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상은 만족스러웠다. 특히 나에게 있어서. ​ 협상장을 나온 내 손에는 간이로 만든 바우처가 쥐어져 있었다. 나중에 일본 측에서 대한민국 협회로 동백검을 보내오면, 교환할 수 있는 증표였다. ​ 며칠 안에 보내오겠다고 하더라. ​ 협상이 끝난 후 저쪽의 표정도 나쁘지는 않았다. ​ 너무 몰아붙이기만 했다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 숨 쉴 구멍은 열어둬야 하는 것이 협상의 기본이니까. 아예 국가 단위로 척질 필요도 없긴 하고. 물론 척져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 물론 핵심은 확실히 짚고 넘어갔다. 십자가는 절대 넘길 수 없다고 못 박으면서도, 본토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이아노의 추가적인 유적 정보를 제공했다. 세세한 설정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도 없긴 했다. 대충 홋카이도 근방이라고 했는데, 그 정도 힌트로도 저쪽은 충분히 만족한 것 같았다. ​ 줘도 괜찮은 건가 싶지만, 거긴 보상이 구리다. 어차피 갈 수도 없고. ​ “해인님…!” ​ 저 멀리서 김길규 씨가 나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 “네?” ​ “중국 쪽에서 급하게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아마 이아노의 무덤 때문인 것 같습니다. 거액의 보상을 제시했는데….” ​ 아무래도 저쪽 또한 냄새를 맡은 모양. 아직 최종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건 아니니,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래를 체결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협상 테이블을 새로 차리셔도—” ​ 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아… 중국이요…흐.” ​ 나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애초에 그쪽에 팔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 “안 팔죠. 절대.” ​ 감정이 안 좋은 쪽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었으니까. ​ ​ ​ *** ​ ​ ​ 기업 영광이 운영하는 도시 중심가의 최고급 호텔 카페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아래,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공간. 하지만 지금, 카페 한가운데에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 그곳에는 가온의 유명 생도들, 유하나와 천여울이 있었다. ​ 유하나는 길고 매끈한 다리를 꼬아 올리며 앉아 있었고, 그녀의 하늘빛 머리카락이 조명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천여울은 그와 대조적으로 차분하게 정리한 단발 머리칼과 단아한 복장으로, 성인(聖人)처럼 따스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 “언니…! 저 사인해주세요…!” ​ 유하나의 옆으로 몰려든 어린 팬이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 “좋아, 종이 줄래?” ​ 우아한 손길로 사인을 하며 팬을 응대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그림 같았다.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은 환상의 조합처럼 보였다. 아름다움과 기품으로 주위 사람들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으니까. ​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가까이서 들리는 대화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유하나는 테이블 위 찻잔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 “좋았어?” ​ 천여울은 차분히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 “응 너무.” ​ 천여울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흘러나왔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섞여 있었다. 유하나는 찻잔을 들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 “그래도 이번에는 잘했다고 할게, 그이를 존중하지만, 그 영약은….” ​ 유하나는 말을 이어가다 말고 이상한 낌새를 느껴 고개를 들었다. 천여울은 차 한 모금을 머금은 채, 아직도 여운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 그리고 아련하게 흐려진 눈빛. ​ “…뭐해?” ​ 유하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천여울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 “아.” ​ 천여울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은은한 미소는 유하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 “미안,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 유하나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 천여울은 그런 그녀를 신경 쓰지도 않는 듯, 손가락을 테이블 위에 톡톡 두드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약 기운을 돌려야 해서, 몸 구석구석 만져야 했거든…. 너도 알잖아.” “푹 안겨서 자는데… 얼마나 귀여웠는지 알아?” ​ 유하나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녀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천여울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듯,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며 말을 덧붙였다. ​ “내가 몸에 무슨 짓을 해도 세상 모를….” ​ “다행이다.” ​ 유하나는 결국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그 미소만큼은 유지하고 있었다. ​ “사람이 많아서.” ​ 천여울은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 “왜?” ​ “하마터면 정말 죽일 뻔했거든.” ​ 그녀의 말에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천여울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웃었다. ​ “분위기 잡기는.” ​ “조심하라고.” ​ 그런 와중, 이번에는 남자 꼬마 팬이 천여울에게 다가와 사인을 요청했다. 천여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가 내민 종이에 사인했다. ​ 꼬마는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살짝 뒤척이며 뭔가 말하고 싶은 듯했다. 작은 발은 바닥을 동동 구르고, 입술은 망설이는 기색으로 달싹거렸다. ​ “꼬마야, 하고 싶은 말 있어?” ​ 천여울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의 망설임을 풀어주려는 듯 물었다. ​ “성녀님 정말 요한 용사님이랑 사귀어요?” ​ “풉!” ​ 아이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천여울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 반면, 유하나는 입을 막으며 소리를 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 “아니, 절대 아니야. 