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왜 그러냐고.” ​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아무리 봐도 틀린 소리를 하는데 그걸 좋다고 할 수는 없잖아?” ​ “그렇긴 한데… 서로 잘 맞춰가면서 하는 거지….” ​ 나는 천여울에게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며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듣는 시늉도 안 했다. ​ “…….” ​ 아, 얘는 됐다. ​ 머리가 이미 너무 커 있어서 내 말을 안 듣는다. 아니 정확히는 내 말만 듣는 것 같다. ​ 나는 결국 그녀를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옆에서 있는 윤채하에게 말했다. ​ “채하야….” ​ “응.” ​ 그녀는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대답했다. ​ “넌 왜 그래. 원래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 당차고 자신감 있고, 쭈구리는 스타일은 아니….” ​ 아, 원래 쭈구리긴 했나. 아무튼. ​ “… 나 원래 이런데.” ​ “…….” ​ 뭐라 하기가 또 애매했다. ​ ‘좀 주도적으로 해라?’ ​ 이것도 웃기다. 윤채하는 자신이 원하는 분야, 예를 들어 내 방 문을 따는 것과 같은 연구 과제에는, 그 누구보다도 주도적으로 달려드는 아이니까. ​ 단지 그 동기부여의 중심에 내가 있냐, 없냐에 대한 많은 차이가 있을 뿐. 나는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든 그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첨언했다. ​ “내가 혹시나 없으면, 혼자서라도… 네 판단을 믿고 움직여야지.” ​ “왜 없어.”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채하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동공에는 순수한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 “불가람 님이 하신 말, 기억 안 나?” ​ “뭔데.” ​ “나는 네 아이니까. 잘 챙겨야 한다고.” ​ “뭐?” ​ 방금 물음은, 내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나와 윤채하의 대화를 구경하던 천여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 “네가, 왜 해인이 아이야?” ​ 그 말에, 윤채하가 발끈하며 대답했다. ​ “알아서 뭐 하게.” ​ “…….” ​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나는 이 지독한 대화가 더 이어지기 전에 자리를 떴다. ​ 여기서 힘을 소비할 시간이 없었다. ​ “나 먼저 갈게.” ​ 내가 등을 보이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나도!” ​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휘휘 저었다. ​ “너네는 수업이 있잖아.” ​ 나는 없었고. ​ 나는 그녀들을 뒤로한 채, 펜트하우스의 내 방으로 돌아왔다. ​ 문을 닫고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지친 내 몸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나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워치로 뉴스 기사들을 확인했다. ​ ‘광둥성.’, ‘마력 분출.’. ​ 모든 키워드를 조합해 검색했지만, 아침에 본 속보 이후로 떠오른 후속 기사는 없었다. ​ “딱히 없네.” ​ 이러면 강아린에게 전달할 추가적인 정보는 없겠다. ​ 오늘 오후, 나는 강아린과 만나기로 했다. 광둥성의 마력 분출 건에 대해, 맹주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훈련으로 인해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 약속 장소는… 바로…. ​ 그냥, 아래 층, 강아린의 방이었다. ​ ​ 이건 오전에 나눈 메시지였다. ​ [belief_]: 오늘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시간 괜찮아? [RIN]: 어 유닛 수업 끝나면 괜찮을 것 같은데? [belief_]: 나도 그 수업 있어. 끝나고 볼 수 있어? [RIN]: 응, 당연하지. ​ 약속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이제 장소에 대해 얘기를 할 차례였다. ​ [belief_]: 어디로 가면 될까? [belief_]: 맹주 본사? 아니면 따로 식당이라도…. ​ 강아린의 답은 간단했다. ​ [RIN]: 내려와 ♥ [RIN]: 1층으로! ​ 메시지를 보고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 나는 방의 문을 열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강아린] 이라는 문패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 -똑똑. ​ 나는,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내가 한 번 더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들어 올리는 찰나…. ​ - 띠릭! ​ 날카로운 전자음과 함께, 도어락이 저절로 열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묵직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 “뭐야.” ​ 그러나 아무도 나를 맞이하지 않았다. ​ 아무래도 방 안에서 원격으로 연 듯한데. ​ “나 들어갈게?” ​ 나는 신발을 벗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 그녀의 방은 차갑고 깔끔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같은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분위기가 다르다. 방 안을 맴도는 것은 비싸 보이는 디퓨저의 향과… 눅진하고 뜨거운, 습기를 머금은 공기. 그리고 욕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물소리. ​ ‘물 소리?’ ​ “아린아?” ​ 대답은 없었다. 거실을 지나 안쪽으로 향하자 활짝 열린 문틈으로 그녀의 침실이 보였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 정확히는. ​ 침실과 이어진, 문이 반쯤 열린 욕실 안에서. 자욱한 수증기 너머로, 흐릿한 실루엣이 보였다. ​ 욕조의 가장자리에 한쪽 팔을 걸친 채 편안하게 몸을 담그고 있는 그녀. 강아린이었다. ​ - 찰랑. ​ 강아린이 몸을 살짝 움직이자 거품이 가득한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물 위로 드러난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와 가녀린 목덜미. ​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 위에 타고 내렸다. ​ “아 왔어? 