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시우가 죽었다. ​ ‘아.’ ​ 10년 전의 내게 묻고 싶다. ​ ‘주인공 없이 악신을 죽일 수 있나요?’ ​ 아마 엿이나 처먹으라 하지 않을까. 결국 내 10년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주인공은 마인의 회유와 침식을 이기지 못했다. ​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살렸을 텐데. 하지만 시스템마저 깨져버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더 이상 인간이라 볼 수 없다는 것. ​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마음속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 ‘너무 빠르다.’ ​ 보통 침식이 시작되면, 몇 달간은 내부에서 마기를 관조한다. 그리고 적절한 때가 되면 악마화가 진행된다. 그런데 저 바닥에 떨어진 보라색 팔을 보라, 악마화는 침식과 동시에 시작됐다. ​ 이것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 정도가 있겠다. 첫 번째는, 마기에 저항할 마나가 턱없이 부족해서 실패했다는 것. 하지만 성시우는 재능도, 무엇도 없었지만 마나 하나만큼은 많았다. 따라서 이건 아니고. ​ 두 번째는…. 악신이 이놈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을 가능성. 보통 악신은 은막 뒤에서 나오질 않는다. 흥미로운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 그런데 시스템을 박살 내면서까지 개입했다? ​ 이건 좀… 이질적인 부분이다. ​ “대체 무슨….” ​ 팔라딘이 기함했다. 마침 나도 기함하고 있었는데. ​ “침식 초기였습니다. 지금 이건… 사람을 죽인 것이나 법적으로는 크게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저희야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만약 되돌릴 수 없다는 확실한 검사 결과를 받지 못한다면, 처분을 피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팔라딘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녀도 성시우를 죽인 걸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 판단으로 인해 피해를 볼까 걱정하는 느낌. ​ 손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좋아 보였다. 그냥 쳐 누워있고 싶었지만,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러나 팔라딘 뒤에 서 있던 천여울이 한발 빨랐다. 그녀는 성시우의 시체로 다가섰다. ​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마치 더러운 것에 닿기 싫다는 듯, 손가락을 배배 꼬면서 접근하다가— 결국 완전히 닿기 전, 그 손을 멈췄다. 손에서 푸른색 기운이 스르륵 흘러나온다. ​ 천여울은 눈을 살짝 감았다. 그리고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그러네요.” ​ 그녀는 팔라딘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 “늦었어요. 이미 내부가 더럽습니다. 많-이.” ​ 팔라딘의 얼굴이 굳었다. ​ “되돌리기는 늦은 상태였던 것 같아요. 해인 님의 판단이 맞았습니다.” ​ 천여울은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팔라딘을 바라봤다. 나와의 친분을 일체 티내지 않는 태도. 그 말에 팔라딘은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다. 성녀의 의견에 일말의 토도 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했고. ​ “게다가… 상당히 고위 악마가 달라붙은 것 같네요. 위험할 뻔했어요.” ​ 그때, 반대편에 서 있던 강아린이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성시우의 시체를 흘깃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고 천여울을 향해 입을 열었다. ​ “그럼 해인이 교단의 미적지근한 판단을 정확히 진단해 위험 요소를 제거한 셈이네요?” ​ 순간, 팔라딘의 어깨가 움찔했다. 강아린은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덧붙였다. ​ “이거… 벌이 아니라 상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 천여울의 뒤에 서 있던 성자들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정작 천여울은 강아린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 천여울은 옆으로 시선을 돌려 정해인을 바라보았다. ​ “그러게요….” ​ 천여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 “하마터면 교단의 명성에 누가 될 뻔했어요. 저희 교단에서 포상하는 게 적절하겠네요. 그렇죠?” ​ 그녀는 팔라딘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 나는 바닥의 시체를 가리켰다. ​ “우선, 저 사체를 태워야 합니다. 교단의 성화(聖火)로, 털끝 하나 남지 않도록.” ​ 성화(聖火). 마인의 존재를 근본부터 태우는, 교단의 신성한 불꽃. 편린만큼 강력하진 않고, 전투용은 또 아니지만 침식당한 자를 정화하는 기능만큼은 확실했다. ​ 그걸 완벽히 하기 전까지는, 안심하기 이르다. 마인이란 놈들은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 ​ 팔라딘이 끄덕였다. ​ “물론입니다. 교단 내의 제사장이 직접 절차를….” ​ 제사장…. 교단의 제사장이 직접 성화를 내리면, 대부분의 마기는 그 불길에서 사라진다. ​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 한해서다. 이번 케이스는 일반적인 침식이라 보기 어렵다. ​ 살짝 아쉽다, 찝찝하기도 하고. ​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천여울이 입을 열었다. ​ “아니요, 제가 직접 할게요.” ​ 팔라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쩔쩔매며 천여울을 말리기 시작했다. ​ “성녀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제사장이 해도 충분히….” ​ “아니요.” ​ 천여울은 단호했다. ​ “고위 악마가 관여한 것으로 보여요. 