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는 크게 두 개의 분야로 진행된다. ​ 첫 번째는 필기. 그러나 이 필기시험은 성적에도, 더 나아가 가온의 랭킹에도 크게 반영되지 않는다. 그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할 뿐. 영감은 이론을 등한시하는 현재의 교육 방식을 탐탁지 않아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 결국, 모든 관심은 나머지 한 분야에 집중된다. ​ 그것은 바로 대인 전투. 총 세 번의 전투가 진행되며, 한 회차가 마무리될 때마다 길드 및 단체들의 입찰이 시작된다. ​ 그렇다면, 이렇게 유명한 가온의 중간고사. ​ 정말로 중요한가? ​ ‘아니.’ ​ 사실 중간고사는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 원작에서 진짜 핵심이 되었던 건, 중간고사와 함께 찾아온 마인 세력의 습격. ​ 가온이 마인들의 목표로 변하는 첫 번째 사건이었다. 따라서, 나 또한 중간고사보다는 그 흐름에 맞춰서 준비하면 된다. ​ 다만 원작과 다른 점이 크게 하나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뱅퀴셔다. ​ 원작에서는 중간고사 때 뱅퀴셔가 참관하지 않았기에 둘이 마주칠 일이 없지만, 만약 마주치게 된다면….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사지가 찢기게 된다. 뱅퀴셔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멸마(滅魔)니까. ​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 교관이 정리된 수업 내용을 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중간고사 전까지 진행해둬야 할 내 작업은 간단했다. ​ 주요 인물들의 성장. ​ 나는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여울은 내가 준 십자가를 손에 꼬옥 쥐고 나를 물끄러미 올려 보고 있었다. ​ ‘천여울은 해결.’ ​ 유하나. 그녀에게는 동백검을 주기로 했었으니까, 일단 괜찮다. ​ 그리고 강아린은… 뭘 주고 싶어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물품들이 취급하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 그렇다면… 마지막은 성시우. ​ ‘어떡하지.’ ​ 계획대로라면, 그는 편린을 통해 마를 멸하는 병기로서의 성장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길드들의 주목을 받고, 입찰을 통해 강력한 서포트를 받으면서 서서히 ‘주인공’의 길을 걷게 된다. ​ 근데 편린은 내가 홀랑 까먹어버렸고, 이 새끼는 아직도 고집불통이다. 몇 번 말을 걸긴 했는데 여전히 씹는 중. ​ 그럼 내가 이 녀석을, 현시점에서 끌고 가야 할 이유가 있는가? ​ 사실 고민은 이미 마쳐놨다. ​ ‘버려.’ ​ 일단 버린다. 이번 습격에서는 힘들다. ​ 당장 다음 주가 중간고사인데. 이거 끌어 올리려면 택도 없다. ​ 고개를 들어 맨 앞을 바라봤다. 그는 칠판에 쓰여 있는 뱅퀴셔라는 단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 미안하다. ​ 내가 만들고, 또 키우려고 했던 주인공을 버리는 것은, ​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 ​ ​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땅거미가 기어가는 지금. ​ 오후 6시. 나는 B동 훈련장에 도착했다. ​ 자동문이 열리자, 시험 기간에 맞춰 훈련하러 온 학생들이 곳곳에서 기량을 갈고닦고 있었다. 격렬한 타격음과 마력의 파동이 훈련장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유하나는 무릎을 꿇고 조용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 무가(武家)의 자제. 그녀는 시끄러운 주변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 나는 등에 대각선으로 멘 동백검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 내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부드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 훈련장에는 거대한 공동 공간과,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훈련 룸이 존재했다. ​ “방으로 갈까? 방 잡아놨어.” ​ 그녀가 나를 훈련실로 이끌려 했다. 그러나 내가 한발 먼저 움직였다. ​ 나는 등 뒤의 검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 짙은 보랏빛이 감도는 검집. 그 안에서 미세하게 퍼져 나오는 묵직한 기운. ​ -우우우우웅 ​ 그리고, 검은 계속해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치, 버둥대며 거부하는 듯한 기색. ​ 나도 너 싫어 임마. ​ “받아.” ​ 나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짧게 말했다. ​ 그녀의 눈이 순간 동그래졌다. 당황한 듯 허공을 맴도는 그녀의 손에 칼을 쥐여줬다. ​ 그 순간. ​ -윙. ​ 동백검의 기운이 부드럽게 퍼졌다. 전까지 발버둥 치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이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 아무래도 유하나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엄청 좋은 검이야. 오늘 훈련은 이걸로 하자. 아마 당분간은….” ​ 그런데. ​ “…야.” ​ 나는 미간을 좁혔다. ​ 유하나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녀도 당황한 듯했다. ​ “아… 미, 미안해. 갑자기.” ​ 쏟아지는 눈물을 어쩌지 못한 채, 손바닥으로 마구 닦아내기 시작했다. ​ 그러나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 “왜, 왜 이러지….” ​ 그녀는 울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웃고 있었다. ​ 스스로도 감정의 통제가 안 되는 듯했다. 주변의 시선이 슬슬 몰려들었다. ​ -뭐야? -유하나 아니야? ​ 웅성거리는 소리. 훈련장 한가운데서 눈물을 보이는 유하나를 향한 이목이 쏠렸다. ​ ‘이건 좀….’ ​ 곤란하다. ​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곧장 훈련실 문을 열어, 그녀를 안으로 데려갔다. ​ ​ ​ *** ​ ​ ​ 눈앞의 그이는 조용히 등을 돌린 채, 몸을 풀고 있었다. ​ 유하나는 자신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듯한 그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해인은 조금의 기척도 내지 않았다. ​ 그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 스스로 진정하라는 듯한 묵묵한 배려. ​ ‘상냥해….’ ​ 이마를 살짝 짚으며, 그녀는 흐트러진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 애써 숨기려 했던 감정이 터져 나왔던 순간. ​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고, 그걸 어찌하지 못했다. ​ 그의 넓고 탄탄한 등을 바라봤다. 언제나 기대고 싶은, 또 기대었던 등. 그러나 그는 그 등으로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있었다. ​ 그녀는 숨을 삼켰다. ​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등을 감싸 안고 싶다. ​ 그의 등을 타고 천천히, 단단한 어깨까지. 온몸으로 느껴지도록, 꼭 껴안고 싶었다. ​ 그리고, 그 상태로… 천천히 그를 밀어 눕히고 싶었다. ​ 온몸을 밀착해 그의 체온을 느끼면서, 그의 모든 짐을 잠시라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그의 호흡을, 심장 소리를, 그의 뜨거운 온기를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었다. ​ 그리고 말하고 싶다. ​ 이제, 괜찮다고. 그 짐 같이 나눠 들겠다고. ​ 그리고 또… 그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 ‘하아….’ ​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면, 전부 허사가 되니까. 그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될 테니까. ​ 유하나는 손끝을 조용히 말아 쥐었다. 뜨거운 숨을 억누르며, 떨리는 시선을 천천히 거두었다. ​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하는 그이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그는 여느 때처럼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렸다. ​ “시작할까?” ​ 그는 그녀가 울었던 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묵묵히 웃어 보일 뿐. ​ 그 상냥한 모습에 또다시 음심이 차올랐지만, 감정을 꾹꾹 눌러 가라앉혔다. ​ “…고마워. 엄청 좋아 보이는 검인데.” ​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 “빌려주는 거야.” ​ 거짓말. 그러다가 그냥 줄 거면서. ​ 그는 그의 주 무장인 창이 아닌 검을 꺼내 들었다. ​ 이건… 그거다. ​ 그는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검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화접검(花蝶劍). ​ 꽃과 나비가 하나가 되어 우아하게 펼쳐지는 검법.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춤추듯 흐르고, 공격과 방어가 유려하게 연결되는 상승무공. ​ 동백검과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검법이었다. ​ 그는 화접검의 우수한 점을 유하나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설명을 마치고, 다소 긴장한 듯 그녀를 바라봤다. ​ 지금의 유하나는— 온몸 구석구석 그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었다. ​ 기술만이 아니라, 그의 말투, 습관, 심지어 검을 쥐는 자세까지. 그러니 화접검은 이미 배우고도 남았다. ​ 그러나 당시의 유하나라면? ​ “증명해. 그게 내 검법보다 좋다는 것을.” ​ 이렇게, 날카롭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싸가지 없게 내뱉었을 것이다. ​ 그는 그런 싸가지 없는 유하나의 모습에도 오히려 더욱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 언제나 그랬다. 그는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자신의 방식을, 자신의 길을 따르게 만들려 했다. ​ 그렇게, 검을 나누는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 “한번 해볼까?” ​ 대련이 시작됐다. ​ 그는 화접검을 펼치며 빈틈을 깊숙이 찌르며 들어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 너무 기뻤다. 다시 이렇게 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라도 그의 검과 맞설 수 있다는 것이. ​ 하지만, 과거의 유하나라면? ​ 유하나는 바로 표정을 바꿨다. ​ 분한 얼굴. 지기 싫어 발끈하는 눈빛. ​ 그리고 그의 얼굴에도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 익숙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감정을 자극하며,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그 방식. ​ ‘분하지?’ ​ 그는 그렇게 묻지 않았지만, 유하나는 그의 속내를 읽어냈다. ​ 그는 항상, 그녀의 분함을 검술의 연료로 삼았다. ​ 유하나는 결국 아슬아슬한 차이로 패배했다. ​ 그리고 동백검을 바닥에 던진다. 그러나, 그것을 함부로 내던지지는 않았다. 소중한 것이니까. 다만, 살짝 강하게 내려놓았을 뿐. ​ 그녀는 일부러 표정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한 듯, 억울한 듯, 그에게 말한다. ​ “… 그거, 나도 알려줘.” ​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어딘가 흐뭇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가 기쁘면 나도 기뻐.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되뇌었다. ​ ‘기특하게 굴게요.’ ​ …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