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이 창을 붙잡자 눈을 감고 스르르, 몸이 무너졌다. ​ -턱. ​ 시온은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를 받아냈다. 그녀의 품으로 쓰러져 온전히 기대온 남자의 온기가 팔을 타고 전해졌다. ​ “….” ​ 시온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완전히 힘이 빠진 채, 따뜻한 체온을 남기며 무방비하게 쓰러진 정해인. 천천히 오르내리는 가슴과 조용한 숨소리. ​ 그녀는 자신이 벗어 둔 외투 위로 조심스럽게 그를 눕혔다. 이마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렸다. ​ “… 귀여워.” ​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고 맡기다니. 시온은 조용히,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이 둥실 떠오르는 기분. ​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크리스마스 선물상자를 뜯기 직전의 심정이랄까. ​ 훈련장 문 앞으로 다가갔다. 벽면에 부착된 장치를 바라보며, 손을 천천히 올렸다. ​ 손끝에 힘을 주어, 버튼을 눌렀다. ​ -쿵! 쿵! ​ 묵직한 진동과 함께, 훈련장을 통하는 출입문이 거칠게 닫혔다. ​ 이어서 철제 셔터가 천천히 내려왔다. 제어실과 연결된 유리창이 완전히 차단되며, 바깥과의 시야가 단절됐다. ​ 할아버지나, 다른 대원들이 폐관 수련을 할 때 사용하는 장치다. ​ 이제, 이곳은 완전히 외부와 격리됐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다. ​ 시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총총거리며 정해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펼쳐둔 외투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 가온에 입학한 지 한 달. 그동안 시온의 마음속의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다. 어떤 미친 여자가 반의 배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탓에, 그녀는 정해인과 따로 떨어진 반에서 생활해야 했다. ​ 원래라면. 이곳에서 지낼 때처럼, 해인과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루가 다르게 점점 메말라감을 느꼈다. ​ “…히히.” ​ 기운을 보충할 때가 됐다. ​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정해인의 곁에 몸을 눕혔다. 그의 옆자리, 시온의 자리는 항상 이곳이었다. ​ 부드럽게 몸을 기댔다. 살갗이 맞닿는 순간, 따뜻한 체온이 스며들어왔다. ​ 시온은 손을 살며시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하다.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무방비한 순간. ​ 천천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시온의 눈동자가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코끝을 그의 목덜미에 부딪혔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그만의 향기. 머릿속이 몽롱해지는 기분. ​ 부족해. ​ 단순히 향을 맡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밀착했다. 그의 피부가 닿는 곳마다, 미묘하게 열이 오른다. 시온은 머릿속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 그녀의 다리가 조용히 움직여, 자연스럽게 그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한 손은 정해인의 가슴 위로 향했고. ​ 다른 한 손은 천천히, 시온 본인의 가슴, 그리고 배를 스치며, 더 아래로 흘러내렸다. 도달하기 직전, 그녀의 심장 박동이 미묘하게 빨라졌다. ​ 그러나. ​ 손끝이 미묘하게 주저한다. 결국 그녀는 미끄러지듯 방향을 틀었다. 유혹적인 열기에서 살짝 벗어나듯, 그의 뜨거운 체온을 따라 조용히 이동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감쌌다. ​ 그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은은하게 피어오른 불길은 살며시 해인의 몸을 타고 흐르며, 그의 무기를 감쌌다. 