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꺼진 동아리 방. 책상 위에는 바둑판과 동아리장이 나가며 남긴 방 열쇠가 놓여 있었다. ​ 창문을 통해 달빛이 희미하게 스며든다. 어둠 속에서 책상과 바둑판만이 은은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벽시계가 조용히 시각을 알렸다. 시간은 이미 밤을 향해 있었다. ​ 윤채하는 턱을 괴고, 반쯤 감긴 눈으로 바둑판을 바라봤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 몇 시간을 꼬박 들여 복기했다. 처음에는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진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 마법사에게 있어 집중력은 필수적인 요소.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바둑을 많이 두었다. 그리고, 마법에 조예가 깊은 그녀는 당연히 바둑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었다. ​ 그런데, 졌다. ​ 10판 전부. ​ “흐응….” ​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 처음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녀에게 있어 패배란, 익숙한 감정이 아니었으니까. ​ 그러나, 두면 둘수록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그의 수를 따라가는 만큼, 그는 더욱 빠르게 달아나며 성장했다. 그 성장 곡선의 각도는, 마치 바둑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가팔랐다. ​ 그리고 10판째. 어느 순간, 그의 수가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됐다. 더 이상 그는 그녀가 재단할 수 있는 실력자가 아니게 되었다. ​ “… 이게 가능해?” ​ 속삭이듯 새어 나온 말. ​ 문득 깨달았다. ​ 재능. ​ 늘 마주 당하는 존재였던 윤채하. 그녀는 처음으로, 압도적인 재능을 마주했다. ​ ​ ​ ​ ​ *** ​ ​ ​ ​ ​ ​ 주말이 되었다. 나는 뱅퀴셔 본부로 향했다. ​ 오늘은 결판을 봐야 하는 날이다. ​ 우선, 영감에게 곧 있을 작전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아야 했다. 팔라딘의 협조도 구했겠다, 몰래 숨어드는 것보다는 정식으로 뱅퀴셔에 합류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 그리고, 내 등에서 잠자고 있는 카타스트로피. 그 안에 깃든, 무식하게 강한 용과도 담판을 지어야 했다. ​ 익숙한 복도를 지나 영감의 서재 문을 열었다. 책장 사이로 들어서자,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창가 쪽에서는 영감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 나는 문턱을 넘어가며, 망설임 없이 말했다. ​ “저도 끼워주십쇼.” ​ 커피를 따르던 영감이 손을 멈췄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치 미친놈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 뭘 껴줘?” ​ “있잖습니까, 2주 뒤에 하는 임무.” 어느새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영감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 없이 각설탕 두 개를 연거푸 커피에 던져 넣었다. 설탕이 녹아들어 가는 커피잔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서 씁쓸한 커피 맛을 음미하듯,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네가 그걸 어떻게….” ​ “어쩌다 보니 봤습니다.” ​ 협회가 맡긴 의뢰. 함경도의 마인 군락 제거. ​ 명목상, 그렇게 위험한 임무는 아니었다. 돌발 상황에 대비해 협회가 요청한 인원이 많아진 것뿐이었으니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 나도 내심 속으로 그러길 바라고는 있다. ​ 영감은 깊은 침묵 속에서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나는 영감의 침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 마인에게 살해당한 그의 딸과 그리고, 그의 가장 아끼던 대원. ​ 영감이 손끝으로 커피잔을 가만히 돌렸다. 나는 그 생각의 틈을 비집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 "걱정하시는 건 압니다." ​ 영감이 눈을 가늘게 떴다. ​ "하지만, 저도 슬슬 실전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비 뱅퀴셔’로서….“ ​ 그 순간, 영감의 손끝이 멈칫했다. 그는 곧장 표정을 관리했지만, 순간적으로 반응이 새어 나오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 이날을 위해 참아왔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뱅퀴셔에 들어가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 영감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 "… 그게 아니다, 이놈아." ​ "네?" ​ "시온이 먼저 왔다 갔다." ​ “누구요?” ​ 시온이? ​ “네 녀석이 말한 그 임무, 시온이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참여하겠다고 하더라.” ​ 나는 무심코 눈썹을 찌푸렸다. ​ “그걸 허락하셨어요?” ​ 내 질문에 영감은 ‘너도 허락해달라며?’ 라고 묻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안 할 수가 있나. 몇 날 며칠을 괴롭히는데, 내가 버틸 리 없지.” ​ 나는 영감을 괴롭히는 시온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 듯해, 입꼬리를 올렸다. 시온의 성격상, 마음먹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 “그래서 너를 막을 명분이 없다, 명분이.” ​ 영감은 묵묵히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곤, 다시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 잠시 침묵. 그리고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 “알아서 해라.” “대신, 어디까지나 지원이다. 전선에는 나서지 말도록.” ​ “감사합니다!” ​ 허락이었다. ​ 지원대기, 그 정도면 충분했다. ​ ​ ​ ​ *** ​ ​ ​ ​ ​ 가온의 훈련장도 충분히 뛰어나다. 