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중간시험이 시작되었다. 첫 이틀은 필기시험. 이틀 동안 모든 과목을 몰아서 한 번에 치른다. ​ 그리고 방금 막, 마지막 시험을 마친 참이다. ​ “어우, 목 아파.” ​ 고개를 숙이고 시험지를 들여다본 시간이 길어서인지, 온몸이 찌뿌둥하다. 나는 목을 몇 번 꺾어 풀어주고,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 가온은 시험과 행사 준비로 한창 바쁜 분위기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외부 인사들의 방문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 “교수 어디 살아?” “줄 건 줘… 뭔 영웅이 필기야.” ​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너도나도 푸념을 늘어놓으며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 나는 그런 소음 속에서 벤치에 앉아, 광장 한가운데 자리한 전광판을 바라봤다. 공중에 떠 있는 대형 모니터에는 실시간으로 지목된 학생들의 이름이 번갈아 가며 띄워지고 있었다. ​ [대인 전투 지목 알림] [랭킹 2위 요한] -> [Unknown 정해인] ​ [대인 전투 지목 알림] [랭킹 42위 성시우] -> [Unknown 정해인] ​ 그리고 거기에 내 이름까지. ​ “… 어쩔까.” ​ 솔직히 둘 다 상관없었다. 사실 요한 같은 경우는 이미 어제 카페에서 직감하긴 했었다. ​ 요한은, 뭐 그럴 수 있다고 본다. ​ 근데 성시우는…. ​ 이 새끼 대체 뭘까. ​ 평소에는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더니, 대뜸 대인 전투 지목? 어디서 폐관 수련이라도 하고 왔나? ​ ‘… 되겠냐.’ ​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나는 애초에 모든 대련을 치를 생각이 없었다. ​ 1회차 대련까지만 치르고, 2회차와 3회차는 기권하고 실격 처리를 당할 예정이었다. ​ 왜냐면, 그 시간이면 마인의 습격을 막으러 출발해야 했으니까. 시험 점수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 그렇다면, 이제 선택해야 했다. 둘 중 누구와 대련할 것인지. ​ ‘성시우냐, 요한이냐.’ ​ 전광판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내 이름을 띄웠다. ​ “쯧.” ​ 나는 혀를 차며 워치를 꺼냈다. 그리고 각 학생에게 딱 한 장씩 주어지는 ‘지목 거절권’을 사용했다. ​ [지목 거절권] 을 ‘랭킹 42위 성시우’ 에게 사용합니다. ​ 솔직한 심정은 이렇다. ​ 일전에 무구 대련에서 성시우와 겨룬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약했다. 그런데, 그 이후 나에게서 어떤 케어도 받지 못했고,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으리라 보긴 어렵다. ​ 주인공이 연습 몇 번 했다고 깨달음을 얻기에는, 이 세계는 재능에 있어 생각보다 잔인했으니까. ​ 그러니까 다시 말해, ​ 너 개약하잖아. ​ 나도 한 번밖에 없는 대련을 성시우에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재미도 없을 것 같고. ​ 그래서, 결국 내 선택은. ​ [지목 거절권 사용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랭킹 2위 요한’ 과의 대련이 성사됩니다.] ​ 요한이었다. ​ ​ ​ ​ *** ​ ​ ​ ​ 어제도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 잘못 생각했다. 오늘의 광장은 어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중간고사의 백미, 대인 전투. 각종 배너와 깃발이 휘날리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웅웅 울릴 정도로 사람이 몰려 있었다. ​ 무슨 축제 현장인가 싶을 정도. ​ 아니, 나 출전 해야 되는데. ​ 나는 한숨을 내쉬며, 겨우 사람들을 뚫고 이동했다. ​ 결투장은 총 A, B, C 세 곳이 있었으며, 대련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학생이 출전하는 경기장을 찾아 이동했다. ​ 나는 A 결투장. 따라서 A 결투장으로 향해야 했지만…. ​ 사람이 너무 많다. 랭킹 2위 요한. 그리고 1위인 강아린도 여기 경기장이라고 하더라, 이러면 사람이 많이 쏠릴 수밖에. ​ 나는 겨우겨우 인파들을 헤치며 관중석으로 올라왔다. ​ -와아아아아아!! ​ 관중들의 함성이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나도 움찔했다. 거대한 경기장, 전투는 이미 한창이었다. ​ 강아린과, 이름 모를 여학우의 싸움. 뭣도 모르고 강아린을 지목한 듯한 상대였다. 호승심이지 않을까 싶다. ‘네가 그렇게 강해?’ 뭐 이런 느낌. ​ 나는 적당한 빈자리를 찾아 앉아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다소 일방적으로 흐르는 느낌. 경기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강아린은 강했다. ​ 원거리 공격을 사용하는 궁수가, 권사에게 접근을 허용한 것. 