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방 한켠, 눈을 뜬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아침 운동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쌀쌀했던 공기는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서늘한 바람 속에 희미한 온기가 스며들어 있다. ​ 진정한 봄이었다. ​ 나는 천천히 몸을 풀며 산책로로 향했다. 멀리서, 유하나가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몸을 풀면서 걸어오길 잘했다. 나는 그녀가 거의 다 다가왔을 때쯤, 뛰기 시작했다. ​ 그리고 몇 분 뒤. ​ “하아….” ​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멈춰섰다. ​ “최고 기록인데?” ​ 유하나가 바짝 다가와 워치를 내밀었다. 땀에 젖은 부드러운 체취가 은은하게 스쳐 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에서 풍겨오는, 짙고 묘하게 감기는 향. ​ 본능적으로, 잠시 호흡이 멎었다. 워치를 바라보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흔들렸다. 유하나는 모르는 듯, 밝은 표정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 "봐봐, 확실히 빨라졌지?" ​ 나는 짧게 숨을 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 “그러게.” ​ 내가 아침 운동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꾸준히 하다 보면 반드시 늘었으니까. 우리는 짧게 숨을 고른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갈림길에 다다르자,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 ​ "이따 보자." ​ "응." ​ 유하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며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기숙사로 발길을 돌렸다. ​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쳤다. 뜨거운 물줄기가 피부를 따라 흘러내리며, 잠시나마 머릿속을 비워 주는 듯했다. 욕실에서 나온 나는 타월로 머리를 대충 털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습관처럼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워치를 확인했다. ​ 익숙한 루틴. 익숙한 아침.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의 시작이었다. 불과 어제, 그런 일을 겪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 그러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 나는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폈다. 손가락 끝에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지는 것을 확인하며, 작은 숨을 내뱉었다. ​ "후…." ​ 그제야, 떨림이 멈췄다. ​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문을 열고,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 강의실로 향하는 길. 지난 수업을 며칠간 빠지긴 했지만, 전부 합리적인 이유였다. 결석 처리가 될 일은 없었다. ​ 나는 교실의 뒷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구석 뒷자리로 향했다. 내 전용석. ​ 자리에 앉아 수업을 기다리자, 앞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요한이었다. ​ 일전에 대련에서 두들겨 팬 이후에 얼굴을 못 봤었는데. 오랜만이다. ​ ‘멀쩡하네.’ ​ 겉보기엔 그런데. ​ 저번에는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눈깔이 돌아버리는 바람에…. 그의 시선이 내쪽으로 잠깐 머물렀다. 그러다 급하게 몸을 돌려, 자신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나 또한 그곳에서 눈을 떼고,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 마인의 습격까지 3주. 교류전까지 한 달 남짓. 결국 나는 두 사건을 동시에 대비해야만 한다. ​ 물론 중요도를 따지면 전자의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만. ​ 학교 내부에서는 윤채하의 성장과 교류전에 대비하고, 외부에서는 마인의 습격에 대비한다. 내외로 최선을 다하면 어느정도 해결이 될 것도 같다. ​ 생각이 끝날 때쯤, 앞문으로 도한성 교관이 들어왔다. ​ “아….” ​ 그가 들어오자마자, 학생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 ‘왜 저러지?’ ​ 저번 시간에 과제라도 내줬나, 나는 의문에 빠진 채 앞을 쳐다봤다. ​ 앞에 서 있는 도한성, 그는 얄미운 미소를 띠고 강의실 왼쪽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를 바라봤다. 시계는 정확히 9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 시간을 확인한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여러분, 가온의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러자 학생들의 탄식이 더욱 깊어졌다. ​ “지난 수업 때 공지한 대로, 오늘은 중간시험 필기 성적 발표일입니다.” ​ 아, 뭔가 했네. 실기 시험은 기말과 합산 평가지만, 필기 성적은 별개다. 나 또한 워치를 켜 성적을 확인했다. ​ 가온은 잔인하게도, 성적 순위를 적나라하게 줄 세운다. 그리고 그 순위는 모두가 볼 수 있다. ​ 굳이 스크롤을 내릴 필요도 없었다. 내 이름은 위쪽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은가. ​[1위] 강아린 [2위] 정해인 ⋯ [6위] 요한 ⋯ [10위] 하시온 ⋯ [18위] 유하나 ⋯ [27위] 천여울 ​ 워치를 다급히 켜는 학생들 앞에서, 교관이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 "제가 담당하는 학생분들이 공부를 잘하는군요. 10등 안에만 세 분이나 계시고." ​ 학생들이 시선이 일제히 셋에게 향했다. ​ 그러나 나는 딴 곳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다. ​ “뭐?” ​ 내가 놀란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강아린, 나, 하시온 ,유하나, 전부 적절한 순위에 위치했다. ​ 그러나 천여울. ​ ‘27등이라고?’ ​ 그녀가 상위권인 것은… 솔직히, 믿기 어려운 수치였다. ​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찾았다. 멀리 앉아 있던 천여울이 나를 보며 브이를 했다. ​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마치 ‘잘했지?’ 라고 묻는 듯한 표정. ​ 나는 피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개인 과외를 진행하긴 했으나, 좋은 성적을 얻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걸로 될 거였으면 애초에 못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 나는 세부 점수표를 펼쳤다. 전반적으로 예상보다 높은 점수였지만, 상위권에 걸맞은 성적은 아니었다. 천여울은 술식 점수, 그러니까 성법식을 다루는 과목에서 유독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것 하나만으로 나머지 점수들을 전부 커버할 정도로. 그리고 그 과목이, 내가 직접 가르친 부분이었다. ​ ‘기특하네.’ ​ 나는 다시 한번 천여울을 바라봤다. 멀리서 내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눈웃음을 지었다. ​ 여러모로 요즘 기특한 짓만 골라 하는 것 같다. 팔라딘에 대한 의뢰를 덥석 수락한 것도 그렇고. 과외 좀 해줬더니, 혼자서 공부도 엄청나게 한 모양. 27등이라는 등수는 공부를 하지 않고 나올 수는 없었으니까. 노력의 흔적이 느껴졌다. ​ 강의실 내부는 등수를 확인한 학생들의 곡소리로 가득 찼다. ​ “여러분, 너무 상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도한성 교관이 유유히 말을 이었다. 특유의 메마른 표정. ​ “아직 10번은 더 봐야 하니까요. 다음에 만회하시면 됩니다.” ​ “…….” ​ 그는 위로랍시고 한 말이었겠지만, 앞으로 10번 이상 이 짓을 더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 학생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 나는 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9시 5분. ​ 필기 성적 발표가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 - 탁. ​ 교관이 책상을 두드렸다. ​ “그럼, 이제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 학생들의 탄식은 멈출 줄을 몰랐다. ​ ​ ​ ​ *** ​ ​ ​ ​ 점심 식사를 마쳤다. 답지 않게 평화로운 하루였다. 물론 머릿속은 전쟁이었지만. ​ 나는 복도에 서서, 벽에 붙여진 동아리 모집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아마, 정말로 이번 주까지가 마지막 모집기한일 것이다. 사실 진작 끝났는데 교류의 장으로 인해 넘어온 칼로스 학생들을 위해 기간이 연장됐다. 나도 가입해야 한다, 해야 한다, 해놓고 못 하고 지금까지 미뤄왔다. ​ ‘어디로 갈까….’ ​ 포스터에는 다양한 동아리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익숙한 이름들도 보인다. ​ 프런티어. ​ 이미 한 번 거절한 곳. 여기는 아니다. 아마 요한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 이번엔 윤채하와 같이 들어갈 동아리가 필요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후보를 떠올렸다. ​ 첫 번째, 마법 연구회. ​ “이건 좀….” ​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마법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굳이 따지면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연구’를 하고 싶어질 정도냐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아마 그건 윤채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연구보다는 그냥 직관적인 재미를 즐기는 스타일이니. ​ 이건 둘 다 오래 버티지 못할 곳이었다. 탈락. ​ 두 번째, 양궁 동아리. ​ 나쁘지는 않다. 마법사의 기초 소양인 집중력을 키워줄 게 분명했으니까. 나 또한 활을 사용할 줄 알았으니, 괜찮긴 한데…. ​ 아마 시온한테 많이 혼날 것 같다. 양궁 동아리 갈 거면 자기도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냐, 왜 혼자 가냐, 시작부터 끝까지 한참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 그리고 윤채하 또한 큰 관심을 가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보류. ​ 마지막 세 번째. 보드게임 동아리. ​ [렉시움] ​ 이 세계의 보드게임은 우리가 아는 그것과 다르다. 체스, 부루마블 같은 기본적인 보드게임도 있지만. 가젯을 펼치면 던전이 튀어나와 공략하는 게임 같은 것도 존재한다. 일종의 ‘인스턴트 던전’. ​ 비싸서 쉽게 체험할 수 없는 게임이지만, 여기는 가온이다. 학교의 동아리 지원비 정도면 충분히 감당 가능한 부분이다. ​ 윤채하도 흥미를 가질 것이다. 게다가 필드 체스나 인스턴트 던전으로 마법사의 기본 소양인 공간 감각까지 일깨워 줄 수 있다. 아마 이걸로 그녀의 승부욕을 자극하면… 꽤 좋은 성장 경험이 되지 않을까. ​ “이거네.” ​ 나는 포스터에 적힌 모집 담당자의 연락처를 확인해 메세지를 넣었다. ​ [정해인]: 안녕하세요, 1학년 정해인이라고 합니다. 동아리 가입 건으로 메시지 드렸습니다. 혹시 두 자리 정도 있을까요? ​ 한 자리는 나, 두 번째 자리는 윤채하. ​ 윤채하가 안 따라올 수도 있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순수한 호기심 하나로 아카데미도 넘어온 그녀다. 동아리 정도는 무조건 쫓아온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 나는 워치의 화면을 껐다. 이걸로 미뤄놨던 과제는 끝이 났다. 워낙 앞둔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피곤하긴 하다. 그래도 이 고비만 넘기면 기말고사까지는 평온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 그러니 이 고비를 넘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 넘길 수 있겠지. ​ 잊으려 해도,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한 시련속의 장면들은 깊숙이 남아, 각인처럼 나를 괴롭혔다. ​ 알데바란의 시련은 끝났지만, 나는 아직도 시련을 치르고 있었다. ​ 그때. ​ [『명경지수(明鏡止水)』가 정신을 일깨웁니다! ] ​ 머릿속의 파문이 잦아들었다. 흐려졌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한번 마음을 바로잡았다. ​ “후….” ​ 분명, 넘길 수 있을 것이다. ​ 아니, 넘겨야 한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