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주서준은 당황했다. ​ 그는 윤채하를 누구보다 오랫동안 봐왔다. 그리고 아마, 그녀의 부모님을 제외하면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 느긋한 성격. 언제나 무료한 듯한 태도. 어떤 일이든 서두르지 않고, 가볍게 흘려보내는 듯한 기질. ​ 그녀가 칼로스 랭킹 5위에 머물러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그는 알고 있었다. 윤채하가 진짜로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1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 그래서 이번 결정도 변덕일 거라 여겼다. 그녀가 “가온으로 갈래.”라고 말했을 때도, 주서준은 그걸 진지한 계획이 아닌 순간적인 충동으로 받아들였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바뀔 그런 단순한 변덕. ​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음을 인정해야 했다. ​ -쾅! ​ “아우, 진짜.” ​ 윤채하는 방문을 거칠게 닫으며 교수의 연구실에서 나왔다. 평소의 느긋한 모습과 달리 일그러진 표정, 그리고 상담 중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고저로 예측하건대, 그다지 좋은 협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였다. ​ 그녀는 문을 닫고 나서도 한참 동안 한숨을 내쉬었다. ​ "씨…." ​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깨너머로 그녀의 교복 자락이 팔랑거렸다. 흩날리는 금발 사이로, 이글거리는 듯한 주황빛 눈동자가 살짝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는 씩씩거리며 떠났다. ​ 행동의 진행이, 너무 빠르다. ​ 마음만 먹으면, 그녀는 행동에 거침이 없어진다. 문제는, 그 마음을 거의 먹지 않는다는 것. — 지난 15년 동안, 그녀가 마음을 먹은 건 단 한 번뿐이었다. ​ 그 첫 번째가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지만. 이번이 두 번째라는 건 분명했다. ​ “서준 학생….” ​ 그때, 뒤에서 연구실 문이 반쯤 열리며 조교가 그를 불렀다. 조교 역시 교수에게 시달렸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 오늘 교류의 장 상담은 윤채하뿐만 아니라, 주서준도 받기로 되어 있었다. ​ “준비됐으면 들어오세요….” ​ “네.” ​ 조교가 말을 흐리며 문을 열어줬다. 그는 연구실로 들어갔다. ​ 문이 닫히자, 연구실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벽을 가득 메운 마법서들, 책장 위에 놓인 각종 마법 장치와 플라스크, 기계처럼 움직이는 마법진을 새긴 크리스털 장치들. ​ 그의 담당 교수는 평소처럼 무언가를 쓰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러나, 주서준이 들어오자마자 교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드르륵 ​ 교수는 의자를 빼내며 반갑게 말했다. ​ “여기 앉아, 서준 학생.” ​ 주서준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교수는 본격적으로 설득을 시작했다. ​ 교수는 원래도 말을 안 들어 먹는 윤채하에 비해, 모범생인 주서준은 설득이 가능할 것이라 여겼는지, 다소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 “… 그러니까, 서준 학생이 채하학생한테 말을 좀 잘해달라는….” ​ 결국 요지는 간단했다. 너희 가면 안 된다. 윤채하를 막아줘라. 아니, 더 정확히는—— 윤채하가 가는 건 막을 수 없더라도, 적어도 너라도 남아야 한다. ​ “윗선에서도 난리라니까? 상위권 랭커 두 명이 나가면….” ​ 교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 "장학금, 대학원, 마탑이랑 연계까지 해주는데 대체 왜…." ​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 주서준은 순간, 윤채하가 왜 질려했던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교수님.” ​ 결국 그는 교수의 말을 끊었다. ​ “어 그래.” ​ 교수는 여전히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 그 기대를 산산조각내듯이, 그는 짧게 말했다. ​ “대학원은 다른 학생 알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 주서준 또한, 웃으며 교수에게 말했다. ​ “어?” ​ “가온 갑니다. 저도.” ​ 교수는 황급히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주서준은 더 이상 대화를 길게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 "그럼, 전 이만." ​ 그는 가볍게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섰다. 해가 졌는지, 조금은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 그녀는 이미 멀리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 늘 그랬다. 언제나 앞서가고, 멀어지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 주서준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 연애 감정은 아니었다. ​ 그것보다는 좀 더 건조한 감정. 일종의 동경이랄까. ​ 어찌 됐든. ​ 주서준은, 따라갈 수 있는 곳까지는, 따라가 볼 생각이었다. ​ ​ ​ ​ ​ *** ​ ​ ​ ​ ​ 휴학 결정 이후,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났다. 학교는 거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오히려 몇몇 건물은 더 좋아진 느낌마저 들었다. ​ 그리고, 오늘부터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 가온은 중단된 중간고사를 다시 치르는 대신, 미비된 성적을 기말고사와 합산하여 평가하기로 결정했다. 필기는 치렀으니, 별도로 고지하고 실기만 기말고사와 통합해 평가하는 방식. ​ 이 결정에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성적이 보류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내려는 듯,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번졌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오랜만입니다." ​ 강의실 문이 열리고, 도한성 교관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원래도 힘이 없는 편이지만,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 웅성거리던 학생들도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 비어 있는 책상. 그 위에는 누군가가 두고 간 듯한 흰 꽃 한 송이가 올려져 있었다. ​ 결국 성시우는 마인과의 혈전 끝에 전사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실제로는 침식당해 마인이 되었다가 살해당했지만, 그렇게 발표하기엔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았다. ​ 공식적인 발표는 그에 대한 여러 배려가 합쳐진 결과다. ​ 도한성 교관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 ​ ​ *** ​ ​ ​ 오늘 수업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중간고사 이월 안내랑 교류의 장 정도. 