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먹으면 실행하는 건 어렵지 않다? ​ 의지만 있다면 실행하는 건 어렵지 않다? ​ 헛소리에 가깝다. ​ -으드득. ​ 758번째 죽음. 나는 깨어나자마자 트렁크에서 굴러떨어졌다. 땅바닥과 얼굴을 마주하며,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손끝으로 흙을 움켜쥐었다. 애꿎은 잡초만 쥐어뜯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단순했다. 몇백번의 죽음 동안 체화된 루틴. 박광철이 소리를 듣고 확인하러 오기 전, 빠르게 내리막길을 뛰어내려 전장으로 향하는 것. ​ 그리고 대충 사도 셋 중 아무나 붙잡아서, 잘 싸우다 죽는 것까지. 아니, 아마 ‘잘’ 싸우지는 못하겠지만. ​ 기약 없는 죽음과 부활은 무한정 반복되었다. 나에게 날아오는 공격은, 이제 알아챌 수 있다. 피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하다. ​ 그러나 문제는 공격. 편린이 없는 나는, 어떤 공격을 해도 그들의 외피를 뚫어낼 수가 없었다. ​ 결국, 이 무식한 방법을 반복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다.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시간은, 많았으니 다른 방법도 시도해야 했을 뿐. ​ 따라서 나는,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 그러나 전투의 수준은 차원이 달랐고, 눈으로 쫓기조차 어려웠다. 내가 가진 직관(直觀)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1시간이면, 그들의 전투가 끝난다. 사도 한명이 웃으며 달려든다. 그러나 예상보다 거센 뱅퀴셔의 저항에, 그는 달려 있던 날개를 한 짝 뜯기며 물러선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도 셋이 동시에 공격한다. 이후는 뻔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다. ​ 또다시 무너지는 전장. 반복되는 죽음. ​ 동료들의 죽음을 그저 매 순간 집중하며 바라보고, 또 그 죽음에 대해 분석하는 것은. 도무지 인간이 할 짓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뭔가가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볼을 닦았다. 눈물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무아지경(無我之境)으로 진화합니다.』] ​ 수많은 죽음과 회귀로 만들어진 내 정신상태는. ​ 열반(涅槃)에 가까웠다. ​ 전투가 끝났다. 나는 몸을 일으켜 전장으로 향했다. 머릿속을 깔끔하게 비운다. 언제부턴가 죽음이 두렵지 않아졌다. ​ “쟨 누구야?” ​ 방금 막, 영감을 죽인 사도가. 옆에 있는 사도에게 물었다. ​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자세를 잡고, 싸우다, 죽을 뿐이었다. ​ 안 해본 것이 없다. 도망을 종용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사도들이 즉시 눈치를 챘다. 나는 이것을 세계의 억제력이라 규정했다. 정해진 루트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 또, 한번은 이런 적이 있다. ​ “야 이 씨발 새끼들아!!!” ​ 사도 셋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소리쳤다. ​ “제발, 한 번만 찔러보자, 어차피 흠집도 안 날 거 아니야? 한 번만 찔러보자!” ​ 사도들은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대검을 꺼내 들었을 뿐. 그러나, 옆에 있던 이목구비 없는 사도. 순백의 얼굴을 한 사도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른 사도들에게 몇 마디를 건넨 후,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 “찔러보시겠어요?” ​ ‘블라그(Blagh).’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무런 방어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그냥 내 공격을 기다렸다. 녀석이라면 분명 응할 거라 여겼다. ​ 나는 창끝에 마나를 최대한 응축시켰다. 그리고, 있는 힘껏 찔렀다. ​ -으…드드득. ​ “하하, 괜찮네요.” ​ -으적. ​ 깨어나자마자 나는 고민에 휩싸였다. 온 힘을 다 끌어모아 날린 공격마저 통하지 않았다. 내 타고난 마나의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정을 해야 했었다. ​ 역천(易天). ​ 최후의 최후까지 남겨둔 방법. 