이건 이미 전투의 승패가 정해졌다는 뜻이었다. ​ 내가 본 것만 벌써 3번째다. ​ 그런데— 진작 끝낼 법한 싸움을 강아린은 끝내지 않고 있었다. ​ 계속해서 시선을 돌려, 관중석을 바라본다. 누군가를 찾는 기색. ​ 그러다 그 눈길이 마침내 내 쪽으로 닿았다.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더니…. ​ 한순간, 그녀의 형체가 사라졌다. 그리고. ​ -쾅!! ​ 강아린의 주먹이 궁수의 복부에 정확히 꽂혔다. 한 방.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상대를 무너뜨렸다. ​ 여학우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며 복부를 감싼 채. ​ "승자는—— 강아린!!!" ​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환호성이 폭발했다. ​ -와아아아! ​ 사람들의 함성에 맞춰 경기장의 강아린이 손을 흔들며 호응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 “잘하네.” ​ 그게 나의 평가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끝내고자 했으면 진작 끝냈을 것이다. ​ 그걸 상대도 알고 있었는지, 굉장히 분한 표정을 지으며 배를 움켜잡고 있다. ​ 전광판에서 앞으로 있을 전투의 순서를 알렸다. 다음 경기는 바로 내 차례였다. ​ 그 순간, 여기저기서 내 이름이 들려왔다. ​ “정해인…? 정해인이 누구야?” “아, 이거 또 일방적인 경기겠네. 요한은 2경기부터 체크하는 걸로.” ​ 관중석 곳곳에서 들려오는 반응. 대부분은 길드 평가자들이 주고받는 대화였다. 그럴 만도 하다. 길드 평가자는 유망주의 진짜 실력이 튀어나오길 바라는 사람들이다. ​ 상대가 너무 약하면, 그럴 일이 거의 없으니까, 싫어한다. ​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슬슬 가볼까.’ ​ 무대를 정비하는 시간도 있기에, 지금 가면 딱 맞을 것이다. ​ 나는 관중석을 빠져나와 선수 입장 터널로 향했다. 터널을 따라 걷는 동안, 함성이 점점 멀어지고, 대신 낮고 둔탁한 발소리만이 터널 안을 울렸다. ​ 신원 확인을 마친 후, 나는 입구 앞에서 대기했다. ​ “3분만 대기하셨다가, 입장하시면 됩니다.” “네네.” ​ 안내원의 안내를 받고 몇 분 더 기다린 후, ​ 나는 천천히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 -와아아아아!! ​ 터널을 빠져나가자, 함성이 귀를 찔렀다. 아까보다 더욱더 거세게 쏟아지는 환호. 뭐, 대부분 내 앞에 있는 요한을 위한 것이겠지만. ​ 요한은 그 함성을 즐기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치, 독무대를 차지한 듯한 기세. ​ 우리는 둘이서 마주 섰다. ​ “수락했네?” ​ 그가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아무리 크게 떠들어도 관중석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 “겁먹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 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 그저 손목을 천천히 풀며 카운트다운을 기다렸다. 그러자 요한의 표정에, 아주 미세한 금이 갔다. 물론, 이내 다시 본래의 온화한 미소로 돌아왔지만. ​ “같이 던전도 가고.” ​ 그가 말했다. ​ “요즘 성녀랑 계속 어울리는 거 다 알고 있어.” ​ 그는 천여울의 뒷조사까지 한 모양이었다. 나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 그러나 요한은 한순간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 “이거 하나만 물을게.” ​ 그의 미소가 한층 깊어졌다. ​ “성녀랑….” ​ 그가 짧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아주 가볍게ㅡ 질문을 던졌다. ​ “잤어?” ​ “하….” ​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터널을 지나면서부터 쌓여 있던 미적지근한 감정들이 단숨에 날아갔다. 마치 질척한 안개가 걷히듯, 내 안에서 불필요한 감정들이 사라졌다. ​ 이건 뭐, 헛웃음도 안 나온다. 내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 “너도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 용사 요한. 대외적으로 친근하고 상냥한 이미지로 포장된 그의 본성이, 이런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면 어떨까. ​ -3! 2! 1! ​ 카운트다운이 울려 퍼졌다. 