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필요가 없어?” ​ 유하나는 갑자기 울먹이며 내게 되물었다. ​ ‘왜 이래?’ ​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표정.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나는 급하게 덧붙였다. 트레이닝이 필요 없어졌다고. ​ 그러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마치 안심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볼을 살짝 부풀리며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 “근데, 왜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건데?” ​ 나는 그제야 차분히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네가 너무 잘해졌고, 그 검술에 대해 혼자 가져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방금 교류의 장 멘토로 선정되어서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는 것까지 덧붙였다. ​ “멘토…?” ​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좁혔다. 몇 초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천천히 눈을 감았다. ​ “알았어.” ​ 그렇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 “그래도… 아침 운동은 꼭 나와야 해.” ​ 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건 계속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나는 그녀와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약속까지 해야만 했다. ​ 유하나는 마침내 다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나도 기숙사로 향했다. ​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 밤공기가 시원하게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 문득, 기묘한 생각이 스쳤다. ​ ‘…잠깐.’ ​ 유하나는 히로인이다. 비단 유하나뿐만이 아니다. 강아린도, 천여울도. 원작에서 주인공이 공략할 수 있는 캐릭터라는 뜻이었다. 물론, 게임이니만큼 공략하지 않는 선택지 또한 존재했지만, 대체로 주인공과 이어지는 대상이었다. ​ 그럼, 주인공이 사라진 지금은? ​ 나는 길 한가운데에서 멈춰섰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 아예,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이었다, 고려조차도. ​ “… 설마.” ​ 자연스럽게, 가장 가깝게 붙어 다니고, 성시우를 대체하려 하는 내가 그 대상이 되는 건 아닐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 그가 사라지고, 최근 들어 나는 최대한 그녀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부족했던 부분을 메워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 그래서 요즘 들어 부쩍 친해진 느낌이긴 했다. ​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유하나, 강아린, 천여울. ​ “아.” ​ 나는 짧게 탄식을 뱉었다. ​ 이거, 자의식 과잉 아닐까. ​ 순간적으로 그녀들의 외모 레벨을 잊고 있었다. 나는 못생긴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처럼 압도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 그리고 솔직히. 주인공처럼 선택지 안에서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하거나, 대놓고 플러팅을 할 계획도 없었다. ​ 그냥ㅡ 좋은 거 먹이고. 필요할 때 도와주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서 구해주거나, 아예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막고. 강해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그러다 충분히 성장했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하도록 놔두고. 그런 계획뿐이었다. ​ 내게 인간적인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 그리고, 설령,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 감정을 받아주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 그냥, 이 세계가 그렇다. ​ 지금은 아직 초반이다. 전개상 분위기가 그럭저럭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 진짜 습격과 전쟁이 시작되면, 마인 세력의 진짜 전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 사람 죽어 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 세상이다. ​ 나는 주인공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감정까지 챙기며 악신을 죽일 자신은 없다. 해피엔딩이 거의 보장된 주인공과는 다르다.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다. ​ 이것이 내가 원작의 주인공과 다른 점이었다. ​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어느새 기숙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 ​ ​ ​ ​ ​ ​ *** ​ ​ ​ ​ ​ ​ 다음날, 오전 10시가 되기 10분 전. ​ 윤채하는 강당으로 향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오전 9시부터 이미 도착해 있었다. ​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됐다. ​ 이른 아침부터 강당 한쪽에 앉아, 홀로 시간을 보냈다. 책을 펼쳐 읽었고, 심호흡을 했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럼에도, 묘한 들뜬 감각이 가라앉지 않았다. ​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선물을 기다리는 것처럼. ​ 그녀는 스스로를 분석하려 했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다. 칼로스에서 기대할 만한 존재를 찾기 어려웠으니, 그런 차원에서 관심을 갖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유를 굳이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벌써 모순이었다. ​ 시간이 흐르고, 가온의 학생들이 하나둘 강당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멘토로 선정된 학생들일 터였다. 윤채하는 그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 그리고 정확히 오전 10시. ​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가 들어왔다. 정해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스캔했다. 그리고 곧 윤채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 발소리가 강당 바닥을 울렸다. 그와 함께 다가오는 기묘한 존재감. ​ ㅡ성자(聖子)와도 같은 분위기. ​ 무엇 때문일까. 그에게서는 기묘한 느낌이 풍겼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오니까 확연히 느껴졌다. ​ “안녕?” ​ 그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대답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 ‘왜 이래….’ ​ 윤채하는 스스로도 당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낯선 감각. 머릿속에서는 분석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 그녀는 알 리 없었다. 그가 품고 있는 편린과 『일체지각(一體知覺)』이, 그녀의 진리를 탐구하는 ‘아 프리오리’와 완벽한 궁합을 이룬다는 것을. ​ 정해인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수를 청하는 듯한 모습. 그녀는 그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 천천히, 천천히. 