최첨단 기구와 엄선된 훈련 프로그램, 수준급 교관들이 상주하며, 영웅을 양성하는 시설로는 손색이 없었다. ​ 하지만, 뱅퀴셔의 훈련장은 세계 최고였다. ​ 훈련 기구, 전투 시뮬레이션 시스템 하나하나까지 직접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 물론 귀찮아서 가온에서 훈련하는 거로 퉁칠 때도 있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찾아왔다. ​ -팡! ​ 훈련장 내부에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던 모양. ​ 그곳에는 시온이 있었다. 활을 쥔 채, 고요하게 표적을 바라보는 그녀. ​ 그녀가 활시위를 강하게 당기는 순간ㅡ ​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 공기를 잡아먹을 듯 타오르는 불꽃이 일렁였다. 평범한 마력이 아니었다. ​ ‘오?’ ​ 일체지각으로 바라본 그녀의 불꽃은, 미약하지만 항마(抗魔)의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시온의 성취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 -우우웅. ​ “어?” ​ 그때, 등에 메단 카타스트로피가 진동했다. 마치 저 기운에 공명하는 듯. ​ 그러나. ​ “흐….” ​ 그녀는 이내 활을 내려놓으며 숨을 푹 내쉬었다. 활을 정리하고, 장비를 정리했다. 훈련이 끝난 듯했다. ​ “게으름쟁이가 웬일이래?” ​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시온은 뛰어나고 재능이 넘쳤지만, 무를 갈고닦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방금 본 광경은 꽤 희귀하다 볼 수 있었다. ​ 시온은 흠칫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 훈련을 마친 시온은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숨이 가빠져 가슴이 가볍게 오르내렸고, 땀에 젖은 옷이 살갗에 밀착되어 움직일 때마다 살짝씩 달라붙었다. ​ 목덜미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쇄골을 따라 흘러내려 사라졌다. 머리카락 끝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팔을 들어 이마를 닦을 때마다 미세하게 반짝였다. ​ “그냥… 오랜만에….” ​ 시온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활을 내려놓았다. 훈련을 마친 후의 시온은 평소보다 훨씬 붉어져 있었다. 몸을 많이 움직인 탓인지 얼굴이며 목덜미까지 열이 오른 상태였다. ​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마침 잘됐네. 시간 있어?” ​ “있지, 왜?” ​ “옆에 좀 있어 줄래?” ​ 시온은 붉어진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나는 등에 메던 창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 -우우우웅 ​ 카타스트로피가 낮은 진동을 내며 미세하게 떨렸다. 아까 시온의 검은 불꽃을 본 이후부터 계속 반응하고 있었다. ​ “얘가 살짝 위험한 녀석이라 혹시 또 쓰러지거나 하면….” ​ “아… 알았어.” ​ 말을 흐리자, 시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이 자리로 와 앉았다. ​ ‘후….’ ​ 나는 속으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아주 두근두근 뛴다. ​ 가능하면 미루고 싶었지만, 더 이상 미룰 곳이 없었다. 카타스트로피의 힘을 온전히, 아니 반이라도, 아니 반의반이라도 끌어내기 위해서는 알데바란의 협조가 필요했으니까. ​ 이제, 담판을 지을 차례다. ​ 나는 천천히, 창에 손을 얹었다. ​ -우우우우웅…! ​ 창의 진동이 더욱 거세졌다. 손끝에서부터 차갑고 거친 감촉이 올라왔다. ​ 그 순간. ​ - 크르르르르… ​ 짧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 나를 들여다보는, 짐승의 눈빛이 느껴졌다. 창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 ​ ​ ​ ​ ​ *** ​ ​ ​ ​ ​ ​ ​ 정해인이 방을 나서자 영감, 하태성은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잔 속의 검은 액체가 일렁였다. 커피 표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져 보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 그는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오래된, 낡은 액자 하나. 유리에는 희미한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 하태성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어, 조심스럽게 액자를 닦았다. 천천히. 또 천천히. ​ 사진 속에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여성이 서 있었다. 입가에는 따스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옆에 선 젊은 남성이 장난스레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 여성은 시온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남자는——강인한 인상을 가진 대원이었다. ​ 둘은, 한때 그가 가장 아꼈던 존재들이었다. ​ “….”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사진을 응시하는 동안, 기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날, 그들이, 자신이 가장 아꼈던 존재들이, 마인에게 살해당했던 날. ​ 그러나 사진 속 그녀는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시간이 흐르며, 시온은 점점 그녀를 닮아갔다. 그리고, 정해인은 묘하게 그때의 ‘그 녀석’과 비슷한 기운을 풍겼다. ​ 그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태성은 묵묵히 사진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버릇없는 녀석들.” ​ 손에 들린 커피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쓰디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 남아 있는 감정들을 씹어 삼키듯이, 혀끝에는 묵직한 쓴맛이 스쳤다. ​ 그는 한때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이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힘이 부족했고, 선택할 수 있는 길도 없었다. ​ 하지만. ​ 만약 그런 기회가 내게 다시 주어진다면. ​ 하태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뜰 때, 그의 시선은 더 깊고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