나는 천천히 창을 들어 올렸다. ​ 마지막으로 요한을 바라봤다. ​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 뒤로, 잔뜩 비틀린 집착이 아른거렸다. ​ “정신 좀 차리자.” ​ ​ *** ​ ​ ​ 일반적인 길드들은 관중석에서 학생들의 전투를 지켜보며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여기는 조금 달랐다. ​ 가온의 경기장은 총 세 곳, A, B, C로 나뉘어 있고, 그 중앙에는 경기장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특별 관람석이자, 일종의 VIP룸이 존재했다. ​ 일명 ‘메이저’라 불리는 단체들의 핵심 인사들은, 이곳에서 언제든 원하는 경기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 -딸깍. ​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 위,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 "아린 영애의 전투, 잘 봤습니다." ​ 공식적으로 인정된 ‘가온의 랭킹 1위’. 그녀의 경기는 자연스레 가장 먼저 논의되는 화제였다. ​ 영광의 산하 길드, 맹주의 길드장인 강윤혁은 주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 "강윤혁 길드장. 아린 영애의 성장 속도가 실로 경이롭습니다." ​ “이거, 졸업하자마자 S급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 강윤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 강아린. 그의 조카이자, 영광이 키워낸 최강의 인재. 적자인 강유성이 죽고 나서 위기가 찾아온 듯했지만, 영광은 보란듯이 새로운 꽃을 피어냈다. ​ 그의 시선이 슬쩍 전광판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다음 대전의 명단이 떠오르고 있었다. ​ ‘흠….’ ​ 경기장 A에서 곧 펼쳐질 대전. ​ 요한이 출전하는 만큼, 교단과 주요 단체들은 자연스럽게 요한쪽의 관람석으로 이동했다. ​ “하하, 주교님. 요한 용사님의 전투가 곧입니다. 이번 용사님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 하얀 사제복을 입은 노인의 옆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 “그 아이는… 교단의 새로운 빛이 될 것입니다.” ​ “하하, 그렇고말고요.” ​ 요한의 전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VIP 룸에서도 그의 전투를 보려는 인물들이 많았다. ​ 대부분 요한에 관한 이야기. ​ 그러나, 강윤혁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다. ​ ‘삼촌, 얘 글로리로 넣을게.’ ​ 강아린은 어느 날 갑자기, 맹주의 선봉 팀. 글로리의 멤버로 누군가를 추천했다. 추천도 아니고 등록까지 해버리려는 걸, 일단 길드장의 권한으로 막았었다. ​ ‘정해인.’ ​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조사해보니 묵귀(黙鬼)라는 이명을 쓰는 영웅이더라. ​ 어린 나이에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지만. 글로리는, 그저 그런 영웅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 따라서 그는 요한 쪽이 아닌 정해인 쪽의 관람석에 서, 경기를 지켜보고자 했다. ​ 조카가 추천한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정해인의 관람석으로 간 강윤혁은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뭐지?” ​ 요한 쪽으로 몰려 사람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정해인쪽에도 적지 않은 인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아르카디아, 로터스, 그리고… 뱅퀴셔. ​ ‘뱅퀴셔…?’ ​ 이번 입찰에 참여한다 했을 때부터 의아했는데, 그들의 선택마저도 예상 밖이었다. ​ 강윤혁은 그나마 면식이 있는 아르카디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 “루크 주교님, 요한 학생을 보러 오신 겁니까?” ​ 그러자,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성녀님의 추천이 있었습니다. 정해인님을 강력하게 요구하시더군요.” “저야… 성녀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니, 뜻을 이루기 위해 왔습니다.” ​ 강윤혁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다. ​ ‘… 성녀도?’ ​ 뭔가 이상했다. 인제 보니 정해인의 경기장을 지켜보는 이들의 면면이 심상치 않았다. ​ 유 가(家)의 호위무사. 로터스 길드. 아르카디아 교단. 뱅퀴셔. ​ ‘… 그리고 나까지?’ ​ 단순한 호기심으로 착석했지만, 강윤혁은 조금 더 깊이, 제대로 앉아 경기를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 그리고 그 관람석의 중심. ​ -아삭. ​ “해인이 인기 많네~” ​ 유유히 과자를 씹으며 말하는 남자. ​ 박광철이 있었다. 그는 전혀 긴장감 없이 태연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오 씨. 해인이 화났다.” ​ -아삭. "너는 좆됐다~" ​ 과자를 다시 한입 베어 물며, 박광철은 경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