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것 없는 습격이었다. ​ 그맘때쯤, 특이한 습격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이었으니까. ​ 다만 이번에는 장소가 썩 좋지 못했다. 그리고 협회장이 인질로 붙잡혔다. ​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최악인데, 그 모든 조건이 정해인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 천여울은 그에게 물었다. ​ “직접, 갈 거지?” ​ “가야지.” ​ 그는 늘 그랬다. ‘가야 한다고.’ 인류는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 이제는 이름 있는 영웅 하나하나가 급한 상황. 그런 와중에 그의 존재는 결코 빠질 수 없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마인들도 그를 잘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끄집어내 사살하려 했다. ​ 강아린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 그때쯤, 그녀들은 전부 마(魔)를 멸하는 병기가 되어 있었다. 정해인이 손수, 몇 년을 공들여서. 하나하나 만들어낸, 그의 작품이자. 그의 것들. ​ ‘부족해.’ ​ 따라서, 편린을 흡수한 그들이 존재하는 이상, 정해인이 최전선에 설 필요는 없었다. ​ 그랬어야 했다. ​ 그러나, 한 가지 공백이 생겨버렸다. 정해인이 가장 공들여 키웠던 남자. ​ 성시우. ​ 그가 사라졌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전조도, 이유도 모른 채. ​ 정해인은 상심했다. 티를 크게 내지는 않았다. ​ 그러나, 그녀들은 알고 있었다. 새벽의 서재.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 속, 유일한 빛은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 하나뿐이었다. ​ 그 빛 아래, 정해인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늘 곧고 단단했던 등이, 이상할 정도로 무겁게 구부러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도, 시선이 그 위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손끝으로 미간을 누르며 깊이 생각에 잠긴 채. ​ 그녀들은 봐버렸다. ​ 그의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 천여울은 문틈 너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유하나는 서재 앞까지 갔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강아린은 말없이, 훈련장으로 향했다. 하시온은 이를 악물며 활을 들고 뛰쳐나갔다. ​ 결국 성시우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정해인은 더욱 스스로를 혹사했다. ​ ‘금방 올 거야.’ ​ 정해인은 성시우가 돌아올 것이라 믿었지만….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자리는 그대로 비어 있었다. ​ 그러나 다행히도 습격은, 예상보다 수월하게 정리됐다. 곳곳에서 마인들이 토벌당했고, 영웅 협회장의 신변도 무사히 확보됐다. 긴박했던 공기가 점차 느슨해졌다. ​ 그 순간. ​ -툭. ​ 투박한 소리였다.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물체. 하얗게 질려버린 얼굴, 넋이 나간 눈동자. 협회장의 머리. ​ 순간, 모든 소리가 멎었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경악조차 삼킬 틈 없이, 그다음이 들이닥쳤다. ​ -콰과과광! ​ 정해인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가공할 힘이 담긴 공격. 그는 즉시 몸을 틀어 방어 태세를 취했다. 강렬한 충격이 창을 타고 전해졌다. ​ 그가 선 자리가 박살 났다. 굵은 금이 가며, 땅이 움푹 꺼졌다. ​ 그리고 모두가,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기운이 서린 실루엣. 붉은 안광. 그의 신체에서 마기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 “… 성시우.” ​ 그는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돌아온 것 또한 아니었다. ​ 보라색으로 물들어 버린 신체와, 인간이라 보기 힘들 정도의 마기. ​ 그는. 변절했다. ​ 그러나 그녀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시선을 돌려 정해인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 성시우 따위, 알 바 아니었다. ​ 그가 힘들까 봐. 그가, 괴로울까 봐. 자신들의 감정보다, 그의 마음이 먼저였다. ​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먼지를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차분히 고개를 들어 성시우를 바라봤다. ​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 *** ​ ​ ​ ​ 성시우는 무구 수련 첫 수업 날,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처음으로 맛봤다. ​ 그는 분노했다. ​ 분노하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 분노를 갈고 닦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 정해인을 이기기 위해서. 목표는 단 하나였다. 그를 자극하는 게 목표였던 정해인의 계획은, 방향성은 달랐지만, 얼추 성공한 셈이었다. ​ “성시우….” ​ “꺼져.” ​ “어 그래.” ​ 성시우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인간처럼 무시했다. ​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정해인의 모의 던전 실습을 직접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정해인은, 자신보다도 랭킹이 높은 두 명의 학생을 압도적으로 제압했다. 속에서 천불이 나기 시작했다. ​ ‘넘어야 한다.’ ​ 그는 결심했다. 훈련은 충분히 했다. 그래서 중간고사 때, 그를 이기기로 했다. 이 무대에서, 그를 꺾고 자신이 위라는 걸 증명하겠다고. ​ 그를 대상으로 지목했다. ​ 그러나, 거절당했다. ​ “이 새끼가….” ​ 그러나 다음 순간, 경기장 안의 상대를 보고 기함했다. ​ ‘요한…?’ ​ 정해인의 상대는, 자신이 아닌 랭킹 2위의 요한이었다. 성시우는 주먹을 꽉 쥐고 경기를 지켜봤다. ​ 정해인은, 요한을 단숨에 제압했다. ​ 그 순간, 크루세이더가 광기에 찬 눈빛으로 정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 성시우도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 그러나, 그 앞을 막아선 존재가 있었다. ​ “왜…?” ​ 성시우의 눈이 흔들렸다. 박광철이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더니, 그는 이내 정해인을 툭 건드리며 어깨동무를 했다. 자못 친해 보이는 자세. ​ 최고인 자신이 들어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곳. 세계 최강의 집단인 뱅퀴셔. ​ 성시우는 늘, 뱅퀴셔에 가입하는 것을 갈망해 왔었다. ​ 그러나, 그조차도 정해인의 것이었다. ​ 그 순간, 가슴 속에서 거대한 허무감이 밀려들었다. ​ 그날 밤. 