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나와 그녀의 호흡도 점점 좋아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하루 빠르게, 우리는 백두산 천지의 정복을 마쳤다. ​ 오늘은 12월 30일. ​ 이제는, 1월1일이 되기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 “…괜찮네.” ​ 탁 트인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자연을 정복한 기분이었다. ​ 강아린은 내 옆에서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쭉 늘어난 몸매가 부각됐다. ​ ‘….’ ​ 나는 시선을 둘 곳을 잃었다. 요즘 들어, 자꾸 의식하게 된다. ​ 번개가 치던 그날 이후부터,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잠들기 시작했다. 거부할 틈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내가 자리를 옮기면 그대로 따라왔다. ​ 물론 그날처럼 완전히 붙어있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가까운 거리였다. 몇 날 며칠을 함께 지내다 보니, 그 거리가 점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이제는… 그냥 자연스러웠다. ​ 어느 날은 이랬다. 강아린은 홀로 탐사를 나갔다. 과거 백두산의 생태계 데이터를 수집하겠다며 홀로 떠났다. ​ 나는 말리지 않고 그냥 보냈다. 어차피 아랫쪽으로는 마물이 없으니까. ​ 산장의 모닥불에 장작을 던지며 그녀를 기다리던 중, 바람을 타고 그녀의 체향이 실려왔다. 그 익숙한 냄새가 내 코끝을 간질였다. ​ ‘거의 다왔나 보네.’ ​ 어디서 오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 “씨발?” ​ 나는 순간적으로 기함했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 점차 그녀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익숙해져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 게다가 그녀의 복장은 갈수록 야성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야성적이지. ​ 나는 고개를 돌리며 단호히 말했다. ​ “옷 좀, 잘 여매봐.” ​ 그녀는 뭔가 아쉬운 듯 말을 흘리며 대답했다. ​ “네네.” ​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강아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31일에는, 자정이 될 때까지 대기하는 게 좋아 보여.” ​ “응.” ​ 그녀는 짧게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천지를 뒤로하고 산장으로 내려왔다. ​ 그날 저녁, 산장의 모닥불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 그리고 우리는 불을 바라보며 불멍을 때렸다. ​ 유일하게 있는 매일의 일과였다. 저녁에는 정말로 할게 없다. ​ 그 적막을 깬건 그녀였다. ​ “근데, 편린을 얻어서 뭐할거야?” ​ 그녀는 무릎에 손을 받치고 턱을 괴며 내 쪽을 바라봤다. ​ “어차피 사용하는 법을 모르잖아.” ​ 그리고는 표정을 바꿨다. 어딘가 장난스럽고, 소악마 같은 미소였다. ​ “아닌가? 우리 예비 글로리 신입 길드원님은 알고 있나? 편린의 사용법을?” ​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 “써야지.” ​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 “누구? 네가?” ​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분히 대답했다. ​ “알아서 뭐하게.” ​ 그녀는 내 대답에 미간을 찌뿌렸다. ​ ​ ​ ​ *** ​ ​ ​ ​ 완전한 어둠이 숲과 거대한 호수를 삼킨 듯 내려앉았다. 밤은 적막했고, 우리 주위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우리는 불조차 피우지 않은 채, 천지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마물들에게 발각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 -우우웅 ​ 긴 침묵을 깨고, 땅이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 진동은 점점 커졌고, 이내 하늘이 녹옥빛으로 물들었다. 어둠 속에서 녹색의 빛줄기가 찢어지듯 떨어지며, 천지의 중심으로 향했다. ​ -콰앙! ​ 거대한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 호수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순간적으로 주변이 녹옥색 빛으로 휩싸였다. ​ 편린이었다. ​ “왔다.” ​ 나는 짧게 중얼거렸다. ​ “우와….” ​ 강아린은 감탄을 내뱉으며 그 장관을 바라봤다. 하늘에서 떨어진 녹색 유성우는 마치 초자연적인 신비로움을 담고 있었다. ​ 그러나 나는 그녀처럼 감상에 잠길 시간이 없었다. 호수에 박힌 편린은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주변을 점점 밝히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에너지를 방출하며 산 전체를 덮었다. ​ “끝난거야?” ​ 그녀가 물었다. ​ “아니." ​ -드드드드드 -드드드드드득 ​ 땅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어진 진동은 호수 주변의 대지를 깨우기라도 하듯 점점 더 커졌다. ​ 편린의 에너지에 이끌린 마수들이 숲과 산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좇아 천지로 몰려들었다. ​ 서로의 존재를 인지한 마수들은, 편린에 닿기도 전에 서로 치고받으며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혼돈의 한복판에서, 에너지는 그들을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 나는 짧게 숨을 고르고 몸을 날렸다. ​ “지금.” ​ 외마디를 남기며 경사면에 발을 박은 채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경사의 눈과 흙을 밀어내며 속도를 올렸다. ​ 강아린은 뒤에서 물길을 열기로 약속했었다. 나는 살짝 뒤를 돌아 그녀의 움직임을 확인하려 했다. ​ 그런데. ​ “어…?” ​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 강아린은 약속된 위치가 아닌, 내 앞을 지나쳤다. ​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나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경사면을 타고 내려온 것도 아니었다. ​ 거침없이 호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 ‘미친….’ ​ 나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경악했다. ​ 이미 늦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편린을 향해 도달하고 있었다. ​ 나는 이내 그녀를 위해 마나를 내뿜었다. 마나를 방출해 물길을 열며, 그녀의 진로를 확보했다. ​ 호수를 밝히던 빛이 갑작스레 꺼졌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강아린이 호수에서 걸어 나왔다. ​ 그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자.” ​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평범한 돌덩이를 내밀었다. ​ “주기로 했잖아?” ​ 나는 그것이 편린이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 ​ *** ​ ​ 완전한 어둠이 우리를 감싸고, 주변 공간은 점차 파편처럼 깨져가고 있었다. 천지를 시작으로, 서서히 균열이 시작됐다. ​ “대체 왜 그런거야?” ​ 편린이라는, 이 세계선을 구축하는 시간축이 사라지자마자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머지않아, 산장까지 무너지며 우리는 원래의 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 “그냥, 재밌잖아?” ​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나는 당황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에 편린을 넘겼다. ​ 우리는 서서히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산장으로 향했다. ​ 문을 열고 들어가, 우리는 현재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 나는 자리에 앉아 돌덩이처럼 생긴 편린을 바라봤다. 녹옥빛의 표면은 시스템의 문양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 틀림 없는 편린이었다. ​ ‘됐어.’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국 모로가도 얻기만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 강아린은 산장에 들어와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뭔가 아쉬움이 남은 듯, 손끝으로 벽과 가구들을 쓸어보며 눈길을 돌렸다. ​ “가기 싫다~” ​ “… 왜?” ​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그냥~ 너무 여유롭고 좋았거든.” ​ 나는 피식 웃었다. ​ “그럴 수도 있긴 하겠네.” ​ 강유성이 죽고, 그녀는 대부분의 업무를 떠안았다. 최근 들어 바쁘게 지내왔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 그녀는 문득 시선을 빛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 “근데 그거, 진짜 어떻게 쓰는지 안 알려줄거야?” ​ 나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그녀도 나중에 편린을 사용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미국 펜타곤 지하에 아주 꽁꽁 숨겨져 있지만, 언젠가는. ​ 나중에 혼자 사용해야 할지도 모르니, 지금 미리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 “잘봐.” ​ 나는 편린을 들어 그녀에게 보이며 말했다. ​ “편린을 왼손으로 강하게 쥐어.” ​ 심장에 가까운 손이 그쪽이다. 나는 직접 시범을 보이며 똑같이 행동했다. ​ “그리고, 눈을 감고 시스템을 호출해. 무슨 말인지 알지?” ​ 시스템, 즉 상태창을 호출하면 본인이 가진 권능의 목록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나는 실제로 시스템을 불러들였다. ​ ==== [권능: ] ==== ​ ‘쯧.’ 씁쓸했다. 사망회귀가 사라진 지금, 내 권능 칸은 텅 비어 있었다 ​ “그다음엔, 그냥 속으로 되뇌이면 돼. 시스템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그럼, 편린에서 빛이 터져나올거야.” ​ 나는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설명을 마쳤다. ​ 그녀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 “우와… 그렇게?” ​ “그렇지, 이렇게.” ​ ‘…?’ ​ 이렇게? ​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 그 때, 편린을 쥔 손에서 미친 듯한 진동이 전해졌다. 녹옥빛이 손가락 틈새로 새어나오며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 ‘개 씨발?’ ​ 나는 본능적으로 편린을 내려놓으려 했다. ​ 그러나 그 순간, 강아린이 내 손 위로 손을 덧댔다. ​ -꽈악 ​ 그녀는 내 손을 꽉 붙잡으며, 마치 놓칠 새라 단단히 깍지를 끼웠다. ​ “음~ 이렇게 하는 거구나.” ​ 이건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다. 완벽한 흡수의 전조, 내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졌다. ​ “야, 놔… 이거!” ​ 나는 혼란스러움에 소리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나는 온몸의 마나를 끌어올려 그녀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강아린 역시 거세게 마나를 끌어올려 저항했다. ​ 그리고는. ​ -텁 ​ 양 다리로 내 몸을 감싸며 양팔과 허리를 걸어 잠갔다. 강렬하게 조이는 힘에 허리를 비틀어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 그녀는 허리를 들어 올리며 내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말했지?” ​ 그녀의 눈동자는 깊고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 “편린은 너의 것이지만….” ​ 녹아들 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 “앞으로 너도 내꺼라고.” ​ 창밖을 힐끗 보니, 무너지는 세계가 마침내 산장 근처까지 도달했다.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 그녀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 “그런데··· 그거 알아?” ​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가 내 귀를 스치며 속삭였다. ​ “사실, 나도 너꺼야.” ​ 그녀의 속삭임이 끝남과 동시에 공기가 흔들렸다. 시간 여행의 전조였다. ​ 그와 동시에 편린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 그리고 내 시야는 다시금 백색으로 물들어갔다.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