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다. ​ 역시 유하나는 천재가 맞았다. ​ 어느새 시간은 저녁 11시. ​ “이렇게요?” ​ -파바바박! ​ 그녀가 휘두른 검격이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훈련장 벽에 적중했다. 힘과 속도, 흐름까지 완벽했다. ​ 유하나는 몇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가르친 화접검의 기본을 완전히 익혀버렸다. 검을 받자마자 눈물을 보였을 때는 조금 당황했지만, 검을 맞대며 몇 번 자극하니 다행히도 금방 씩씩해졌다. ​ “후….” ​ 유하나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꽃과 나비가 춤추듯 흩날리던 마나의 선율 또한, 검집 속으로 잔잔히 스며든다. ​ 그런데. ​ 갑자기,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숙였다. ​ -탁. ​ 단순한 인사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이마를 바닥에 닿도록 숙였다. ​ 완벽한 도게자. ​ 나는 순간 당황했다. ​ “야, 야, 왜 이래.” ​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배움을 하사해 주심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스승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공손함과 진중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존댓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말투며 자세가 지나치게 순종적이었다. ​ 유하나는 무가의 자제다. 따라서 검술을 가르쳐 준 자에게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한 일이다. ​ 하지만 원작에서도 그녀는 처음엔 잠깐 형식적인 존댓말을 하다가, 그마저도 금방 때려치웠다. ​ ‘이건 조금 과한데.’ ​ 독방이라 다행이지. 이런 장면을 누군가 봤다면 이상한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 “일어나지 그….” ​ 생각해보니, 얘는 일어나라 해도 안 일어난다, 고집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따라서 단숨에 일으킬 방법은 간단했다. ​ “스승의 명령이니까 일어나.” ​ -움찔 ​ 그리고 덧붙였다. ​ “그리고 그냥 하던 대로 대해.” ​ 여전히 땅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 그러다 결국 유하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떠밀려 일어나면서도 아쉬움을 삼키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왜 저런데.'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슬슬 훈련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 “여기.” ​ 그녀가 내게 동백검을 내밀었다. 반납하려는 듯한 행동. ​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당분간 네가 가지고 다녀." ​ 사실, 내가 들고 다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녀가 건네는 동백검을 보란듯이 살짝 쥐었다. ​ -우우우웅! ​ 내가 쥐자마자, 마치 너는 싫다는 듯 미친 듯이 진동하며 거세게 반응했다. 나쁜 새끼. ​ “봤지?” ​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 “내가 가져가면 피곤해.” ​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허리춤에 검을 납도했다. ​ “알았어, 고마워.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 ​ “그러세요.” ​ 내가 무심하게 대꾸하자,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내 뒤를 따라 걸었다. ​ 방을 정리하고 내부 강당으로 나왔다. 늦은 저녁 시간이지만 아직 사람은 많았다. 시험 기간이 코앞이라 그런가. 학생들은 훈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 나도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 중간고사도 코앞이다. 가능하면, 매일 훈련하는 게 좋겠지만, 그걸 직접 말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웠다. ​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 “이번 주 시간 되는 날 좀 알려줄래? 한 두 번 정도 더 하면 좋을 것 같아서.” ​ “….” ​ 유하나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 그러나 그녀는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너무 당연한 질문을 한다는 듯한 시선. ​ “매일.” ​ 그리고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 “… 매일 하는 거 아니었어?” ​ 나이스. ​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예상보다 그녀의 성취 욕구가 훨씬 강했다. ​ 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 밤하늘에는 어느새 별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 ​ ​ *** ​ ​ ​ -띠링 ​ 메세지가 도착했다. ​ [루크]: 정해인님, 이아노의 십자가 대금 제안안이 준비되었습니다. 편하실 때, 언제든지 교단으로 방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좋은 소식. ​ 일전에 맡긴 십자가의 가격 책정이 완료된 듯했다. 이건… 오전 수업밖에 없는 내일 가면 될 것 같고. ​ 그러나 지금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드르륵, 드르륵 ​ “아니 씨발.” ​ 늦은 저녁 기숙사 방 한쪽. 나는 잠도 못 자고 영웅 옥션 사이트를 스크롤하고 있었다. ​ -드르륵, 드르륵 ​ “대체 어딨는 거야?” ​ 다음 주 중간고사에 있을 마인의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이를 위해 필요한 물품을 찾아보는 중이었지만, 원하는 물건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 두 시간쯤 검색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발견했다. ​ 갱신조차 안 했는지 아주 저 밑에 처박혀 있었다. ​ [돌낫] “푸흐흐.” ​ 이름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 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은 초점도 맞지 않고, 조명도 엉망이었다. 