그녀 또한 손을 들었ㅡ ​ -텁. ​ “앗.” ​ 그녀의 입에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 짧은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손이 강하게,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 ‘…커.’ ​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첫 감상. 거대한 손. 손바닥을 감싸는 깊은 굳은살과 거친 흉터들. ​ 수없이 휘두르고, 단련하며, 쌓여온 흔적들. 한계를 넘기 위해 쌓인 노력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 남자 마법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는 손. ​ 어째서일까. 그 손을 맞잡고 있자니. ​ 묘하게, 어딘가. 안정감이 들었다. ​ 그녀는, 이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 ​ ​ ​ ​ ​ *** ​ ​ ​ ​ ​ ​ ​ 가온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무아관(無我館). 이곳은 학생들이 종종 찾는 전망대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다. ​ 그곳에, 두 명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바람이 잔잔히 스쳐 지나갔다. ​ “다른 애들은, 뭐래?” ​ 먼 곳을 응시하며 천여울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하시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강아린은, 상관없다. 그리고. 유하나는… 늘 그렇듯 전긍정.” ​ “넌?” ​ 천여울이 한 번 더 물었다. ​ 하시온은 눈을 감고 짧게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 “다른 누구였어도 반대.” ​ 천여울이 그녀를 바라봤다. 하시온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 “근데… 걔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어.” ​ 아예 투자 가치가 없는 애였으면, 이를 악물고 쳐냈을 테지만, 그 정도는 아니니까. ​ 천여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난… 싫어.” ​ 그녀는 조용히 손을 쥐었다. ​ “더 이상 걔가 누군가를 챙겨주려 희생하고, 성장시키려 하고, 그런 거 자체가 싫어.” ​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 “할 만큼 했어.” ​ 지난 시간을, 수없이ㅡ 그는 남을 위해 살아왔다. 대체, 무엇을 더 해야 하는 거야. ​ 천여울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목이 멨다. 그녀는 마치 불쌍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 “이제… 받기만 해도 모자라.” ​ 그렇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 -툭. ​ 하시온은 그녀의 커피 캔이 흔들리며 남은 커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 천여울이 떠난 자리엔, 미처 마시지 못한 커피 한 캔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하나의 장면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현재가 아니었다. ​ 과거의 어느 한순간의 기억. ​ 그러나, 그것은 하시온의 기억이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의 기억일 뿐. ​ ​ ​ *** ​ ​ ​ ​ 찬란한 마법적 음각이 새겨진 거대한 회의실. 책들이 둥둥 떠 있는 마탑의 중심부. ​ 테이블 건너편에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노란색 머리칼. 윤채하. ​ 그녀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마탑주 윤채하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 그녀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남자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정중하지만,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태도. 그녀는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조용히 손을 거두고는 자리에 앉았다. ​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눈빛이 주황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본론부터 말할게요.” ​ 숨을 들이쉬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 “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권능이 사망 회귀라는 걸.” ​ 그녀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동요할 거라고 예상했다. ​ 그러나 그는 일말의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무반응. 무표정을 일관되게 유지할 뿐. 분명 저 입꼬리를 올리면, 나쁘지 않은 인상일 것 같기도 한데. 그는 메말라 있었다. ​ 스산한 느낌에 몸이 떨릴뻔한 것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 “그러니, 당신을 위해 마탑이 준비한 전략이 있습니다. 그건….” ​ 윤채하는 열정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논리적으로 정리된 명확한 계획. 누가 들어도 설득력 있는 전략.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지만, 그녀는 마치 흥미로운 연구를 논하듯 들떠 있었다. ​ 그러나 남자, 정해인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녀가 설명을 끝낸 후에도, 단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 윤채하는 답답해졌다. ​ “어때요? 성시우가 배신한 지금, 제 계획에 참여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 반짝이는 눈빛. 실패를 모르는 태도. 자신만만한 말투. 윤채하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정해인은 살짝 고개를 들더니, 담담하게 짧게 말했다. ​ “역시 안되나.” ​ 의미 없는 기대였나,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네?” ​ 순간, 윤채하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정해인은 생각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윤채하라면, 그녀의 눈이라면. 뭔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눈치채지 않을까. ​ 직접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세상의 억제력은, 그녀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 하지만, 역시 무리한 기대였다. ​ 마탑의 호출에 직접 찾아오는 수고도,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랐다. 정해인은 일말의 대답 없이 등을 돌렸다. ​ “… 저기요!” ​ 윤채하가 황급히 외쳤다.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 뭐 하시는….” ​ 그러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맞춰보실래요.” ​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온도가 낮아진 것도 아닌데, 목 끝이 서늘해지는 느낌.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몇 번째일 것 같습니까.” ​ 그는 고개를 돌려 마탑주, 윤채하를 바라봤다. ​ “마탑이 저를 호출하고, 당신이 그 계획을 신나게 설명하는 것.” ​ 그의 시선이 그녀를 꿰뚫듯 내려앉았다. ​ “몇 번이나 반복된 것 같나요?” ​ 윤채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설마….’ ​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눈에는 전혀…. ​ 하지만, 정해인은 그녀가 답을 내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 “아쉽게도 첫 번째는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도 아닐 겁니다.” ​ “….” ​ “다음에는, 더 좋은 계획이 있기를 빌겠습니다.” ​ 그렇게, 그는 방을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