전체적으로 담당 교수들과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었으니까. ​ ‘이미 알고 있겠지만, 중간고사는 이월됐습니다. 조만간 필기시험 결과만 공지하겠습니다.’ ​ 교관의 말이 끝나자 교실 곳곳에서 작은 탄식과 안도의 한숨이 섞여 나왔다. 덕분에 내 랭크도 동결. 나는 기말고사가 끝나기 전까지, 랭크 없음으로 살아야 했다. ​ -쟤야? -메두사? ​ 그러나, 나를 향한 시선은 이전과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메두사의 목을 베어버리는 영상 클립은 어느새 조회수 2천만을 넘어섰다. ​ 이곳저곳 퍼 나르기까지 하는 것 같더라. ​ 덕분에 교실 밖에 몰려있는 대부분의 학생은 나를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업이 끝난 후,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 그러나 복도로 나오자마자,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 “정해인, 맞지?” ​ 가온 아카데미에서는 자유로운 복장이 기본이었지만, 눈앞의 학생처럼 교복을 입는 사람도 존재했다. 연두색 카라. 2학년을 상징하는 색이다. ​ 검은 머리칼과 짙은 눈동자. 누군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녀는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곧장 내게 손을 내밀었다. ​ “프런티어에 가입하는 거 어때?” ​ 프런티어, 가온에서도 꽤나 유서 깊은 동아리다. 뛰어난 현역 영웅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고, 각 학년에서 선택받거나 유력한 학생들만 초대받는 곳이었다. ​ 사실상, 인맥 쌓기 최적화된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 원작 속에서, 주목도를 일정 이상 달성했을 때 발생하는 이벤트였다. ​ ‘땡큐.’ ​ 나는 이걸로, 내가 얼마나 주목받고 있는지 수치로 체감할 수 있었다. ​ 그리고, 그녀는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조차 하지 않은 듯 검은색과 황금이 음각된 카드를 내밀었다. 뭐 명함, 비스무리한거 아닐까. ​ 2학년이 수업을 듣는 곳은 여기서 거리가 좀 되는데도 직접 온 듯했다. ​ 그녀의 태도에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모든 것이 당연한 듯한 태도. ​ 그러나 나는 답했다. ​ “안 할래요.” ​ “그래, 같이 동아리방으로….” ​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 “… 혹시 방금 뭐라 했어?” ​ “안 한다고요.” ​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 예상 못 한 반응이었다.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곳. 심지어 초대받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도 부지기수였으니까. ​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별다른 감흥 없이 말을 이었다. ​ “어디 들어갈지 정해서요.” ​ 나는 이미 들어갈 동아리를 정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는 갈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어차피 성적에 반영되는 동아리 점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하니, 가입하지 않으려 했는데…. ​ 방금 이 이벤트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이 정도의 주목도면, 거의 확실해졌다. ​ ‘윤채하가 온다.’ ​ 나는 곧 이곳으로 올 그녀와 같은 동아리에 들어갈 것이다. ​ “저… 그니까, 친구야. 이게 무슨 제안이냐면….” ​ 눈앞의 여선배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 설명을 이어갔다. ​ 살짝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질척거릴 리가 없는데. 보통 거절하면 뒤도 안 보고 떠나가는 게 프런티어였다. ​ ​그때 누군가가, 옆에서 내민 카드를 반려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 시온이었다. 그녀는 선배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 “죄송합니다. 선배님. 이미 같이하기로 해서요.” ​ 시온은 웃는 얼굴로 선배를 밀어냈다. 선배는 아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시온은 곧장 내 손목을 잡고 걸어갔다. ​ 어느 정도 복도를 벗어났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 “흐··· 아니 저 선배님은 왜 저렇게 질척거리는 거야?” “싫다는데 붙잡고 뭐 하는 건지 참.” ​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 “누가 같이 한다고 했어.” ​ 그녀는 흠칫했다. ​ “흠흠, 우리 동아리 같이 하기로 한 건 맞잖아? 저번엔 좀 불미스러운 동아리긴 했지만, 내가 몇 개 알아봤거든.” ​ 우리가 도착한 곳은 가온의 메인 홀. 그곳에서는 교류의 장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모니터가 있었다. 왼쪽에는 칼로스, 오른쪽에는 가온. 각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색깔이 반짝이며, 학생들의 이름이 화려한 이펙트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 -오오! ​ 학생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재잘거리던 시온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방금 막, 가온 랭킹 10위였던 데이브가 칼로스로 넘어간 순간이었다. ​ 그는 마법을 다루는 학생. 결국 가온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칼로스를 선택했다. 그의 이름이 빛을 내며 칼로스로 향했다. ​ 나는 기다렸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시온도 그 장면을 유심히 보더니,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왔다. ​ “… 뭐 없지 않아? 교류의 장. 딱히 관심 가질만한 건….” ​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 순간. ​ "어?" "저거 진짜야?" ​ [1위 주서준] [5위 윤채하] ​ 푸른빛을 머금은 두 개의 이름이 서서히 가온으로 이동했다. ​ 그리고, 그걸 함께 보고 있던 시온이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다시 모니터를 확인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린다. ​ 그리고 천천히— 정말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마침 나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 둘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쳤다. ​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 “아쉽지만 동아리는, 같이 못 할 것 같네.” ​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 푸른 빛을 머금은 이름들이 잔상을 남긴 채, 가온에 자리 잡았다. ​ 나는 조용히 화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