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숲, 그곳의 중앙. 의지할 곳은 달빛뿐이었다. 사람들은 있었으나, 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 "오셨습니까." ​ 숲의 그림자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일렁이며, 한 명, 두 명, 세 명—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면을 쓴 자, 후드를 뒤집어쓴 자, 그리고 거대한 체격의 사내. ​ 가면을 쓴 남자가 중심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 그의 주변 공기마저 미묘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 후드를 쓴 마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계획은 순조롭습니까?" ​ 모라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마인 내부에서도 드물었다. 마인 중 중간급의 지위를 지닌 자. 유혹에 특화된 그는 가장 까다로운 적 중 하나였다. ​ 후드를 쓴 마인이, 긴장한 채 가면의 남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저희야… 모라스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만… 메두사는 확보하기 어려운 놈이었습니다.” ​ 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가면을 쓴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 “그래서요?” ​ 그의 말투는 나른했다. ​ “계획을 제안하셨고, 저는 거기에 맞는 최선의 플랜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와서 가능성을 묻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 체격이 큰 마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거대한 손을 비비며, 마치 변명하듯 말을 이어갔다. ​ “… 그게 아닙니다. 모라스님 저희는 그저 확신을 얻고싶어서….” ​ "확신?" ​ 가면의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나지막이 웃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확신이라…." ​ 그의 손끝이 허공을 스치자, 공기 중에 희미한 마나가 일렁였다. ​ "여러분들이 놈들의 발목만 잡아둔다면, 모든 것은 손쉽게 해결될 겁니다." ​ 그의 말이 끝나자, 짧은 침묵이 흘렀다. 후드를 쓴 마인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 “정말… 학생들이 넘어오겠습니까?” ​ 그 순간, 가면을 쓴 자가 웃었다. 가면에 가려진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미묘하게 비틀린 웃음소리는 선명했다. ​ "욕망이 있는 한, 거부할 수 없겠죠." ​ 그는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퍼지는 마력의 잔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다는 착각 속에 빠져." "결국 변절하게 될 겁니다." ​ 그 말에 두 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체격이 큰 마인은 손을 움켜쥐며 흥분을 삼켰다. ​ “그러니, 제발. 메두사나 잘 소환하세요.” ​ 모라스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숲의 나뭇잎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마인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 *** ​ ​ 나는 지금, 가온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VIP 룸. 그 건물 위에 앉아 있다. ​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가온 부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 여기에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 “다 보이니까.” ​ 아래를 내려다봤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바라보는 학생들의 인파. 곳곳에서 움직이는 인파의 흐름과 흐릿하게 들려오는 함성. ​ 우선, 마인이 메두사를 소환할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다. ​ 네 가지의 후보가 존재한다. A 경기장 광장, B 경기장 광장, C 경기장 광장, 그리고 중앙 광장. 그 네 개의 후보 중에서 랜덤적으로 한 곳에 메두사는 소환된다. ​ 따라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기에, 모든 곳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는 여기로 올라왔다. ​ 새벽부터 힘들게 등정한 보람이 있다. ​ 이번 작전은 속도가 생명이 될 예정이다. 메두사는 어디까지나 '어그로'에 불과하다. 진짜 위험 요소는 따로 있다. ​ ‘모라스.’ ​ 간부도 아니고 전투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상당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마인이다. ​ 매혹과 분신. ​ 그게 녀석의 핵심 능력이다. 부지 내 모든 영웅이 메두사에게 쏠릴 때, 그는 우수하거나, 또는 결핍된 학생들에게 접근한다. 