성시우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정해인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다음 날이 되어서도, 그는 정처 없이 걸었다. ​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몰랐다. ​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 더욱 깊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존재를 만났다. ​ 가면을 쓴 그는 자신을 모라스라 소개했다. ​ “방황하시나요?” ​ 그는 성시우에게 속삭였다. ​ “드리겠습니다. 힘을.” ​ 순간. 가슴이 요동쳤다. ​ 환희가 차올랐다.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모라스의 뒤편에서 검은색 손이 뻗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손을 향해 손을 뻗을 참이었다. ​ -슥직! ​ “야, 이 새끼야!!” ​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가. ​ 한순간이었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힘을 얻을 수 있었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 ‘또 너구나.’ ​ 또 녀석이, 내 힘을 뺏어갔어. 내 기회를 뺏어갔어. ​ 눈앞이 일그러졌다. 머리 위로, 신성한 빛이 떠올랐다. 시스템이 개입했다. ​ [위기 감지. 사용자를 보호합니다.] ​ 신성한 기운이 성시우를 감쌌다. 몸이 움찔하며 경련했다. ​ "씨발…!" ​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통이 밀려왔다. ​ “괜찮아?” ​ 그가 급하게 달려와 성시우의 상태를 살폈다.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 -아직 괜찮…. -시스템이 잘 해주…. ​ 그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해진다. ​ 그리고 저 멀리, 손이 튀어나온 저편,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 -받아들여라. ​ ‘받아들여? 뭘?’ ​ -내 아이야, 이 힘을 받아들여라. ​ 그때,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단순한 문제였다. 받아들이면 된다. ​ [경고. 비정상적인 마력 감지.] [위험. 시스템에 오류가 감지되었습니다.] ​ [강제 정화….] ​ [… 실패.] ​ 빛이, 깨졌다. ​ 정해인은 눈을 부릅떴다. 머릿속이 비명을 질렀다. ​ 시스템이. 산산이 부서졌다. ​ 그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 "……." ​ 정해인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 성시우는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몸에서 질척하고 어두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 손을 뻗는다. ​ -콱! ​ 정해인의 목을 붙잡았다. ​ “…!” ​ 갑작스러운 충격에, 정해인의 몸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 성시우의 팔의 색이 점점, 보라색으로 물들어간다. 마기에 잠식되고 있다는 뜻이다. ​ 성시우의 손아귀가 점점 조여들었다. 정해인은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 그럼에도, 그는 성시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 “정신 차려… 등신….” ​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시스템이 깨졌다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건지. ​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 이 세계의 주인공의 끝이.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으니까. ​ 그는 자신의 상식을, 부정하고 있었다. ​ “큭.” ​ 성시우가 비웃었다. 그의 붉은 안광이 이글거렸다. ​ “죽어 그냥.” ​ 쥐어짜는 손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간다. 정해인의 손에도 힘이 들어간다. ​ 그때였다. ​ -콰과광!!! -챙! ​ 하늘에서 빛이 쏟아진다, 강렬한 압력이 공간을 짓누른다. 신성한 빛으로 휘감긴 거대한 망치와, 검은색 창이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졌다. ​ -으적! ​ 성시우의 팔 한쪽이 그대로 찢겨나갔다. ​ “으… 으아아아!!!!” ​ 그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 그때, 한 목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 “침식입니다.” ​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일전에 정해인과 만났던 팔라딘. 그리고 그 뒤로, 천여울을 필두로 한 성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 이거 위험할 뻔했군.” ​ 그 반대편. 맹주의 길드장 강윤혁이 손을 뻗은 채로 있었다. 그 옆에는 강아린도 함께였다. 강아린이 무심하게 성시우를 내려다본다. 그 시선에는 차가운 경멸이 어려 있었다. ​ 성시우는 팔이 뜯겨 나간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팔라딘이 손짓하자, 그의 몸에 백색의 족쇄가 하나둘씩 채워졌다. ​ 강윤혁은 물었다. ​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 마인, 그리고 마인에게 세뇌당했거나 침식된 이들의 처분은, 기본적으로 교단의 지침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 쉽게 죽일 수 있지만, 마기의 잔해가 남아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으니까. ​ 팔라딘은 고민했다. 초기 침식이라면 예후가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라색으로 물든 팔을 보아하니, 악마화(惡魔化)의 진행이 너무 이르다. 이런 경우는, 사살과 구금ㅡ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다. ​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 “아무래도 구금이….” ​ -콰직! ​ 그러나 그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정해인의 창이, 성시우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 “마인입니다.” ​ 그는 짧게 말했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 정해인은 결국 현실을 받아들였다. ​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시스템이 망가졌다면, 그건 끝이다. ​ 교단의 조언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 침식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건. 정해인, 그 자신이었으니까. ​ 모두가 침묵했다. ​ 그러나, 그 공간에서 단둘. 천여울과 강아린만이— 눈빛이 일그러졌다. ​ 그녀들의 표정은, 조용한 환희로 물들어 있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