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 아카데미의 부지는 서해 부근에 떠다니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 월요일 아침, 대부분의 학생은 등교를 하고 있었다. ​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앵! ​ 그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가온은 인공섬이기 때문에, 경보가 울릴 일이 거의 없다. 마력 현상이 발생할 수가 없기 때문. ​ 따라서, 가온에서 경보가 울린다는 건, 국가적인 경보가 발령됐다는 뜻이었다. ​ [백두산 천지, 대규모 마력 이상 현상 발생] -일전 미국과 중국에서 감지된 마력 파장과 유사…. -백두산 일대 마물 대거 은신 … 실종된 개체 72% 이상. ​ 가온의 학생들은 각자의 스마트 기기와 홀로그램 뉴스 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기사를 확인했다. 호기심과 흥분이 섞인 대화들이 교실 곳곳에서 오갔다. ​ 천여울은 뉴스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옥빛의 마력 기둥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영상. ​ 그녀는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했다. ​ “부디….” ​ 다시 한번, 그가 일어서기를. ​ ​ *** ​ ​ 눈을 떴다. ​ 머리 위의 천장은 여전히 높았다. 끝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거대한 공동. ​ 일전에 한 번 왔던 곳. 다시 돌아오니, 잊고 있던 기억까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 공동의 끝자락에는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전보다 조금 더 강한, 하지만 여전히 어둠을 완전히 걷어내지는 못하는 빛. ​ 나는 본능적으로 그 빛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 그리고 계단. 출구로 향하는 그곳, 계단 위에는 여전히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 그는 가만히 서서, 나를 지켜봤다. ​ 아무 말 없이, 움직임도 없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귀기는 여전히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 일전에 마주했을 때, 나는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 이번에는 다르다. ​ 그 순간. ​ “이렇게 금방 또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차분했다. ​ “잘 된 일…. ” ​ “누구야, 너.” ​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 계단 위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빛이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질 법도 한데, 마치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것처럼. ​ “그걸 알려줄 수가 없는 게….” ​ 어둠 속의 실루엣이 계단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 “참 아쉬운 일이야.” ​ 그의 기세가 느껴진다. 네임드 급인가? ​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네임드 강자들의 이미지를 차례로 나열했다. ​ ‘밀리지 않는다.’ ​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 ‘더… 강할 수도.’ ​ 그가 천천히 창을 뽑자, 그의 창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며 울기 시작했다. ​ “큭.” ​ 나는 표정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온몸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비명소리. ​ “이거, 들려?” ​ 그가 창을 가리키며 웃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왜인지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좋은 신호야.” ​ 그는 천천히 창 끝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 “그래도… 아직 이곳은 조금 일러, 몇 개 더 남았거든.” ​ 형체의 얼굴은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 “이대로만 해. 솔직히 생각을 버리는 걸 추천할게. 그냥 걔네한테 몸을 맡기는 것도… 아, 이건 좀 위험한가.” ​ 내 시야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마치 공격에서 보호라도 하려는 듯. ​ ‘편린.’ ​ 확장되는 시야, 편린이 가진 권능 중 하나다. ​ 그리고 동시에. ​ 나는 허리춤에 찬 창을, 아주 강하게 쥐었다. 이번에는 느껴진다. 그는 내게로 쇄도하고 있었다. ​ 정면에서 접근하는 실루엣. 아니. 정면뿐만이 아니다. ​ 순간, 내 시야가 왜곡됐다. ​ 눈앞에서, 뒤에서, 옆에서—모든 방향에서 잔상이 흩어졌다. 공간을 가득 메운 수십 개의 공격 루트. ​ 도망칠 길이 보이지 않았다. ​ 나는, 완벽히 봉쇄됐다. ​ ‘카테나치오.’ ​ 그는, 게임 속 최고 난이도의 기술을 너무나도 쉽게 펼쳤다. 완벽한 공간 장악, 한 치의 틈도 없는 창격의 포위망. ​ “잘 봐둬.” ​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너 나이 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거든.” ​ -파파파파박! ​ 전신을 파고드는 창의 촉감. 온몸이 베어내지는 듯한 감각. ​ -… 힘내라. ​ 내 시야가. 다시금 암전됐다. ​ ​ ​ *** ​ ​ 잠에서 깼다. ​ -짹짹 ​ 나는 백두산 어딘가의 수풀에 몸을 파묻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은 텅 비었다. ​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맑은 하늘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그리고, ​ ==== [권능: 조화의 편린(片鱗)] ①파사현정(破邪顯正) ㅡ 사한 것을 부수어라. ② ??? ③ ??? ==== ​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 창. 