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오늘만큼은, 합법적으로 수업을 빠질 수 있었다. 정당한 명분이 주어진 상태. 멘토로서, 시간을 넉넉히 줄 테니 멘티에게 가온의 인프라를 비롯해 학교 생활 전반을 안내하라는 의도였다. 봉사 점수는 덤. ​ 그러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윤채하는, 애초에 규격 외의 학생이었다. 칼로스에서도 이미 대부분의 학문적, 마법적 지식을 섭렵했을 가능성이 높다. ​ 그렇다면, 마법적 수준이 칼로스에 비해 뛰어나지 않은 가온에서, 그녀가 흥미를 느낄만한 것이 있을까? … 딱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 “가온 안에서, 가고 싶었던 곳 있어?” ​ 그녀는 내 옆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딱히… 잘 모르겠어.” ​ 대답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크게 관심이 없다는 듯한 태도. ​ 이럼, 내가 정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좋아할 곳이 하나 떠오르긴 한다. 어차피 그녀도 명확한 의사가 없는 것 같으니, 내 뜻대로 가면 된다. ​ “그럼, 나가자.” ​ 나는 그녀를 포탈 터미널로 끌고 갔다. 학교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터미널을 거쳐야 했다. 그곳에는 터미널 관리 직원이 앉아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명찰을 건네며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 “교류의 장, 멘토 활동 중입니다. 현장 체험 학습 나가려고요.” ​ 직원은 명찰과 얼굴을 대조하며 살펴봤다. 행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 금방 이용이 승인됐다. ​ “10시 이후로는 학원으로 들어오는 공동 포탈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이전까지는 돌아오셔야 해요~” ​ “네네.” ​ 말하지 않아도 그럴 심산이었다. 내가 얘랑 10시까지 뭘 하겠는가. 윤채하는 곁에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신기하다는 눈빛. ​ “가자. 네가 원하는 대로.” ​ 아마 맞을 것이다. ​ ​ ​ *** ​ ​ ​ 포탈을 통과하고 터미널 밖으로 나오자,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 여의도. ​ 거리는 언제나처럼 분주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 이질적인 건물로 향했다. ​ “… 여기가 어디야?” ​ 윤채하는 내게 물었다. 눈앞에 서 있는 건, 거대한 펜트하우스. 일전에 편린을 테스트하러 왔었던 그곳. 뱅퀴셔의 기지였다. 나는 곧장 철문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차마 뻗기 전,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 “들어와.” ​ “….” ​ 윤채하는 계속해서 주변을 스캔했다. 순수한 호기심. ​ 이곳으로 온 이유는 간단했다. 가온에는 그녀 입장에서 재미 볼게 없다. 그러나 여기는 아니다. 나는 정원을 지나 그녀를 건물 안쪽으로 안내했다. 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다. ​ “왔어요~” ​ 나는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 ‘아무도 없나.’ ​ 인기척이 없다. 오히려 잘됐다. 나는 윤채하에게 천천히 말을 꺼냈다. ​ “가온이나, 칼로스나 거기서 거기라서, 사실 안에서 뭐 할 게 없거든.” ​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여기는, 좀 다를 거야.” ​ 나는 건물 1층 중, 가장 깊은 방. 서재의 문 앞에 섰다. 뱅퀴셔의 마법사 유칼 페르만. 그와 영감이 오랜 시간 동안 모아둔 자료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마 마탑 최고의 서적과도 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은 서재를 개방해, 우리에게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허락했다. 보는 사람은 영감밖에 없었지만. 나는 문을 열며 말했다. ​ “자유롭게 돌아다— 아.” ​ 거기에는 한 남성이 조용히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회색 머리칼과 바닥에 질질 끌리는 로브. 한 손에는 책. 그리고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우리를 인식하지도 않은 것처럼, 조용히 책을 넘기고 있었다. ​ “계셨어요?” ​ 원래 자주 자리를 비우는 사람이라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다. 그는 인기척에도 미동이 없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 “얘, 책 좀 읽어도 될까요? 제가 멘토가 됐는데 가온에는 볼 게 없—” ​ “….” ​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브를 끌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리고, 윤채하 앞에 섰다. 그녀는 놀란 눈치였다. 유칼은 유명한 마법사였으니까. 마탑 출신이 아니었지만, 그는 마탑의 어떤 마법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 그때, 유칼의 하늘색 눈동자가 얕게 빛났다. 그러자 그에 반응하듯 윤채하의 주황색 눈동자 또한 강하게 빛났다. ​ 그리고, 짧은 침묵.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유칼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돌아섰다. 아무 말도 없었다. 책을 펼치며. 자리에 앉았다. ​ 나는 윤채하를 돌아봤다. 여전히 놀란 표정. ​ “들어가도 된대.” ​ “…진짜?” ​ “어.” ​ 그는 책을 읽느라 바빴지만, 허락한 건 맞았다. 워낙 말이 없다 보니. 우리는 서재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공기 속에 오래된 서점 특유의 냄새가 떠돌았다. 이미, 그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 “… 칼로스의 비전 학파 회고록?” ​ 칼로스 아카데미의 창립자가 쓴 책도 있는 듯했다. 그거 아마 귀한 거일 텐데. ​ “강령술?? 엔트로피와 마력의 비가역성???” ​ 그녀는 이미 본인의 세상에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냉정한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침착하지만 급하게 책장을 넘기는 손끝, 초집중 상태. 나는 문득, 실소를 삼켰다. ​ ‘잘 데려왔네.’ ​ 나는 조용히 말했다. ​ “보고 있어. 어디 좀 다녀올게.” ​ 그러나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다 하다 동시에 책 2~3개를 펼쳐놓고 읽는 기예를 펼친다. 