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슥. ​ -슥슥슥. ​ “… 뭐해?” ​ 주서준은 도저히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가온에 도착해서 처음 듣는 수업인데, 옆에 앉아계신 분이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 칼로스의 학생들은, 가온과 다른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당분간은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을 통일했다. ​ “말 걸지 말아봐.” ​ 옆자리의 윤채하는 머리를 박고 무언가 쓰는 것에 열중한 채,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수업은커녕, 필기조차 하지 않은 채 혼자서 바쁘게 책상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도 그랬다. 멘토 활동이 시작되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 ‘대체 뭘 하는 거야?’ ​ 주서준은 옆으로 슬쩍 몸을 기울이며 테이블 위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향하자마자── ​ 째릿. ​ 마치 털을 잔뜩 곤두세운 고양이가 하악질하는 것처럼, 그녀는 책을 재빠르게 감쌌다. 팔로 잽싸게 막아버리고, 몸까지 책 위로 살짝 웅크리며 노골적으로 경계했다. 뭔가 책인 것 같긴 한데. 주서준은 포기했다. 슬슬 교수님의 눈총이 따끔해질 상황이었기에. ​ “아.” ​ 그러나 마침, 어제 미처 전달하지 못한 말을 떠올렸다. ​ 그는 나직이 말했다. ​ “이번 주 토요일 약속 비워놔.” ​ 그러자 윤채하는 여전히 책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 “왜.” ​ “마탑에서 수업 잡아준다던데.” ​ 원래 칼로스를 떠나 가온으로 넘어오면서, 마탑과의 연도 끊길 줄 알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마탑에서 그와 그녀를 좋게 봤는지 추가 수업을 약속했다. 그에게도 다행인 일이었지만. 사실 이미 마탑에서도 그들의 포텐셜을 주목하고 있었다. 마탑의 입장에서도, 이 정도 인재는 손에 쥐고 있는 게 훨씬 좋은 장사였다. ​ 주서준은 당연히 그녀도 기뻐할 줄 알았다. ​ “음….” ​ 그러나 윤채하는 턱을 괴고, 곰곰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 “꼭, 갈 필요는 없잖아?” ​ 그녀는 책상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느리게 대꾸했다. ​ “그야… 뭐, 꼭 가야 하는 건 아니긴 한데….” ​ 흥미를 갖는 횟수가 적은 윤채하에게, 마탑은 몇 안 되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마탑에서 제공하는 수업이나 연구 기회에는 언제나 반응을 보였으니까. ​ “안 갈래.” ​ 그러나 그녀는 이번만큼은 다르게 말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책장을 넘겼다. ​ “재미없을 것 같아서.” ​ 주서준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 ​ ​ ​ ​ *** ​ ​ ​ ​ ​ 일전에 모라스를 토벌한 것에 대한 보상. 상장 수여야 며칠 전에 끝났지만, 정작 부상은 소식이 없었다. 대체 언제 주나 싶었는데, 드디어 인원들이 불렸다. ​ 사실 이것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 나, 천여울, 그리고 유하나. 우리는 협회가 운영하는 무구 창고 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가온이 공식적으로 소유한 영약과 아티팩트, 무구들이 보관된 장소였다. ​ 그때, 앞에 서 있던 이사장이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 “자, 마음껏 고르세요! 학생 여러분.” ​ 그는 특유의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펼쳐 보였다. ​ “여러분 덕분에 가온이 더 큰 피해 없이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시 이 셋이 없었으면, 학교가 뒤집혔을 테니까. ​ “각각 한 개씩 원하시는 걸로 골라주시면 됩니다.” ​ 이사장은 내게 다가와 찡긋 웃으며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 ‘징그럽게….’ ​ 어디까지나 쇼맨십이다. 일전에 입학 때 ‘비사관학교’ 출신은 물을 흐릴 수 있다며 가장 반대했던 사람이었는데, 인제 와서는 학교의 자랑이라며 난리다. ​ “그럼, 열도록 하겠습니다.” ​ 그의 말과 함께, 협회 직원이 단말기에 손을 가져갔다. 거대한 문 옆 스캐너에 이사장이 손바닥을 올리자— ​ -쿠구구궁. ​ 거대한 창고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안에 담긴 엄청난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 창고의 내부는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 ‘생각보다 괜찮네.’ ​ 영약, 아티팩트, 여러 가지 무기들. 가온의 창고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뛰어났다. 가온의 창립자가 모아둔 것들이다. 생전 수집가로 유명했던 그였으니까. ​ 아마, 뭘 집어도 평타 이상을 칠 거라 생각하지만…. ​ ‘일단 얘네들 뭐 고르는지부터 보자.’ ​ 내가 뭘 집을지는 이미 계획해놨다. 고민은 했었는데, 어제로 완전히 결정했다. 일단 천여울과 유하나가 무엇을 고르는지 보고, 별로면 회유하거나 추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좋을 듯했다. 아주 거덜을 내야지. ​ 그래서 나는 뒤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 “자유롭게 골라주시면 됩니다!” ​ 이사장이 말했다. 하지만, 난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이것 봐라?’ ​ 대충 봤을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까 보인다. 겉으로 보면, 진짜 괜찮아 보인다. 좋아 보이고. 