결핍된 욕망을 간파하고,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처럼 유혹하며 변절을 종용한다. ​ 그의 표적이 될 학생 중 주요 등장인물은 천여울, 유하나가 있다. 천여울에게는 교단의 최고의 지위를 욕망으로 제안하고, 유하나에게는 압도적인 무를 욕망으로 자극한다. ​ 그 외에도, 여러 학생이 표적이 될 것이다. ​ 그러나 내가 모든 곳을 막을 순 없다. 따라서, 빠르게 메두사를 처치하고 분위기를 환기시켜 놈을 막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하르페를 얻은 이유다. ​ 멀리서 희미하게 사회자의 진행 멘트가 들려온다. 지금쯤 각 경기장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팔짱을 끼고, 눈을 가늘게 뜨며 광장을 바라보았다. ​ 이제부터,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 ​ ​ ​ ​ *** ​ ​ ​ ​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VIP룸 내에 마련된 휴게실. 그곳에는 아르카디아 교단의 용사 파 주교 성영일, 그리고 크루세이더 제이든이 있었다. ​ 탁자 위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한 장은 교단 내부에서 올라온 ‘크루세이더 제이든’의 직위 박탈 청원서, 또 한 장은 가온 아카데미에서 발송한 공식 항의 및 징계 요구서였다. ​ 문서 곳곳에 찍힌 인장이 공식적인 압박을 의미하고 있었다. ​ 제이든은 뒷짐을 진 채, 묵묵히 주교 앞에 서 있었다. 그의 한쪽 뺨은 이미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 -짝! ​ 주교의 손바닥이 다시금 제이든의 얼굴을 후려쳤다. 맺힌 피가 입술 끝에서 번졌다. ​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딴 짓을 벌였다고?” “할 거면, 조용히 처리했어야지.” ​ 주교가 분노한 지점은 그 부분이었다. 행동 자체가 아니라, 너무 많은 사람 앞에서 일을 터뜨렸다는 것. ​ 그것이 교단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한 멍청함에 대한 질책이었다. ​ 제이든은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입을 열었다. ​ “… 저는 크루세이더입니다. 요한님을 위해 행동했을 뿐입니다.” ​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 “상대는 과했고, 그를 저지하지 않는다면 교단의 위상이 떨어질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죽일 의도는 없었습니다.” ​ 주교는 이를 악물었다. ​ 주교 또한 요한이 그 정도로 당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처음 본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내 진정했다. ​ 문제는 제이든이었다. ​ 무식한 놈을 거둬다 키웠다. 알고는 있었다. 교단과 용사에 맹목적인 이놈은, 다루기 쉬운 칼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는 걸. ​ 하지만, 이 정도로 제멋대로 움직일 줄은 몰랐다. ​ 안 그래도, 그 여우 같은 천여울. 요즘 들어 그녀 때문에 교단 내부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 그런데 제이든까지 사고를 치며 불을 지를 줄은— ​ -짝! ​ 더욱 강한 타격이 날아갔다. 제이든의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 “그딴 논리가, 대체 너를 언제까지 보호해줄 것 같나?” ​ 책상을 짚은 주교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 "사방이 이리 떼다." "교단 내에서도 벌써 네 정직을 요구하고 있어. 직위 박탈 청원서까지 올라왔다. 가온도 마찬가지야. 네가 교단을 생각해서 한 행동이, 교단을 먹칠하고 있다." ​ 그는 씁쓸하게 서류를 집어 들어 흔들어 보이며 제이든의 발 앞에 내던졌다. ​ "연줄 닿는 데까지는 막았지만, 가온이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낸 이상, 더는 피할 수 없어. …책임을 져야 할 거다." ​ 그러나 제이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주교를 응시하며,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 “알겠습니다.” ​ 주교는 헛웃음을 내쉬었다. 그리곤, 피곤한 기색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 “재수도 없지… 하필 뱅퀴셔의 새끼라니.” ​ 공기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주교는 소파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 -애애애애애앵-! ​ 그때. 휴게실 전체를 뒤흔드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교는 본능적으로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워치를 들어 올려 전화를 받았다. ​ “…어, 어. 그래. 알았다.” ​ 그는 짧게 대답하고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창문에서 떨어져 급하게 제이든 쪽으로 걸어갔다. ​ “당장 무기 챙겨서 A 광장으로 가라.” ​ 제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 “예…?” ​ 주교는 거칠게 리모컨을 들어, 벽에 걸린 대형 TV를 켰다. 그곳에는, 긴급 속보로 가온 아카데미 내부의 비상 사태가 송출되고 있었다. ​ “… 메두사.” ​ 제이든이 중얼거렸다. 