이제는 써야만 한다. 온몸의 마나와 혈도를 역류시켜, 출력을 상승시키는 것. 다만 고민했던 이유는, 역천(易天)을 결정하는 순간, 내 ‘성장 방향’은 완전히 고정된다. 거꾸로 역류시키고, 다시 정방향으로 돌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으니까. ​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억지로 마나를 역류시켰다. ​ 온몸의 혈관이 한순간에 타들어 가는 느낌. 피부 아래로 흐르는 모든 기운이 거꾸로 날뛴다. 장기가 찢어지는 것 같다. 뼈가 부서지는 것 같다. 모든 신경이 불타는 것 같다. ​ -푸왁! ​ 피를 토해내며 사망했다. 912번째 죽음이었다. ​ 1100번째 삶. ​ 마침내, 역천에 성공했다. ​ [ 제한적으로,『역천신공(易天神功)』을 습득하셨습니다.] ​ 그러나, 제한적으로. ​ 수없이 많은 죽음을 거듭한 끝에 깨달은 것은, 내 비루한 신체는 역천을 온전히 버틸 수조차 없다는 것. 단순히 마나를 역류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역천이란, 마나의 흐름을 정반대로 뒤집어 출력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기술. 그걸 감당할, 신체가 나약했다. ​ 이아노의 영약을 마셨다면 모를까. 단시간 안에 마나의 질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나는 비루한 신체를 강화하는 대신, 역천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 집중했다. ​ 1104번째 죽음. 피를 쏟아내며 죽었다. ​ 1492번째 죽음. 심장이 터졌다. ​ 1671번째 죽음. 혈맥이 타버렸다. 사도가 날 죽이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부서졌다. ​ 2001번째 죽음. 결론은 간단했다. 내 몸이, 역천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완벽하게 통제해야 했다. ​ 3910번째 죽음. 실패. 내 몸은 여전히 역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 4399번째 죽음. 몸이, 조금씩 역천에 적응하고 있었다. 출력 조율 직후, 즉각적인 대응 방법을 만들었다. ​ 4529번째 죽음. 10초. 최대 유지 시간 10초. ​ 이 안에서 나는 끝을 봐야 함을 깨달았다. ​ 몇번의 죽음이었는지, 이제 새는 것마저 잊어버린 시점. ​ 뱅퀴셔와의 전투. 어느새, 나는 그들과 합을 맞추어 가며 싸울 수 있게 되었다. ​ 그러나 싸울 수 있다는 것과, 이길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 전원이 사망했다. 이번에도 역시, 나도 그들을 따라갈 예정이었다. ​ -푸욱! ​ 생각하던 그때. ​ 배에 주먹이 꿰뚫렸다. 심장을 비껴갔으나, 장기가 터지는 감각.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 너무 익숙해져서, 감각이 무뎌진 것뿐이었다. ​ 셀 수도 없이 죽었다. 인제 와서 죽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죽으면,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일은 단 하나. ​ 죽인다. ​ 내 배를 꿰뚫은 사도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는 반대쪽 손으로 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역천으로 마나를 끌어 올렸다. ​ 죽인다. ​ 사도의 눈이 흔들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 창끝에 모여들며 강하게 응축되는 역천의 마나.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 10초다. ​ 회오리치는 마나는 그 이빨을 세우며 악을 도려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사도는 팔을 빼려 했다. 그러나 배에 꿰뚫린 근육이 그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놈의 팔을 붙잡았다. ​ 사도가 이마를 찌푸린다. 반대 손으로 내 얼굴을 후려쳤다. ​ -쾅!! ​ 머리가 옆으로 꺾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 그리고, 그대로 내지른 창이, 마침내 놈의 어깨를 꿰뚫었다. ​ -으드득! ​ “크으으윽!” ​ 마침내 상처를 입혔다. 놈이 신음을 낸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저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팔이 부르르 떨린다. 