응, 절대로.” ​ “그럼, 제가 커서 성녀님이랑 결혼할래요!” ​ 꼬마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 천여울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짓고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 “고마운데, 그건 안돼.” ​ 꼬마는 한순간에 풀이 죽은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 “임자 있는 몸이라, 미안해?” ​ ​ ​ ​ *** ​ ​ ​ ​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중세풍의 거대한 건물. 어울리지 않을 법한 외관이지만, 이 도시의 풍경 속에서는 의외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다. ​ ‘아르카디아 교단.’ ​ 나는 지금 그 교단의 신전 앞에 도착했다. ​ 어차피 휴가도 받은 김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십자가 유물까지 오늘 다 처분해버릴 생각이었다. ​ ‘대외비로 하실 수 있고, 공개로 하실 수도 있습니다.’ ​ 협회는 이번 던전 공략 성공에 대한 언론 공개 여부를 내게 물었었다. ​ 일단 비공개로 하겠다고 하기는 했다. 했는데…. ​ “지켜지겠어?” ​ 협회 내부에서도 정보를 팔아넘기며 소소한 부업을 즐기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 분들 덕분에 어차피 곧 밝혀질 것이다. ​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신전에 들어섰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깔끔하고 현대적이었다. 나는 카운터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사제에게 다가갔다. ​ “사제님.” ​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사제는 친절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 “아티팩트를 판매하려고 합니다.” ​ “아티…팩트요?” 그녀는 살짝 놀란 듯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서류를 뒤적이며 물었다. ​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 “정해인입니다.” ​ 내 이름을 듣는 순간, 멀리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급하게 뛰어나온 한 사제가 허둥지둥 다가왔다. ​ “아이고 말씀해주시고 오시지!” ​ “…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죠?” ​ “하하, 그런가요?” ​ 사제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긁적였다. ​ “접견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 사제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 “사실 천여울 님께서 저희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정해인 님이 오시면 정중히 모시라고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분에게 잘 말해주시면….”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걸 보아하니, 천여울은 벌써 교단 내부의 세력을 확실히 장악해가고 있는 듯했다. ​ 아르카디아 교단의 내부 세력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용사인 요한을 지지하는 층, 다른 하나는 성녀인 천여울을 지지하는 층. ​ 요한의 지지층은 전통과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이들로, 용사를 중심으로 여기는 꼰대들이 모여있다. ​ 그런 점에서, 천여울이 방금처럼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다지는 것은, 굉장히 잘하고 있는 행동이다. ​ 교단의 접견실은 보다 고급스러웠다. ​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거래를 담당하는 분이 곧 오실 겁니다.” ​ 사제가 퇴장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한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들어왔다. 그는 차분하게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정해인 님이시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거래를 담당하게 된 아르카디아 교단의 루크 주교입니다.” ​ 그의 태도는 조용하면서도 품위 있었다. 나는 대꾸 대신 가방에서 십자가를 꺼내 보였다. ​ “이걸 판매하려고 합니다.” ​ 내 손에 들린 십자가가 드러나자, 루크 사제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놀람과 경외가 동시에 스쳐 지나간 듯한 그의 표정은, 자신이 대면한 물건의 가치를 이미 짐작한 듯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십자가를 바라보며 숨을 고르더니, 낮게 물었다. ​ “제 부족한 식견으로 보건대, 범상치 않은 신성력이 느껴집니다. 혹시 이름을 알고 계신다면….” ​ “무녀 이아노의 유물입니다.” ​ “아… 역시 그랬군요.”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십자가를 건넸다. ​ 루크 사제는 긴장된 표정으로 십자가를 손에 받아들며 말했다. ​ “저희에게 판매해 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만…” ​ 그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 “정해인 님께서 만족하실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게 워낙 큰 물건이다 보니….” ​ 아,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내 선에서 가격을 정하기엔 너무 거물이라 협의가 필요하니, 유예시간을 주세요.' 라는 소리다. ​ 사실 나는 돈에 연연할 생각이 없었다. 원래는 그냥 주려고 했었으니까. ​ “가격은 나중에 알려주셔도 괜찮으니, 계약서 한 장만 주시겠어요?” ​ 내 말에 루크 사제는 조금 당황한 듯 서둘러 품에서 백지 계약서와 펜을 꺼냈다. 그가 건넨 계약서를 받아 들고, 나는 무언가를 간단히 적어 내려갔다. ​ “됐습니다. 여기요.” “이 조건만 지킨다면, 뭐 가격이 정해지는 대로 언제든 연락주세요.” ​ 아르카디아가 모시는 신의 보증이 새겨져 있는 계약서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 ​ 내가 작성한 계약서를 읽는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한참 동안 내용을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좋습니다. 겨우 이 정도 조건이라니…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 천여울은 교단이 반드시 자신에게 십자가를 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확실히 조건을 걸어두는 편이 그녀에게 더 유리할 것 같았다. ​ 계약서에 적은 내용은 간단했다. ​ ‘이아노의 십자가는 반드시 ‘성녀’ 후보에게 사용할 것.’ 루크 사제는 계약서를 다시 한번 검토하더니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이 조건을 거절할 사람은… 교단 내에 없겠지요.” ​ 그는 계약서를 소중히 접어 품에 넣으며 덧붙였다. ​ “이교도가 아닌 이상에야, 말입니다.” ​ 그리고 눈앞의 루크 주교는 아르카디아 교단 내에서 강경한 ‘친 성녀’파로 유명하다. ​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이 유물에 깃든 신성은 반드시 자격을 갖춘 분의 손에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 그는 내가 원하는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터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