그런데 알고 보니까 ‘진짜’ 괜찮고 ‘진짜’ 좋은 것들은 산더미 안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 마치 일부러 좋은 물건을 감춰두기라도 한 것처럼. ​ 유하나는 가장 먼저 무구 쪽으로 달려갔다. ​ 그리고 그 더미 사이 깊은 곳에 숨겨진 가벼워 보이는 아대. 일종의 손목 보호대로 보이는 것을 꺼내 들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천으로 된 보호대. ​ ‘좋은데?’ ​ 그러나, 난 저 보호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잘 집었다. 나는 이사장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했지만, 그녀가 아대를 집는 순간 움찔한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 유하나는 다가오더니 그 아대를 꺼내더니 그대로 손목에 장착했다. 그리고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보이며 내게 물었다. ​ “어때?” ​ 좋다. 그녀가 집은 것은, 그리스 신족 중 하나인 티탄의 힘줄로 제작된 아티팩트다. 지구의 기술은 아니고, 던전에서 나오는 물품일 텐데. 근력 성장을 보조하고, 전체적인 훈련에 도움을 줄 것이다. 마침, 그녀가 수련하고 있는 화접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괜찮네.” ​ 잘 골랐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이사장 쪽을 돌아봤다. ​ “저는, 이걸로 할게요.” ​ 그녀가 이사장에게 말했다. ​ “…아 네….” ​ 이사장은 잠깐 당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수습하고는, 곧바로 다른 무구를 추천하기 시작했다. ​ “그런데 하나 학생, 저쪽에 있는 갑주는 어떤가요? 마법 저항이 뛰어나고, 보호 성능도….” ​ 그가 가리킨 것은, 화려한 장식이 새겨진 근사한 갑주였다. 겉보기에 엄청 좋아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빛 좋은 개살구다. ​ “….” ​ 그녀는 갑주를 한번 보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봤다. 마치 ‘어때?’ 라고 묻는 듯.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건 별로다. ​ “괜찮아요, 이걸로 할게요.” ​ “…그럽시다.” ​ 이사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 다음은 천여울이었다. 그녀는 하품을 살짝 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아티팩트 더미 쪽으로 이동했다. ​ 그리고는 신성 계열 보물들이 모여 있는 구역으로 직행. ​ 그녀는 손을 뻗어 아티팩트 더미 속으로 넣었다. 그리고 몇 번 손을 휙휙 저으며 뭔가를 찾더니, 이내 손을 빼 들었다. ​ “!!” ​ 옆에 서 있던 이사장이 발작했다. 그녀가 집어 든 것은, 은색 반지 테 위에 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 ‘미친.’ ​ 아우로라의 심장. ​ 여기있을 줄은 몰랐다. 저건 진짜 좋다. 마나와, 성력 둘 다 사용해야 하는 성자들 특성상 불균형이 생기기 쉬운데. 저 반지는 그 균형을 완벽히 잡아준다. 어느 하나 튀어나오지 않게끔. ​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다른 약병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 ‘안돼.’ ​ 저건 좀, 구리다. 심하게. 마법사에게 좋을 수는 있겠으나, 마나를 일시적으로 뻥튀기시켜주는 일회용 영약이다. 천여울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 그녀는 영약과 반지를 들고, 곧장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 그리고 내게 물었다. ​ “뭐가 좋아 보여?” ​ 나한테는 금과 돌, 둘 중 뭐가 더 좋은지 묻는 것과 비슷한 질문이었다. ​ “오, 그 영약 엄청 좋아 보이는데요?” ​ 이사장을 필사적으로 영약의 효용성을 호소했다. ​ 나는 조용히 왼쪽에 있는 반지를 가리켰다. ​ 천여울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별 고민도 없이 오른손에 있던 영약을 뒤로 던져버렸다. -툭. ​ 영약이 무의미하게 바닥을 구른다. 반면, 그녀의 손바닥 위의 반지는 붉은빛을 은은히 내뿜었다. ​ “해인아, 그럼 이것 좀 껴….” ​ 그녀가 손등을 살짝 내밀려는 순간. ​ “잘됐네, 이사장님? 얘 반지 좀 끼워주시겠어요?” ​ 유하나가 끼어들었다. ​ 그 순간. 천여울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반지를 들어, 그대로 중지에 꽂아버렸다. 그리고 곧장, 그 반지를 낀 중지를 유하나를 향해 쭉 내밀었다. ​ 유하나는 그런 천여울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며 감탄했다. ​ “예쁘다~” ​ 천여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고마워~” ​ 그러나 여전히 중지를 내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 나는 그 냉랭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앞으로 향했다. 유하나도, 천여울도 각자에게 완벽한 아티팩트를 손에 넣었다. ​ 이제, 내 차례다. ​ 나는 보다 구석지고, 초라한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철로 된 핼버드가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날카로운 월아와, 곧게 뻗은 창신. ​ 쭈그려 앉아 자세히 들여다봤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변의 무구와 보물들. 그러나, 유독 이 철제 핼버드만이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 천천히 다가가, 손을 살짝 갖다 댔다. ​ “!” ​ 순간,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러나, 핼버드에는 어떤 서리도 끼지 않았다. ​ 방금 막, 확인은 끝났다. "이걸로 할게요." ​ 20년 전. 이 땅에 강림했었던 문명 종결수(終結獸)이자. ​ 괴룡(怪龍) 알데바란의 송곳니. ​ '카타스트로피.' ​ 내가 찾던 그 무기였다.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