제가 직접, 교단의 성화로 불태우겠습니다.” ​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덧붙였다. ​ “성기사님도 아시죠?” “마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 그 말에 팔라딘은 결국 아무 말 없이 한발 물러섰다. 나 또한 만족스러웠다. 천여울이라면, 확실하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강윤혁이 강아린의 뒤에서 나왔다. ​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공간 전체를 장악하는 것 같은 분위기. 강렬한 존재감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가 입을 열었다. ​ "막 마지막 모라스를 제거했다고 합니다. 본체의 추적은 역시 실패했다고 하군요." ​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스를 놓친 건 어쩔 수 없다. 원작에서도 그가 숨어있는 위치는 묘사되지 않으니까. 애초에 단번에 잡을 놈이 아니다. 그가 연락을 취한 것인지, 협회와 가온의 인원들, 교단의 다른 인원들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성시우의 사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 “수습하겠습니다.” ​ 교단의 인원이 신성력이 담긴 관을 준비했다. 사체를 옮기기 위해, 조심스럽게 성시우의 팔을 들었다. ​ 그 순간. ​ -치이이익! ​ 검게 물든 흔적이 피어올랐다. 연기가 일었다. 불순물이 타들어 가듯, 살갗이 빠직 갈라졌다. ​ “…….” ​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성시우의 피부가 부스러졌다. 죽었음에도, 그 속에는 여전히 마기가 잔존하고 있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 예상한 죽음은 절대 아니다. ​ 애정이 담겨 있었고, 기대했던 녀석이 죽는 걸 바라보는 건. 딱히, 즐거운 장면은 아니었다. ​ ​ ​ ​ *** ​ ​ ​ ​ 나는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 시험은 중단됐다. 잠정 중단. 틀어놓은 TV에서는 오늘 있었던 습격 사태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 -희생자는 한 명… 끝까지 마인과 교전하다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 이번 습격에 대한 나의 대비는 객관적으로 보면 성공적이었다. 메두사의 빠른 처치, 이후 모라스 추격으로의 자연스러운 전환. 실제로 희생자가 단 한 명뿐이라는 점도, 상당히 유의미한 결과였다. ​ 그러나, 그 ‘한 명’이. ​ “왜 너냐고 씨발….” ​ 나는 누운 상태로 머리를 감쌌다.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인물을, 가장 허무하게 보내버렸다.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잘못인가 싶기도 하다. ​ ‘더 좋은 방법이 있었나?’ ‘아니면, 성시우 옆에 붙어 있었어야 했나?’ ​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그때. ​ -삐빅 ​ 워치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워치를 슬며시 들어 올렸다. ​ 시험은 중단됐지만, 우습게도 길드들의 입찰은 멈추지 않았다. 게시판에는 오늘 활약한 학생들의 영상이 끝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 이것도 학원 측의 전략이었다. 이번 사건에 대한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자연스럽게 다른 화제를 유도하는 것. ​ 그리고 그 클립들은, 그들의 몸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 나는 조회수 순으로 글들을 정렬했다.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게시글. ​ [4시간 전, 조회수 3,353,211] ​ 제일 위에 떠 있는 것은, 내가 메두사의 목을 따버리는 영상이었다. ​ 영상의 사각에서 한 인영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급히 돌려 찾으려 했지만, 촬영자는 피사체를 놓쳤다. 그리고 화면이 흔들린 끝에, 겨우 잡아낸 장면. 촬영자는 황급히 하늘로 카메라를 돌렸다. ​ 5개의 분신이 메두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단칼에 목을 벴다. ​ -우와…. ​ 촬영자의 감탄이 들린다. 댓글 창은 폭주하고 있었다. ​ [sdff221]: 이 학생 대체 누구야? 랭킹에도 없는데? [가리비구이]: 입찰 올라오는 거 봐, 전대 용사급이다 이거. [alex588]: come to America. ​ 나는 입찰 순위를 확인했다. ​ “허….” ​ [청풍대] → [정해인] 800,000,000 KRW 입찰. [아르카디아 교단] → [정해인] 1,000,000,000 KRW 입찰. [맹주 길드] → [정해인] 1,200,000,000 KRW 입찰. [로터스 길드] → [정해인] 1,500,000,000 KRW 입찰. ​ 아주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 ‘청풍대…?’ ​ 폐쇄적이라고 악명 높은 유하나 가문의 호위대. 그곳에서도 입찰이 들어왔다. ​ 그러나 압권은 따로 있었다. ​ [뱅퀴셔] → [정해인] 5,000,000,000 KRW 입찰. ​ 미친. ​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누워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곧장 책상으로 향했다. ​ 노트를 펼치고 상황을 정리했다. 인정하자. ​ 10년 동안 준비한 성시우 차도지계는 망했다. 더는 남의 칼을 빌릴 수 없다. ​ 노트의 한가운데, 성시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주변에는 유하나, 강아린, 천여울. 그리고 각종 기연과 무공들이 화살표로 그에게 향해 있었다. ​ 일종의 마인드맵 같은 느낌. ​ 나는 볼펜을 툭툭 두드리며 고민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까지 생각했다. ​ 그리고, 펜을 단호히 쥐었다. ​ 가운데 적힌 성시우의 이름을 지웠다. ​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름을 채워 넣었다. ​ ‘정해인.’ ​ 편린을 흡수했다. 성시우가 채우던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건 사실상 나밖에 없다. ​ 나는 볼펜을 책상 위에 던졌다. ​ “나도 모르겠다 이제.” ​ 이게, 아마 최선의 판단일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