음각이 추가됐다.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미세한 빛을 품은 채 서서히 박동하는 듯한 느낌. ​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창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 ‘됐구나.’ ​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2차 시련, 통과했다. 이제 나는 녀석의 힘을, 조금이나마 빌릴 수 있다. ​ 아직 시련은 많이 남았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 “일어… 났어?” ​ 낮고 나른한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렸다. ​ 시온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그녀는 내 곁에서 잠든 듯했다. 아마도 내가 깨어날 때까지 호법을 서다가, 그만 스르르 잠에 빠져든 모양. ​ 나는 무심히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 쪽으로 내려앉은 머리칼을 정리했다. 잔열이 남아있는 이마. ​ 시온은 멍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성공했어.” ​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과 동시에, 몸을 타고 흐르는 힘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졌다. ​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 *** ​ ​ ​ ​ 황금 같은 주말. ​ 그러나 강아린은 도심을 가로질러 아르카디아의 신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준비할 것이 많았기에 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번이 가장 중요한 고비라고 판단했었으니까. ​ 수행비서를 대동해, 편하게 차를 타고 갈 수도 있었으나.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사에 의해 기록되는 편이었다. ​ 따라서, 아르카디아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그녀는 직접 걸어서 신전의 정문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강아린이 걸으면, 거리가 잠시 정적에 휩싸인다. 검은 빛이 감도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 찰랑이며 반짝였다. ​ 멀리서 보고 있던 이들이 속삭인다. ​ “강아린아니야?” “예쁘다….” “교단에는 무슨 일이지?” ​ 그녀는 이미 스타였다. 사업가이자, 예비 영웅이며, 재능까지 갖춘 인물. 그녀가 어디를 가든, 눈길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 강아린이 들어서자,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던 사제 한 명이 황급히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 “강아린님!!” ​ 익숙한 얼굴의 사제다. 아마, 천여울 라인. 따라서 강아린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 “안녕하세요~ 성녀님과 약속이 있어서 왔어요.” ​ 사제는 눈을 깜빡이며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어쩐지 난감한 표정. ​ “앗! 네네, 그런데… 지금 성녀님께서 여신님께 오후 기도를 드리고 계셔서,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곧 끝날 예정이에요!” ​ 그녀는 속에서 올라오는 웃음을 꾹 눌렀다. ​ 걔가 기도를? 대체 누구한테? ​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웅장한 돔 형태의 구조물 한가운데, 거대한 여신의 조각상이 공중에 떠 있었다. ​ 신전의 중심을 지키는 성스러운 존재. ​ 모르긴 몰라도, 기도의 대상이 아마 저 동상은 아닐 것이다. ​ 강아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괜찮아요, 그냥 여기 앉아서 기다릴게요.” ​ 강아린은 자연스럽게 신전 한편에 마련된 소파로 향했다. 가죽으로 덮인 소파는 부드러웠고, 신전 내부의 은은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 그녀는 다리를 꼬며 여유롭게 기대앉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 저 멀리서, 천여울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흰색 예복이 사뿐히 흔들리며 움직인다. 은은한 조명이 그녀의 몸을 따라 흘러내렸다. ​ 잘록한 허리를 지나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 골반은 깊고 풍만하게 떨어져, 옷 너머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성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시선을 사로잡는 관능적인 실루엣. ​ ‘… 짜증나네.’ ​ 저 거대한 무언가를 보면 기분이 상한다. 객관적으로 그녀 또한 뛰어난 몸매를 가졌지만, 천여울은 또 다르다. 뭐랄까… 그녀가 탄탄하다면 천여울은 부드럽고 유연했다, 말랑말랑한 느낌이랄까. ​ 그가 무엇을 좋아할지 몰랐기에, 그냥 순수하게 짜증이 밀려왔다. ​ “많이 기다리셨죠?” ​ 천여울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매끄럽고 완벽한 외교적 대응이었다. ​ 그런데 뭐지, 이 속에서 뭔가가 올라오는 듯한 기분은. ​ 하지만, 그녀는 프로였다. ​ “아니에요~ 신전 내부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 천여울과 강아린이 자연스럽게 응접실로 향하려는 순간. 반대편 기도실에서 요한이 걸어 나왔다. ​ 그 순간. 요한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강아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아주 잠시였지만, 찌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녀에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요한이 강아린을 마주치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다. ​ 요한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듯했다. ​ 그러나 강아린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애초에 그녀는 그를 인간 이하의 언저리로 여기고 있었고, 그것은 천여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 없이, 요한을 스쳐 지나갔다. ​ 그러나 그때. ​ 요한의 라인으로 여겨지는 주교가 기도실에서 나왔다. 그는 순간 강아린을 발견하고, 표정을 환히 밝히며 손을 내밀었다. ​ “하하하, 영광의 영애님을 여기서 뵙게 되다니. 반갑습니다! 저희 아르카디아와는 늘 좋은 관계를 유지….” ​ 외부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전혀 달랐다. 정확히는, 아르카디아 전체가 아닌 ‘천여울’의 세력만이 영광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 교단 전체가 영광에게 협력적이다? 웃기는 소리다. ​ 교주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수많은 시선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계산적인 행동이었다. ​ ‘강아린은, 분명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쓸 것이다.’ ​ 주교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가 악수를 받아들이고, 동맹을 과시할 차례였다. ​ 그러나, 강아린에게 외부의 평가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 그녀와 천여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 손을 무시한 채 응접실로 들어갔다. '더러워.' 저 역겨운 손을 만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으니까. ​ ​ ​ ​ ​ *** ​ ​ ​ ​ ​ ​ 조용한 응접실 내부, 둘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 ​ “그래서, 맹주 인원도 대기시킨다는 거지?” ​ 천여울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 “협회에 역제안했어.” 강아린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며 답했다. ​ “당황하긴 하던데, 인원 추가되는 게 나쁠 건 없으니까 조만간 받아들일 거야.” ​ 정해인은 정확히 팔라딘에만 도움을 요청했으나, 강아린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그날까지 남은 시간은 2주. 각자가 맡아야 할 역할이 있었다. ​ “글로리가 오는 거야?” ​ 천여울이 물었다. 글로리는 맹주의 1팀. 온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아니.” ​ 강아린이 짧게 잘라 말했다. ​ “길드장님이랑 미국 간다더라, 편린 시연한다고.” ​ 천여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웃으며 물었다. ​ “네가 쓸 거?” ​ 세계에 정확히 4개만 있는 그 편린. ​ 하나는 정해인에게 안정적으로 안착했고, 나머지 3개는 그녀들에게 돌아갈 몫이었다. 그중 하나는, 펜타곤 지하에 박혀있었으나, 최근 미국이 편린의 사용법을 발견했는지 이를 시연하겠답시고 전 세계의 유력 인사들을 초청했다. ​ “실패하겠지만.” ​ 강아린은 코웃음을 쳤다. 천여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침묵. ​ “후….” ​ 앞둔 결전은. 난이도가 요철처럼 튀어나와 있다. ​강아린은 이것만 해결된다면 당분간은 평화롭다 여겼다. ​ 그러니,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이 분기점은 사랑해 마지않는 그에게도, 가장 중요한 고비가 될 터였다. ​ 그녀는 손끝으로 찻잔을 굴렸다. 서늘한 차향이 공간을 감쌌다. ​ “잘, 해보자.” ​ “응.” ​ 이번만큼은, 그녀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 결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