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으로, 유하나와 천여울. 그 둘에게만 가면 된다. 미안한 말이지만, 주요 인물만 지키면 됐으니까. ​ 원작에서 주요 인물에 대한 모라스의 유혹은 그 두 사람에게만 향했다. 이 세계에서도 표적은 동일할 것이다. ​ 학생들의 모습이 시야에 스친다. ​ 우선 유하나에게 먼저 가고 있다. ​ ‘일단 가까워.’ ​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천여울은 어느 정도 욕망을 채운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여러모로 교단 내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커진 상태니까. ​ 그에 비해, 유하나의 욕망은 언제나 부족하다. 그녀의 ‘갈망’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다. ​ 무(武)에 대한 갈망은 그런 것이다. ​ 그 갈증을 모라스가 노릴 것이다. 나는 속도를 올렸다. ​ 마침내 B 경기장에 도착했다. 대피령이 내려져 경기장은 텅 비어 있었다. 관중석에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 그리고 경기장 중앙, 보라색으로 막이 쳐져 있다. ​ 나는 눈을 떴다. 일체지각(一切知覺). 보라색 장막 너머, 그 안의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 유하나. ​ 검을 들고, 모라스를 마주한 채 서 있었다. 단단히 디딘 발끝.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운. ​ 나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 “…좋아.” ​ 이러면…. ​ 나는 그대로 관중석에 착석했다. 만약 그녀가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내가 개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유하나는 유혹을 이겨냈고, 검을 들었으니까. ​ 모라스는 무력적으로 강한 마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볼 상대는 아니다. 따라서, 유하나에게 좋은 상대가 되어줄 것이다. ​ 그녀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붉게 피어난 동백의 결(結). 악을 멸하는 칼날. ​ 화접검(花蝶劍). ​ 그녀가 내게 배운 검술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가문의 검법이 아닌, 오직 내가 가르친 기술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 그리고, 완벽하게 그 기술만으로 모라스를 제압한다. ​ 나는 두손에 땀을 쥐고 그녀를 지켜본다. ​ ‘좀 더, 좀 더 빠르게.’ ​ 마음속으로 상상할수록, 그녀는 그대로 움직였다. 내가 바라는 그 방향으로. ​ 이건…. ​ 나는 문득 깨달았다. 이게 스승이 제자의 성장을 지켜볼 때의 기쁨인가. ​ 그녀가 내 색으로 완전히 물들었음이 느껴진다. 뭔가 마음 한구석이 몽글해지는 기분. ​ -서걱 ​ 그러다 마침내, 유하나의 검이 모라스의 목을 갈랐다. 마지막 일격까지, 내가 어제 알려줬던 휘두름이었다. ​ “기특하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막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 ​ ​ ​ *** ​ ​ ​ ​ 창고와도 같은, 빛 하나 들지 않는 공간. 눅눅한 공기. 곰팡이의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 후드를 쓴 마인, ‘아크투’. 그리고 거한의 마인, ‘가니안’. ​ 그들 앞에는 목재로 만든 뱀 인형이 놓여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목이 잘린 채 바닥을 뒹굴고 있다. ​ 메두사는 실패했다. ​ 둘은 말없이, 어둠 속에서 앉아 있는 존재를 바라봤다. ​ 모라스. ​ 그라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 “ㅡㅡ쿨럭!” ​ 갑작스러운 기침 소리. 모라스가 몸을 움찔하며 앞으로 숙여졌다. 그리고,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 “모라스님?!” ​ 아크투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모라스는 피범벅이 된 손을 들어,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 “분신 하나가, 사망했습니다.” ​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떴다. ​ “게다가, 기억까지… 돌아오지 않는군요.” ​ 아크투와 가니안의 얼굴이 굳었다. ​ 분신이 사망하거나, 복귀하면 본체로 기억이 돌아온다. 그것은 모라스가 살아온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는 ‘절대적인 원칙’이었다. ​ 그러나 지금.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 ​ 그의 눈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 가니안과 아크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 그는 피범벅이 된 손끝을 닦아내며 조용히 물었다. ​ “메두사는, 잘 되고 있습니까?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 그러나 아크투와 가니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릴 뿐. ​ “…잘 되고 있습니까?” ​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반응은 같았다. ​ 침묵. 그건 명백한 대답이었다. ​ 모라스의 눈이 점점 커졌다. ​ “ㅡㅡㅡㅡㅡ!!” ​ 거대한 고함이 창고를 가득 채웠다. ​ 그때였다. ​ “쿨럭ㅡㅡ!! 쿠에에엑ㅡㅡ!” ​ 모라스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피를 토했다. 아크투와 가니안이 경악했다. ​ “모, 모라스님?!” ​ 그러나 모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 조금 전, 하나가 더 죽었다. ​ ​ ​ ​ *** ​ ​ ​ ​ 이곳은 부지 내에 위치한 아르카디아 신전이었다. 유하나에게 이어, 천여울에게도 모라스가 접근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러 뛰어왔다. ​ 그러나, 도착한 순간 깨달았다. ​ ‘끝났네?’ ​ 천여울은 이미 모라스를 제압한 후였다. ​ 나는 그녀가 위험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돌아서려 했다. ​ 그런데. ​ “해인?” ​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고, 이내 뒤돌아보기도 전에— ​ “잠시.” ​ 손목이 붙잡혔다. 따뜻한 감촉. 