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네 명의 여성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방금 뭐라 했더라. ​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살짝 축축한 감촉. 기절한 사이 땀이 좀 났던 모양이다. 유하나가 옆에서 손수건을 들이밀었다. ​ “땡큐.” ​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간을 보니 그렇게 오랜 시간 기절한 것 같지는 않았다. 고급스러운 가구, 깔끔한 침대 시트, 그리고 벽에 걸린 대형 모니터. ​ ‘여기는….’ ​ 기억났다. 일전에 영약을 먹고 뻗었을 때 입원했던 곳이다. ​ 그때. ​ “해인아, 괜찮아…?” ​ 시온이 내게 물었다. 굉장히 걱정스러운 표정.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괜찮았다. 정신적으로는 다소 피로감이 남아 있었지만 견딜 만했다. 굴 파고 있어봤자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 “괜찮지. 별거 없어. 그냥 창이랑 얘기 좀 했는데….” ​ 나는 옆에 놓인 창을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내 담담한 반응을 보는 그녀들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어딘가 다 울적하고, 슬퍼 보이는 느낌. ​ 뭐지, 나 혹시 곧 죽나. 혹시 내가 모르는 병을 의사에게 들은 건가 싶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나 뭐 죽을병 걸렸….” ​ 그 순간. ​ “뭐야? 일어났어?” ​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 사과 바구니를 든 박광철이었다. 벌써 소식을 들었는지 날 보러 온 듯했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병실에 들어온 그는, 바구니를 들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 “멀쩡한데?” ​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구니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더니, 으적. 한 입 베어 물었다. ​ “… 웬 사과?” ​ 나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 “그냥 한 번 사와 봤는 데 별로 필요 없겠….” ​ 박광철의 시선이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그리고 곧, 정면에 서 있는 네 사람에게 닿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조용히 그녀들을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잠시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대뜸 조심스럽게 엄지를 내밀었다. ​ “이건 너네끼리 잘 먹어라~” ​ 그 말과 함께, 바구니를 내 머리맡 탁자에 툭 내려놓고 곧장 몸을 돌렸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가 병실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생각했다. ​ ‘뭔….’ ​ 그래도 멀쩡한 그의 얼굴을 보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잠시동안은 절망적인 상황의 얼굴만 봤었기 때문에…. ​ 얼추 정신도 차렸다. 슬슬 일어나는 게 좋아 보였다. ​ 내가 본 그것들. 진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대비는 해야 했으니까. ​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카타스트로피를 집어 들었다. ​ “…후.” ​ 혹시 몰라 긴장하며 집었지만, 다행히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나는 다시 잠시 창을 침대 옆에 기대어 놓고, 등을 돌렸다. ​ 그리고 뒤에 서 있는 그녀들에게 말했다. ​ “밥이나 먹자. 시간 괜찮아?” ​ 천여울과 유하나는 원래 옆에 있었으니 그렇다 치고, 시온과 강아린은 일부러 온 듯했다. 밥이라도 한 끼 사 먹이는 게 맞겠다 싶었다. ​ 강아린이 먼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이어 유하나, 시온, 천여울도 조용히 동의했다. ​ “오케이.” ​ 할 얘기도 있었고, 마침 잘됐다. ​ 그녀들은 가만히 서서,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잠깐 나가줄래? 금방 갈아입고 나갈게.” ​ 나는 입고있던 복장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직도 환자복 차림이었다. ​ “…….” ​ 그런데 그녀들은 미묘한 눈빛으로 서로를 힐끔거리며 어물쩍거렸다. 나는 잠시 그녀들의 반응을 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안 나갈 거야?” ​ 옷 좀 입자. ​ 내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그제야 문이 열리고 그녀들이 병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 *** ​ ​ ​ ​ 한적한 가게의 프라이빗 룸. 우린 식당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뭘 먹을까 고민할 겨를도 없이, 시온이 장어를 얘기했다. ​ 쓰러졌으니 보양식을 먹어야 한다며 넷 모두 강하게 주장했고. 나도 그냥 받아들였다. ​ -치이익. ​ “….” ​ 장어가 구워지는 소리만이 방을 가득 채웠다. 생각해보니, 이 조합으로 모인 건 처음이었다. 나야 그녀들과 각자 어느 정도 친해졌지만, 그녀들끼리는 아니었으니까. ​ 특히 시온은 같은 반도 아니니 더더욱. ​ 결국 자연스럽게 어색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 나는 고개를 들고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곳에 앉은 천여울은 자른 장어를 자꾸 내 접시로 옮기고 있었다. ​ “천여울.” ​ 부르자, 그녀는 살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어?” ​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 “교단의 팔라딘, 혹시 의뢰도 받아?” ​ 순간,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 알데바란의 시련. 그 속에서 나는 분명 보았다. 사도(使徒)가 셋이나 모인 장면을. ​ 사도 셋? ​ 중후반부 메인 스토리에서나 나올 법한 전력이었다. 솔직히 말해, 믿기지 않는다. 악신 입장에서도 사도는 전략 병기였으니까. ​ 어쨌든 그걸 본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 전력의 저울을 맞추는 것. ​ 만약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진다면, 뱅퀴셔 한 팀으로는 택도 없다. 다른 팀을 불러 힘의 균형을 최소한이라도 맞춰야 한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 협회의 지원이 오자 사도들은 급하게 퇴각했다. 