따뜻하면서도 이질적인, 그러나 절대 해롭지 않은 불꽃. ​이것으로, 그의 시련은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 “…읏.” ​ 살짝 열린 입술 사이로, 조용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체온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넘쳐흐르는 충족감. ​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 한 달 동안 참아왔던, 메말라 가던 감각이 점점 채워진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 순간만큼은. ​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 ​ ​ ​ ​ *** ​ ​ ​ ​ ​ ​ 눈을 떴다. ​ 습기가 가득 찬 거대한 동굴. 한번 와본 적 있는 곳이다. ​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였다. ​ -쿵…. ​ 어디선가 깊은 울림이 전해졌다. 시야가 서서히 어둠에 적응하며, 나는 눈앞에 앉아 있는 거대한 형체를 마주했다. 공기가 그 형체에 짓눌렸다. ​ 나는 시야를 천천히 위로 올렸다. 그것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저 왔습니다.” ​ 나는 몸을 바로 세우며, 입을 열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짓눌리는 듯한 감각. ​ 그 순간. ​ -캉! ​ 바닥에 창이 꽂혔다. 나는 고개를 살짝 꺾어 날아오는 카타스트로피를 피했다. ​ “어째, 생각은 좀 달라지셨어요?” ​ 나는 웃으며 눈앞의 거대한 용에게 말을 건넸다. ​ 카타스트로피의 힘을 끌어내기 위한 시련. 그 시련 중 첫 번째 정신은, 일전에 통과했었다. ​ 그러나, 두 번째 시련은… 실패했다. ​ “그냥 빌려주실 생각은 없으신가?” ​ -어림없는 소리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련의 내용은. 알데바란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으니까. ​ 그 몸을 감싼 외피는 단순한 방어막이 아니라, 방벽이라 불릴 만한 것이다. 과거 수많은 영웅이 무력을 퍼부어도, 한 점의 균열조차 남기지 못했었다. ​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 존재를 완전히 죽일 수 있었던 자는 없다. ​ 지난번, 나는 몇 번이고 녀석을 상대로 창을 휘둘렀다. 물론 과거 문명종결수 시절보다는 약해졌지만, 내 모든 공격은 튕겨 나갔다. ​ 그렇게 나는 녀석이 지배하는 내면세계에서 무참히 쫓겨났었다. ​ 추방당한 이유, 나는 계속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녀석의 외피를 뚫을 수 있을까. ​ ​ ==== [권능: 조화의 편린(片鱗)] ①파사현정(破邪顯正) ㅡ 사한 것을 부수어라. ② ??? ​ ③ ??? ==== ​ ​ 파사현정(破邪顯正). ​ 이 능력의 본질은 사한 것, 즉 사악한 것을 무너뜨리는 것.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알데바란 또한 고룡이긴 하나, 결국 본질을 따지면 마물(魔物). 즉. 곧 사한 존재가 아닌가? ​ 나는 앞에 박혀 있는 창을 단단히 쥐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묵직한 금속의 감각. ​ 천천히 힘을 주어, 박혀 있던 창을 강하게 뽑아 올렸다. ​ 손을 들어 올린다. 눈을 감았다. 내면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힘을 끌어올린다. ​ 멸마(滅魔)의 기운. ​ 차가우면서도 이질적인 녹옥빛 마나가 용솟음쳤다. 그 기운이 창을 감싸며, 날카로운 파동이 휘몰아쳤다. ​ “갑니다.” ​ 나는 온 힘을 다해, 알데바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 -쾅! ​ 거대한 충돌음. 눈앞이 뒤틀렸다. ​ ​ ​ ​ *** ​ ​ ​ ​ ​ “아 씨발.” ​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등을 붙이고, 푸른색으로 빛나는 동굴 천장을 바라보았다. ​ 실패했다. 실마리는 잡았다. 방향성 자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 일전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아예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아니었으니까. ​ 그런데도, 결국 뚫지 못했다. ​ 알데바란의 외피는 여전히 견고했다. 창끝이 닿았음에도, 단 한 점의 금조차 내지 못했다. ​ ‘왜?’ ​ 막상 맞부딪히고 나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 절대적인, 출력이 부족하다. ​ 한 끗 차이. 2% 부족한 느낌. 통하긴 했다. 그러나 조금, 아주 조금 부족했을 뿐. ​ 어쩌겠는가, 훈련 부족이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단단히 창을 움켜쥐었다. ​ “후….” ​ 파사현정을 다시 끌어올린 순간. ​ 그때. ​ 어디선가 또 다른 기운이 몸을 타고 전해졌다. 검은 불꽃이었다. ​ 그 불꽃은 살아 있는 듯 피어올라, 거센 파도처럼 출렁이며, 녹옥빛 마나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 녹옥빛의 마나와 검은 불꽃이 하나로 엉켜 든다. 검은 불꽃은 순종적으로 다가왔다. 녹옥색 마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 그리고, 두 개의 힘이 완전히 하나로 합쳐졌다. ​ 창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중압감. ​ -우우웅…. ​ 두 개의 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마침내 새로운 파도를 만들어냈다. 검은 불꽃과 녹옥빛 마나가 서로를 감싸며, 거대한 기류를 형성한다. ​ 나는 그 창을 움켜쥐었다. 손끝에서부터 퍼지는 묵직한 중압감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 -호오…. ​ 알데바란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좁혔다. 그 짙은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았다. ​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 “진짜 갑니다.” ​ 발에 힘을 주어, 공중으로 솟구쳤다. ​ 내가 가진 기술 중 가장 강한 기술. ​ ‘카테나치오.’ ​ 그러나. 카테나치오는 만들어낸 분신들이 각기 근접 부위를 공격하는 기술. 이 방식으로는, 알데바란의 외피를 뚫을 수 없다. 공격이 분산되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 내가 필요한 건. ​ ‘일점사(一点射).’ 단 한 곳을 파고드는 강한 일격이었다. ​ 나는 공중에서 여러 개의 분신을 직조했다. ​ 분신들이 창을 들고 나타난다. 검은 불꽃과 녹옥빛 마나가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 분신들은 모두 창을 들고, 알데바란을 겨눴다. ​ 하지만, 이대로는 부족하다. 한곳. ​ 한곳을 찔러야 한다. ​ 나는 공중에서, 모든 분신들을 하나로 모았다. 분신들이 내 뒤로 늘어서며 완벽한 일렬로 정렬된다. ​ 그 순간. 모든 분신들의 힘이 하나로 압축됐다. ​ 여러 개의 창이, 하나의 거대한 창으로 융합된다. ​ ‘팔랑크스(Φάλαγγα).’ ​ 공중에 떠오른, 거대한 창. 녹옥빛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검은 불꽃이 거친 파도를 만들어낸다. ​ 이 창은 단 하나의 목표를 부수기 위해 존재한다. ​ 나는. 그대로 내려찍었다. ​ -콰아아앙!!! ​ 창끝이 외피와 부딪혔다. 순간, 거대한 금속음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 공격의 반동이 손끝에서 팔을 타고 전신을 관통했다. 엄청난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다. ​ -쩌적…. ​ “!” ​ 금이 가기 시작했다. ​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멈출 수 없다. ​ 창을 들어 올렸다. 극(戟)이 날을 세우며, 검은 불꽃과 녹옥빛 마나가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그대로 몇 번이고 내려 찍었다. ​ -쾅! -쾅! -쾅! ​ 충격의 반동이 팔을 타고 올라와 뼈마디를 저릿하게 울린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 “제발!!” ​ -콰아앙! ​ 마지막 일격이 가해진 순간, 동굴 전체가 울릴 정도로 압도적인 폭음이 터져 나왔다. ​ 금이 갔다. ​ 아니. ​ 뚫렸다. 외피의 중심에 균열이 퍼지더니, 마침내. ​ -으적. ​ 거대한 틈이 벌어졌다. 단단했던 방벽이 부서지고, 알데바란의 몸에 선명한 상처가 새겨졌다. ​ 두 번쨰 시련. 놈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 것. ​ 나는 박살이 난 외피를 확인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 “성공….” ​ 방금의 공격에 온 힘을 쥐어짰던 나는, 그 순간 힘이 풀려. ​ 그대로. 공중에서 추락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