애초에 팔 생각이 있긴 한가 싶은 정도로 허술한 게시물. ​ 나는 설명을 확인했다. ​ [획득처: 센트럴 아프리카] [판매자 설명: 돌로 만든 낫입니다. 아프리카 파견갔을 때 던전에서 습득했습니다. 저도 어디에 쓰는지는 모릅니다. 환불 불가.] [판매가: 1,000,000 KRW] ​ 한눈에 봐도 낡고 거친 형태. 날은 이빨 빠진 늑대처럼 여기저기 깨져 있고, 무게감이 상당해 보였다. ​ 그의 적은 판매 의지는 가격과 물품 설명에서도 드러났다. 참고로, 백만원은 옥션 최저가다. ​ 그러나 나는 이 낫을 반드시 사야 했다. ​ 이것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다. 바로, 하르페(Harpe)다. ​ 신화에서 등장하는 페르세우스의 그거 맞다. 다만 무구로써 뛰어난 아티펙트는 아니고, 정해진 용도는 따로 있다. ​ 사실상 일회용인 셈. 그러나 그 일회용이 너무 크다. ​ -딸깍 ​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다. ​ [‘돌낫’이 배송될 예정입니다.] ​ 아마 판매자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기뻐했을 것이다. 어떤 호구가 대체 이런 것을 샀나 싶어서. ​ 그런데, 그건 아마 틀렸을 것이다. ​ ​ ​ *** ​ ​ ​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중세풍의 거대한 건물. ​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 수업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달려왔다. 마침 돈이 좀 필요했거든.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아르카디아 교단으로 발을 들였다. ​ 그 순간, 카운터에 앉아있던 사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 “이쪽으로 와주시면 됩니다!” ​ 이미 이야기가 미리 전달된 듯했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으로 나를 안내했다. 저번과 같은 접견실이었다. ​ 그리고 그곳에는 일전의 중년 사제, 루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해인 형제님!” ​ 중년의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와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 “하하, 조금 늦었죠? 금액 조율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좀 있었습니다.” ​ “네, 뭐… 괜찮아요.” ​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십자가 건도 그렇고, 여러모로 천여울의 세력이 교단 내에서 빠르게 확장되고 있는 모양. ​ 루크는 가죽 가방에서 금빛으로 음각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 “부디 만족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금액에 문제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 나는 그의 눈을 한 번 마주친 뒤, 계약서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금액을 본 순간. ​ ‘어머 씨발.’ ​ 이게 0이 몇 개야? 크게 받아낼 생각은 없었으나, 거저 넘길 생각은 없었기에, 너무 후려친다 싶으면 조정을 좀 하려 했었다. ​ 근데 이건… 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 잠시 눈을 깜빡이며 계약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루크는 내 표정을 살피며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신경 많이 쓰셨나 봐요.” ​ 내 말에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무래도 내가 눈치챈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 “형제님 덕분에, 여러모로 상황이 좋아졌습니다.” ​ 어느새 나를 부르는 호칭도 ‘형제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 나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고민했다. 이걸 다 받아도 되긴 한다. ​ 허나…. ​ 나는 천천히 계약서를 접고 말했다. ​ “이거, 아르카디아 재단에 기부할 수 있죠?” ​ 루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 “아, 예… 당연히 가능은 합니다만….” ​ “그럼, 이 정도만 할게요.” ​ 나는 접은 계약서 뒷편 빈 공간에 금액을 적어 보였다. ​ 10억. ​ 대금의 일부였지만, 기부금으로는 절대 적지 않은 금액. ​ 그가 종이를 받아들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 “… 정말 기부하시겠습니까? 또 혹시 기부 대상은….” ​ 그의 목소리는 미묘하게 흔들렸다. ​ “천여울로 하죠.” ​ 이 한마디에 루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달라졌다. ​ 놀람과 감동이 뒤섞인 듯한 눈빛.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정히 허리를 숙였다. ​ “정말 감사합니다.” ​ 그의 목소리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천여울의 입지를 다지는 데 이 정도 기부는 분명 큰 도움이 될 테고, 루크 역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 게다가 교단에 기부를 하게 되면 따라오는 여러 혜택들이 있다. 그래서 옛날부터 염두에 두긴 했었다. ​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에서 예의를 차렸으니, 나도 적당히 맞춰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루크는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내 손을 단단히 감싸 쥐었다. ​ “형제님께 여신님의 가호가 함께하길.” ​ 그는 진심 어린 축복을 건넸다. 나는 피식 웃었다. ​ "확인하셨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 ​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접견실을 나섰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