조금만, 조금만 더. ​ -쾅! ​ 그러나 사도는 하나가 아니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사도가 나를 강하게 쳐 날려 보냈다. ​ “병신아, 뭐해.” ​ 창에 어깨를 꿰뚫린 사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깨에 박혀있던 창을 내게로 던졌다. 그 눈빛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온몸을 수축시켰다. ​ 그러나 ​ “놔둬.” ​ 옆에 있던 사도가 팔을 뻗어 놈을 막아섰다. ​ "어차피 죽었어. 우리 이제 돌아가야 돼.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어." ​ 다시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싸운 것은, 처음이었다. ​ 놈들은 피에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이곳에서 떠났다. ​ 그때야 비로소 나는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 뭐지? ​ 눈앞의 사도들은 사라졌는데, 나는 살아남았다. ​ 비록 뱅퀴셔는 전멸했지만. 나는 그때야 비로소 희망을 봤다. ​ 처음이었다. 내 손으로 무언가를 바꾼 것이. 처음이었다. 죽음만 반복되던 전장에, 작은 변화가 생긴 것이. ​ 이제 새는 것 마저 잊어버렸던 죽음들이 드디어 결과를 가져왔다. ​ 몸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내장이 끊어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 “으흐, 으흐흐흐….” ​ 나는 곧 죽지만,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서야 감이 잡힌다. 얼마나 걸리든, 몇 번이 걸리든 전부 죽이겠다. ​ 그리고. ​ 전부 살려내겠다. ​ 숨이 점점 가빠졌다. 통각이 없는 대신, 호흡의 한계를 느낀다. ​ 이제, 동료를 구하러 갈 차례였다. 나는 창을 꺼내 들어 그대로 내 목을 찔렀다. ​ -푸왁! ​ 돌아간다, 다시. 베이스 포인트로. ​ 기다려라, 반드시 죽여주겠다. ​ 그러나. ​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 “으…, 으?” ​ 전장. 그것도 바로 조금 전, 내가 죽은 그 자리였다. ​ 내 몸은 여전히 구멍이 뚫려 있었고,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나는 한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 ‘아직 안 죽었나?’ ​ 나는 다시 창을 들어, 내 목을 찔렀다. ​ -푹. ​ 다시 눈을 떴다. ​ 여전히. ​ 그곳이었다. ​ 나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 분명 죽었는데 어째서…. ​ 그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원입니다!!!!” ​ 협회의 구급팀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깨달았다. ​ 나는 급하게 한 번 더 목을 찔렀다. ​ -푸왁! ​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도, 나는 그곳 그 자리에서 다시 눈을 떴다. ​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설이 괴성을 질렀다. 애써 무시하며, 나는 급하게 땅을 기어, 구급팀이 있는 방향에서 멀어지려 했다. ​ “빨리! 빨리 회복 성법을!!” ​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리고— 성스러운 기운이 내 몸에 스며들었다. ​ “아…안돼….” ​ 한 가지 가능성. 사도들은, 도주했다. ​ 그들이 떠난 시점에서, 나, 정해인은 살아남아 있었다. ​ 그리고 시스템은, 이것을 ‘상황 종료’로 간주했다. ​뱅퀴셔가 전멸했든 말든, 시스템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게, 새로운 세이브 포인트가 설정되었다. ​ “으아아아아아아아!” ​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땅바닥을 뒹굴었다. ​ 수백 번의 죽음, 수천 번의 죽음. 참아냈고, 견뎌냈다. 그리고, 마침내 해냈다고 생각했다. 내 손으로, 분명 무언가를 바꿨다고 확신했던 순간. 내가 보았던 희망의 빛은 마지막으로 꺼져가던, 그들의 생명의 불씨였다.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창을 들어, 내 목을 찔렀다. ​ -푹! ​ 눈을 떴다. ​ -푹! ​ 눈을 떴다. ​ 그러나, 내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 전부 끝났다. ​ 나는. ​ 결국 나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