주교는 입술을 깨물었다. ​ “마지막 기회다.” ​ 그는 제이든을 똑바로 응시했다. ​ “네 행동이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네 손으로 다시 끌어올려라. 티끌만큼이라도.” ​ “….” ​ “지금 당장 가, 당장!!!!” ​ ​ *** ​ ​ 제이든이 광장에 도착하자, 대지는 이미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 아카데미의 광활한 광장은 돌기둥과 균열로 가득했다. 곳곳에 쓰러진 교수진과 영웅들의 모습이 보였다. ​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한 머리카락. 그늘진 얼굴 아래 차갑게 빛나는 뱀의 눈동자. ​ 메두사. ​ 제이든은 본능적으로 발을 멈췄다.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 “눈 마주치지 마세요! 돌로 변합니다!” ​ 어떤 영웅의 외침이 들려왔다.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 전투 방식은 극도로 제한된다. ​ 메두사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긴 혀를 내두르며, 날카로운 송곳니가 햇빛 아래 드러난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 -피이이이이잉! ​ 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석화의 파동이 쏘아졌다. 공기를 가르는 금속성의 진동과 함께, 주변의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 “…쯧.” ​ 제이든은 살짝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교단의 영웅들이 자신을 향해 무언가를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 “방패를 가져왔다!” ​ 교단의 최고 성보구(聖寶具). 어떤 공격이든 막을 수 있는, 성스러운 힘으로 만들어진 방패. ​ [아이기스(Αἰγίς)]. ​ 제이든은 아이기스를 움켜쥐고 방패 뒤에서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 그는 결심했다. 이 방패를 사용해, 실추된 교단의 명예를 되찾을 것이다. ​ 그 순간. ​ -타다다닥. ​ 뒤쪽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기척.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날렵한 속도. ​ -턱. ​ 그리고, 묵직한 압력이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제이든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었다. ​ 한 명의 실루엣이 그의 머리를 딛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 “땡큐.” ​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해인이었다. ​ 그는 가볍게 도약하며, 공중으로 높게 치솟았다. 태양을 등지고, 메두사를 향해 가차 없이 내려꽂히는 형체. ​ 메두사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 그러나— ​ 공중에서 하르페를 쥐고 있던 정해인은, 이미 정확한 곳을 노리고 있었다. ​ 하르페를 품에 쥔다. ​ ‘카테나치오(Catenaccio).’ ​ 정해인이 공중에서 자세를 비틀었다. 중력을 거슬러, 잿빛 마나를 뿜으며 하강한다. ​ 어쩌면, 인생 최고의 높이. 그러나 실패란 없었다. ​ 정해인은 처음 이 기술을 썼던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후 매일, 수없이 연습했다. 창이 아닌, 지금은 하르페지만—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 그는 온몸의 마나를 쥐어짜 분출했다. 그리고, 그의 형체를 본뜬 네 개의 분신이 공중에서 형성되었다. ​ 지난번보다 한 개 늘었다. 정해인은 만족했다. ​ 살기가 느껴졌는지, 메두사가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다섯 개의 형체가 쇄도하고 있었다. 메두사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어디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맞춰봐.” ​ 정해인이 하르페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 메두사는 결국 선택해야만 했다. 그녀의 눈에서 다시 석화의 빛이 터졌다. 그중 하나가 돌처럼 굳는다. ​ 그러나 이내, ​ -부스스…. ​ 부스러졌다. 분신이었다. ​ 그 순간, 메두사의 귓가에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 “땡.” ​ 메두사는 기함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 그러나, 이미 늦었다. ​ — 촤악! ​ 잿빛 궤적과 함께, 하르페가 그녀의 목을 가로질렀다. ​ 메두사의 목이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떨어졌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 속의 뱀들이 비명을 지르듯 몸부림친다. 그녀의 몸이 굳어지며 붉은 피가 허공에서 퍼져나갔다. ​ “틀렸어.” ​ 그가 하르페를 툭, 털었다. 피가 묻은 날이 차갑게 빛났다. ​ 이번에는 분신이 아니었다. ​ 진짜 정해인이었다. ​ 제이든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 그의 손엔 아이기스가 들려 있었지만— 전장의 주역은 교단도, 제이든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