나는 책장 사이를 나오면서 유칼에게 말했다. ​ “유칼 형, 영감님 계세요?” ​ 그는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멈추지도 않은 채, 짧게 답했다. ​ “방금까진.” ​ 방금까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없다는 뜻. ​ 나는 조용히 서재에서 나와, 본관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다, 문득 한 개의 방 앞에서 발을 멈췄다. 영감의 집무실이었다. ​ 잠시 문 앞에서 고민했다. 그리고,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 조용한 방. 묵직한 책장과 정리된 서류들. 그리고 책상 위, 한 장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 ​ 나는 조용히 문서를 집어 들었다. ​ [작전 계획서] ​ 표지를 넘겼다. 그리고 내용을 훑어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 슬슬, 때가 되긴 했다. 이곳에 온 이유 중 하나기도 했으니까. ​ “….” ​ 나는 조용히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것은 단순한 임무가 아니다. 내가 가장 경계하고, 막아내야 할 사건. ​ 뱅퀴셔의 전멸. ​ 계획서에는 협회의 요청으로 진행되는 마인 소탕 작전이 적혀 있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함경도의 한 지역. 그곳에서 마인 세력이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 습격해 군락을 제거할 것. ​ 나는 참가 멤버를 확인했다. 파견 나간 인원들을 제외하고ㅡ 전원이 참여한다. ​ 날짜와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3주 뒤. 눈을 감고, 조용히 참가 명단에 내 이름을 추가했다. 실제로 쓰지는 않았고, 마음속으로만. ​ ‘막는다.’ ​ 무조건 막는다. 작품 속 원래의 흐름대로라면, 이번 임무는 뱅퀴셔의 전멸로 끝난다. 나는 그 결말을 방관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 “필립, 있어?” ​ -부우? ​ 흰색 수리부엉이가 조용히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문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 “이거 협회로 가는 거 맞지?” ​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서는 머지않아 협회로 넘어갈 것이다. 아직 시간은 있다. ​ 나는 그대로 서류를 내려놓고, 영감의 의자에 몸을 기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는 천천히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텅 비어 있는 공간. 창이 망가진 이후, 정하기는 했어도 아직 새로운 무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허전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 이 상태로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 여러 선택지가 떠오른다. ​ 듀란달. 성검이긴 한데, 이건 프랑스 박물관에 있고. 롱기누스. 좋긴 한데, 이미 누가 쓰고 있고. 궁니르. 얘는 좀… 너무 까다롭고.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날 만족할 만한 선택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 그때, 최근 결정한 무기 타입과 딱 맞는 것이 머릿속을 스쳤다. ​ ‘카타스트로피.’ ​ “그게 있었네.” ​ 조건이 살짝 까다롭기는 한데, 쓸 수만 있으면 좋다. 이제 내 무기를 찾으러 갈 때였다. 나는 영감의 컴퓨터를 켜 메모장에 빠르게 정리를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을 보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준비할 것이 많아 시간이 꽤 지나버렸다. ​ 마지막으로 작성한 계획을 내 메일로 전송한 뒤, 컴퓨터를 종료했다. ​ 그리고 밖으로 나와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 서재 문을 조용히 열자— ​ “아 씨 진짜. 뭔 비전 학파.” ​ ‘…?’ ​ 안에서는 언쟁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 “네 시야가 좁은 거다.” ​ 유칼의 단호한 목소리. 그 앞에는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윤채하가 있었다. 그녀는 책을 펼쳐둔 채, 한 손에는 깃펜을 들고 격앙된 얼굴로 반박했다. ​ “그러니까ㅡ 허상이라는 거죠, 최초의 엔트로피? 그거 증명할 수 있어요?” ​ “이미 증명되었지.” ​ 유칼은 차분하게 반박했다. ​ “비전 마법은 마법의 순수한 형태다. 원소 마법이든, 주술이든, 다 비전 마법에서 파생된 파편적 흐름일 뿐. 네가 추구하는 형상(形象)이나 제어(制御)도, 결국 여기서 파생된 것에 불과해.” ​ “아니, 아….” ​ 서재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그녀가 한숨을 팍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흠칫 놀랐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재밌었나 보네.” ​ 윤채하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 “어쩌죠, 유칼. 이제 슬슬 데려가야 할 것 같아서.” ​ “난 상관없지. 이 열혈 마법사가 문제일 뿐.” ​ “하….” ​ 그녀는 그의 말에 대단히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나 격앙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유칼 또한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본다. ​ “볼 만큼 봤어?” ​ “… 어.”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 옆으로 다 읽은 것처럼 표시된 책들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유칼이 손짓하자, 그 책들이 공중으로 일제히 떠올랐다. 그리고 책장으로 하나씩 날아들었다. ​ “잠… 깐!” 윤채하는 벌떡 튀어 올라, 책하나를 집었다. ​ [칼로스의 비전 학파 회고록] ​ 아까 봤던 그 책이었다. ​ “이거, 좀 빌릴게요.” ​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나.” ​ “….” ​ “맘대로 해라.” ​ 오호, 책까지 빌려준다고. ​ “….” ​ 그러면서 그녀는 슬금슬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 앞에 다다르자, 순간 멈춰 서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 단정하고 짧은 인사. 그러고는 바로 나가버렸다. ​ 나름 이곳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나가자, 유칼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 “… 어디 지망이지?” ​ “글쎄요, 마탑으로 갈 것 같긴 한데….” ​ “그런가.” ​ -텁. ​ “아쉽군.” ​ 그는 읽던 책을 닫았다. ​ 그의 표정에는, 그답지 않게 어딘가 아쉬운 표정이 깃들어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