그곳에는 내 권능 자리를 단 하나의 존재가 깔끔히 꿰차고 있었다. ​ 조화의 편린. ​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 편린을 흡수했다. ​ [직업 능력 『직관』이 권능 「조화의 편린」과 감응하여 『일체지각(一體知覺)』으로 진화합니다.] [소질 『전인(全人)』이 권능 「조화의 편린」과 감응하여 『진인(眞人)』으로 진화합니다.] . . . 그외에도 여럿. ​ 눈앞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성장의 알림. 그러나 기쁨보다는 얼떨떨함이 더 컸다. ​ “어디지?” ​ 주위를 둘러보았다. ​ 산장? 아니었다. ​ 오히려 약간 숨이 가빠지는 걸 보니, 고도가 상당하다. 천지에 가까운 높이임이 분명했다. ​ 어떻게 내려가나 싶지만, 괜찮다. ​ 과거의 편린이 내게 흡수되며 현재의 편린은 사라졌다. ​ 현시대의 마물들은 편린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사라졌기 때문에 즉시 약화될 것이다. 혹은 숨거나.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 ​ 그리고 강아린은…. ​ 보이지 않았다. ​ 같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뜻인가. 아마 위치가 엇갈린 듯했다. ​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사실, 나도… 너꺼야. ​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 7일간 함께하며 감정의 교류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녀가 자기 사람을 아끼는 성향이라는 것도 맞다. ​ 그러나, 그 정도였나? ​ 깊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 사망 회귀가 사라졌다. ​ 그 이후, 내가 아는 원작의 흐름은 점점 더 어긋나기 시작했다. 설정과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미묘하게 변해버린 반응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편린. ​ 편린은, 시스템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 흡수할 수 있다. 즉, 내가 흡수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런데도, 지금 나는 편린을 흡수했다. ​ 나는 손을 가볍게 펼쳤다. 마나를 가볍게 손끝으로 흘려보냈다. ​ 천천히 눈을 떠 확인한 마나의 빛깔은, 언제나처럼 잿빛이었다. ​ 그러나 그 속에 섞여 있는 은은한 녹옥색 빛이 내가 편린을 흡수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지금껏 내가 세웠던 모든 계획은 의미가 없어졌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겠다. ​ “계획을, 다시 세우자.” ​ 결심한 순간이었다. ​ ​ ​ *** ​ ​ ​ 로터스 길드의 2팀은 이틀째 백두산에서 표류 중이었다. ​ 애초에 그들은 백두산 일대를 조사하기 위해 투입된 정찰 팀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리더, 우장훈의 욕심 덕분에 상황이 꼬였다. '탐사를 지속한다. 하산은 후순위다.' ​ 방출된 에너지를 좀 더 분석하겠다는 이유로, 그는 내려갈 타이밍을 계속 미뤘다. ​ 그 결과, 하산로가 완전히 차단됐다. ​ 식량도 바닥나고, 체력도 고갈되어갔다. 구조 신호를 보내도 천지에서 방출되는 에너지에 가로막혔다. ​ 결국 그들은 서서히 산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 일부 대원들의 눈빛이 흐려졌다. 우장훈을 씹어먹을 듯이 바라보는 눈빛이 늘어갔다. ​ 그러던 중. ​ -슈우우우욱! ​ 백두산 천지. ​ 그곳에서 거대한 녹옥빛 기둥이 솟아올랐다. 산 전체를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마력의 파동이 일대를 덮었다. ​ 바로 그 순간. ​ -삐비빅! ​ 무전이 울렸다. 우장훈은 반사적으로 덥석 무전을 받았다. ​ “2팀입니다!” ​ 본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리고, 무전기 너머의 사람은 다짜고짜 고함쳤다. ​ "야, 너희 절대 기어 내려오지 말고, 지금 당장 올라가! 천지로 바로!" ​ “예…?” ​ "마물들 다 사라졌다! 당장 빨리!“ ​ 그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다음, 모두가 동시에 장비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 그들은 몰랐지만, 사실 그들은 마물들에게 쫓기는 동안, 어느새 천지 부근까지 도달해 있었다. ​ 따라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그들은 천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ㅡ 천지의 맑은 물가. 그 한 가운데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 “어?” ​ 우장훈의 입에서 무의식적인 감탄이 흘러나왔다. ​ 불과 며칠 전, 백두산에 오르기 전 터미널에서 봤던, 어린놈이었다. 당시 그는 어린 티를 숨기지 못하는 풋내기처럼 보였다. ​ 그러나 지금.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 기세도, 풍기는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다. ​ 마치 긴 수도 끝에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 을 보는 듯한 느낌. '대체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우장훈은 적잖이 당황했다. ​ “와….” ​ 뒤에 있던 여성 팀원이 무심결에 감탄을 내뱉었다. ​ 그에 비해, 천지에 서 있던 정해인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 ‘조난 당했네.’ ​ 그들의 초췌한 몰골을 보니, 상황은 뻔했다. ​ 장비들은 찢어졌고, 얼굴에는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굶주림과 탈진이 그대로 드러났다. ​ 정해인은 하산하기 전, 워치의 태양광 충전을 위해 천지로 올라왔다. ​ 백두산에 등정한 첫날보다 이틀 정도 더 흐른 날짜. ​ 그러니까 그들은 그 이틀 동안, 이곳에서 갇혀 있었던 것이다. ​ 정해인은 묵묵히 그들을 바라봤다. 우장훈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 그리고 정해인은 이내 담담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괜찮으세요?” ​ 그 속에는 여유가 담겨있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