그녀의 손끝이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똘망똘망한 눈동자. 맑은 호수처럼 깊은 눈망울이, 살짝 흔들렸다. ​ 그리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 “미안해….” ​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나는 당황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 천여울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듯한 얼굴. ​ ‘아.’ ​ 나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 일전에 크루세이더들이 나를 공격했던 일.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거겠지. 크게 보면, 요한이 그녀에게 품은 감정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기도 했으니까. ​ “이 죄는 꼭 내가 몸으로 갚….” ​ “괜찮은데.” ​ 나는 단호하게 끊었다. ​ 별생각 없었다. 더욱이 그녀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 천여울은 내 반응에 멈칫했다. 눈망울이 살짝 흔들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 “…그래도.” ​ 그녀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 “넌 내게 십자가도 줬고, 여러모로 믿음을 주는데… 난 거기에 부응하지 못한 것 같아.” “…이런 나한테 실망한 거 아니야?” ​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 “천여울.” ​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돼.” ​ “….” ​ “그게 가장 확실하게 갚는 방법이야.” ​ 나는 장난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 적어도 내가 등장인물에 실망할 일은 없다. 그녀들은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졌으며, 시간이 지나며 성장하는 존재들이니까. 내가 어떻게 실망하겠는가. ​ 나는 시선을 돌렸다. ​ 그때 바닥에 있는 십자가의 잔해를 발견했다. ​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었다. 이거, 설마. ​ 재빨리 몸을 숙여 십자가의 가루를 손끝으로 떠올렸다. 부드러운 가루가 손바닥 위에서 흩어졌다. ​ 나는 고개를 들었다. ​ “…이거.” ​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천여울을 바라봤다. ​ “흡수한 거야?” ​ 천여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 “잘했어.” ​ 진심이었다. ​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정말 잘해줬다. 고작 크루세이더의 소란 따위보다, 이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거리감을 두듯 가볍게 몸을 뗐다. 그래도 성녀니까. ​ 그녀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자, 천여울이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 아까보다 살짝 달아오른 볼.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작은 움직임.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모습. ​ 그녀는 뭔가를 억누르듯,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 “안 되겠어….” ​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게 뻗어졌다. ​ 그때. ​ -쿵! ​ 신전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 "성녀님!" ​ 팔라딘 들이 뛰어 들어왔다. ​ “괜찮으십니까?!” ​ 그들의 시선이 먼저 천여울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곧장 내 쪽으로도 시선을 옮겼다. ​ 천여울은 조용히 그들을 바라봤다.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 “갈게.” ​ 이제부터 성녀의 보호는 팔라딘이 책임질 것이다. ​ 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신전 밖으로 걸어 나왔다. ​ 외부 현장은 얼추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팔라딘이 전하길, 추적에는 실패했다고 한다. 워낙 마력이 적은 마인 개체라 잡기가 어렵다고. ​ 게다가 곳곳에서는 모라스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거의 끝났네.” ​ 나는 부지 내를 돌며 혹시 문제가 없는지 살폈다. 주요 인물들은 이미 안전이 확인된 상태. ​ 강아린은 맹주가 바로 옆에서 지키고 있었고, 하시온은 뱅퀴셔가 보호 중이었다. ​ 아무런 문제가 없다. ​ 나는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순찰하기 위해. 그리고 부지의 숲. ​ 그곳에서— ​ 성시우와 마주쳤다. ​ 그는 마인과 대치 중이었다. ​ 그런데, 유하나와는 달렸다. 유하나는 검을 들고 교전에 응했지만, 성시우는 검을 뽑지도 않고 있다. ​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 “이런… 씹.” ​ 그의 시선이 마인에게 고정되어 있다. 마인은 천천히,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다. 성시우는 전투는커녕,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간과했다. 그가 주인공일 때는 직접 마인을 찾아다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 성시우는 기본적으로 주인공 보정으로 인해 마나 용적이 어마어마하다. 이는 마인이 가장 선호하며, 추구하는 대상이었다. ​ 시스템의 비호를 받는 그였기에, 정신 지배에는 당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 보기 좋게 틀렸다. ​ 나는 땅을 박찼다. ​ “야, 정신차려!!” ​ 온 마나를 실어 날린 투창. 창이 허공을 가르며 질주했다. ​ -슥직! ​ 순간, 창이 펼쳐진 은막을 찢어버린 후 그대로 마인의 목을 꿰뚫었다. ​ 창이 박살 나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성시우를 바라봤다. ​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 숨이 거칠다. ​ 성시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마를 감싸 쥐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