미안. 아까 땀을 너무 흘려서.” ​ - 첨벙. ​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아린이 욕조 안에서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 - 촤아아악. ​ 하얀 거품이 그녀의 몸을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 자욱한 수증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실루엣은 봤다. 잘록한 허리에서부터… 여기까지 하자. ​ “옷 좀 입어!” ​ 나는 침실 문을 거칠게 닫았다. ​ “히히.” ​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문 너머로 그녀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 “다 됐어. 열어도 돼!” ​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잠시 문고리를 잡은 채 망설였다. ​ 약간의 심호흡과 문을 천천히 열었다. ​ 수증기는 어느새 옅어져 있었고 그 너머로 강아린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 그녀는 두꺼운 호텔식 가운 하나만을 걸친 채, 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었다. 목욕으로 달아오른 열기가 하얀 피부를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 “진짜 다 된 거 맞아?” ​ 뭐로 봐도 아닌데. ​ 그녀는 그런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 “그냥~ 이대로 얘기하자.” ​ 말을 마친 그녀는 나를 스쳐 지나가며 거실로 향했다. 스쳐 지나가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비누 향과, 그녀의 체향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근데 무슨 얘기야?” ​ 강아린은 거실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서며 내게 물었다. ​ “아 좀 중요한 이야기긴 한…?” ​ 난 당연히 식탁에 앉을 줄 알았는데. 강아린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그리고 다리를 쭉 펴며 살랑살랑 흔들었다. ​ “거기서 이야기할 거야?” ​ “응. 뭐 어때.” ​ 강아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하며, 소파에 더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마치 보란 듯이 한쪽 다리를 다른 쪽 허벅지 위로 꼬아 올렸다. ​ 그 움직임에 따라, 느슨하게 묶여 있던 가운이 더욱 헐거워지며, 그 틈으로 아슬아슬하게 허벅지 안쪽의 새하얀 속살이…. ​ 진짜 미치겠네. 자꾸 이상한 거에만 집중하게 된다. ​ 결국 강아린의 옆에 앉았다. ​ 강아린은 그런 나를 힐끗 보더니, 오히려 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 “뭐야? 무슨 이야기하려고?” ​ 나는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혹시 광둥에 마력 분출 일어난 거 알아?” ​ 내 진지한 표정에 강아린의 분위기도 바로 진지하게 변했다. ​ “어. 나도 오늘 아침에 들었어.” ​ 다행이다. 들었다니 이야기가 좀 편해질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근데 내가 보기에 좀 수상쩍은 부분이 있어서.” ​ 분위기가 살짝 진지해졌지만, 강아린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내 말을 기다렸다. ​ “저번에 상하이 습격 때 감지된 마력 파장. 그리고 이번에 광둥에서 나타난 파장. 둘을 비교 분석한 자료를 봤는데, 패턴이 미묘하게 다르더라고….” ​ “응.” ​ 강아린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쪽에 조사팀을 보내볼 생각은… 없어?” ​ 나는 약간 조심스러웠다. 나야 생각이 있고 근거가 있기에 하는 말이지만, 강아린의 입장에서는 또 다르다. ​ 길드의 운영, 특히 팀 파견은 온전히 그녀의 권한이었으니까. 자칫하면 월권행위처럼 느껴질 수 있을 터였다. ​ “응, 그래서 이미 보냈는데?” ​ “?” ​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강아린이 재차 말했다. ​ “이미 보냈어.” ​ “몇 팀 보냈는데?” ​ 강아린은 입술에 검지를 얹은 채, 붉은 눈동자를 요염하게 빛내며 미소 지었다. ​ “유세린씨 팀.” ​ “!!” ​ 이것보다 좋은 선택은 없다. 유세린이라면, 분명 흔적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걸 파헤칠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통찰안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조금만 더.' ​ 나는 혹시 모를 노파심에 말을 조금 추가했다. ​ “근데 내 생각에는 광둥만 조사하는 것보다는, 혹시 모르니 근처 지역까지…” ​ “응.” ​ 그녀는 내 말을 부드럽게 끊으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 “주변 지역도 샅샅이 뒤져보라고 했어. 혹시 모르니까. 특히… 바로 위인 후난성?” ​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에게 부탁하려고 했던 일들을 강아린은 이미 미리 다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 나는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 “끝이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 ​ 긴장이 풀린다. 이러려고 설득할 준비를 했나 싶기도 하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려던 순간이었다. ​ “흐응… 그래?” ​ 강아린은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파 위에서 스르륵 몸을 움직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끝? 정말 그게 끝이야?” ​ 내 옆으로 완전히 몸을 밀착했다. 그녀의 상반신에서는 목욕으로 달아오른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 “아쉽다… 많이 기대했는데….”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 어깨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르 목덜미를 감싸고 올라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 끝을 미끄러지듯 스쳤다. ​ 붉은 눈동자가 나를 집어삼킬 듯이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