다른 단체와의 마찰은 자제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견제할 세력이 많아지면 그들 또한 무리하게 전투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설령 사도가 오지 않는다 해도. ​ 그냥 처음부터 장소에 가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마 불가능에 가깝다. 단순히 스크립트 한 줄로 발생해, 본래 주인공의 행적과는 관련이 없었을 ‘뱅퀴셔의 전멸.’ ​ 지금 당장은 피할 수 있다고 해도, 훗날 알지 못하는 형태로 더욱 거대하게, 반드시 다시 찾아오게 될테니까. ​ 그러니 차라리, 예상되는 범위에서 최대한 준비하는 편이 낫다. 그게 알데바란의 시련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 나는 내 안일함을 인정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계획 속 허술한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 ‘충격요법이네.’ ​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얻어가는 것이 있다면 의미가 있다. 스토리는 길고, 고비는 아직 한참 남았다. ​ “네 의뢰는 받지.” ​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팔라딘의 도움이 필요했다. ​ 그들은 신성한 기운을 기반으로 한 공격을 주로 사용한다. 사도에게 대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력 중 하나다. ​ 나는 천여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그래? 그럼 의뢰 하나 넣을게.” ​ 교단의 핵심 세력인 팔라딘은 외부의 의뢰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지시에는 예외가 존재한다. ​ 팔라딘이 충성을 맹세하는 존재. ​ 성녀(聖女). ​ 지금껏 그녀와, 또 교단과 쌓아왔던 관계의 빛을 볼 차례였다. ​ 천여울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내용은?” ​ 나는 테이블 위를 한 번 쓸어본 후, 대답했다. ​ “사도.” ​ 그 순간, 테이블 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 “사도가 출현한 것 같아.” ​ 사도가 나타날 것이다. ​ 아마 누가 듣더라도 쉽게 믿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전대 용사에 의해 악신이 봉인된 이후, 사도들은 대거 소멸하거나 깊은 잠에 빠졌고,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 또한 철저히 모습을 감추었으니까. 따라서 현시대 대부분의 영웅들은 사도의 존재를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악랄함과 강함은 역사의 기록으로 본 것이 전부. ​ 최근 벌어진 상하이 마인 습격— 그것이 몇 십 년 만에 발생한 사도의 공식적인 습격이었다. 처음 습격이 보고되었을 때, 중국 영웅 협회는 별다른 경고 없이 A급 영웅 다수를 급파했다. 과거의 기록은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사도가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협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그리고, 단 몇 시간 만에 연락이 끊겼다. 결과는 전멸. ​ 그만큼 사도란 존재는 전설 속 괴물처럼 여겨지는 수준이었다. ​ 나는 천여울의 반응을 살폈다. ​ 그녀가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팔라딘이 근처에서 대기만 해준다면, 사도가 나타났을 때 함께 싸울 수 있었으니까. ​ 만약 사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 그저 기쁜 일이었다. 피를 보지 않을 최상의 결과. 물론 나 혼자서 헛소리를 한 것으로 몰릴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교단과의 불신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다. ​ ‘상관없어.’ ​ 내 명예나, 위신 같은 것들은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다. 목표는 단 하나. ​ ‘최악에 대비하는 것.’ ​ 그걸 하지 않았던 미래를 본 나로서는,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 “못 믿어도 괜찮아.” ​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 “비용은 지불할 테니까 대기만이라도….” ​ 그러나. 천여울은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내 앞에 성큼 얼굴을 들이민 그녀가, 내 두 손을 꽉 잡았다. ​ 그녀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 “믿어.” ​ 작지만 단단한 목소리. 내 시선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 푸른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맑았다. ​ 나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 “어.” ​ 결국,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 ​ ​ ​ *** ​ ​ ​ ​ ​ ​ 세상과 단절된 거대한 공동. ​ 어둡고, 차갑다. ​ 흑색 무복을 걸친 남성의 눈앞에 펼쳐진 천체(天體)는 언제나처럼 어두운 빛을 띄고 있었다. ​ “…!” ​ 천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그 틈새로부터— 희미하지만, 확실한 성운(星雲)이 피어올랐다. 휘몰아치는 잔광이 우주의 장막을 찢어내듯 터져 나온다. ​ “… 하하하하하.” ​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방향이 틀어막혀 있던 공간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길이 열렸다. ​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단 하나. ​ 길이, 열렸다는 것. ​ -쿠우우우우웅. ​거대한 공동을 가로막던 석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쪽,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형체조차 불명확한 존재들이 기어 나왔다. 그것들은 일전의 것과는 달랐다. 더욱 거대하고, 더욱 많으며, 더욱 명확한 의지를 갖추고 있었다. ​남성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네가 나보다 낫다.” ​세계선이 또 한 번 바뀌었다. 그러나 그가 수많은 회귀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 흐름을 억지로 비틀어 결과를 바꿨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남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마인의 피로 잔뜩 물들은 창을 집어 들며, 날숨을 길게 내쉬었다. ​ “… 이번에는 좀 오래 걸리겠는데.” ​ 천체에서 희미한 빛이 그를 비추었다. 그 빛 아래, 남성의 얼굴과 몸은 전부 상처투성이였다. ​ 그러나 그에게는 후회할 여지도, 멈출 선택지도 없었다. ​ 이제, 세상의 억제력을ㅡ ​ 감당할 시간이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