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다. ​ 그때였다. ​ - 똑똑. ​ 아주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윤채하가 서 있었다. ​ 그녀는 막 샤워를 마친 듯,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살짝 젖은 주황빛 머리카락에서는 달콤한 샴푸 향기가 풍겨왔다. 분홍색의, 귀여운 오리 문양이 박혀있는 잠옷 차림까지. ​ 윤채하는 내 눈치를 살피며 서 있었다. ​ “왔어?” ​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 “응….” ​ 윤채하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문을 닫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 그냥 다시 내 방 갈까? 너도 편하게 자야 하는데….” ​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다. 나는 낮의 일을 떠올렸다. 윤채하가 이 방으로 온 이유. ​ 아까 그녀는 내기에서 이겨 받은 소원권을 사용해 동침을 요구했다. 당연히 이상한 뜻은 아니고, 그냥 같이 자고 싶다고 하더라. ​ 뭐가 다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 “자러 가자.” ​ 시간은 어느새 밤 11시. ​ 내 말에, 윤채하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한번 작게 끄덕였다. 우리는 내 방으로 향했다. ​ 그리고 안방의 문을 닫자마자. 나는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줬다. ​ - 츕. ​ “헥… 헤에….” ​ 한참 동안의 입맞춤 끝에, 나는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었다. ​ 윤채하는 숨이 모자랐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품에 기댔다. 터질 듯이 붉어진 뺨, 살짝 풀린 주홍빛 눈동자 그리고 젖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뜨거운 숨결까지. ​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 ‘같이 자줘어어어어어.’ ​ 뭐, 윤채하의 소원권이었으니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나는 그녀를 가만히 다독였다. ​ “하으… 흐읏….” ​ 그녀의 몸이 내 품 안에서 가늘게 떨렸다. ​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 봐.” ​ 나는 그녀의 머리와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흐으...." 내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는지, 윤채하는 내 품에 얼굴을 더 깊이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턱 밑을 간질이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자, 가쁘던 그녀의 숨결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떨리던 몸도 점차 잠잠해졌다. ​ 나는 그런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어,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눕혔다. ​ 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그저 순순히 내 손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 푹신한 시트 위로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내려앉았다. ​ “자자, 이제.” ​ 나지막이 말하며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킹사이즈의 넓은 침대는 성인 남녀 둘이 눕고도, 한 사람이 더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남았다. ​ 가온의 배려가 여기서 도움이 되는구나. ​ 윤채하는 내 팔을 벤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눈을 감았다. ​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달빛이 그녀의 뺨을 은은하게 비췄다. 상기된 홍조와 나의 흔적이 남아 살짝 부어오른 입술,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 “…….” ​ 윤채하는 아무 말 없이 내게 조금씩 몸을 붙여오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 “요즘··· 힘들지는 않아?” ​ 계속, 진심으로 궁금했던 내용이었다. ​ 그녀는 본래 이 메인 스토리의 중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가온이 아닌, 칼로스 아카데미에서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천재 마법사로서 평탄한 길을 걸었어야 할 아이. ​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이 흐름의 한 가운데로 끌어들였다. 성시우는 죽었고, 윤채하라는 존재가… 내게는 너무 필요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윤채하는 그의 빈자리를 우수하게. 아니 내 생각보다 훨씬 완벽하게 채웠다. ​ 그녀는 내 덕에 더 강한 힘을 얻었지만, 동시에 나 때문에 더 많은 훈련을 해야 했고. 앞으로는 더 위험한 적들과 마주해야만 한다. ​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 그러고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쾌락의 여운이 가신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는 그 어떤 때보다도 맑고, 또렷하다. ​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힘들어.” ​ 역시 그랬구나. 나는 미안한 마음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 “근데….” ​ 그러나 윤채하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내 가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 “너 없이, 칼로스에서… 마탑에서… 마법이나 연구하면서, 평생을 사는 게….” ​ 그리고 내 품에서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더니.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 그녀의 주황빛 눈동자가, 아주 강한 빛을 띠었다. ​ “그게, 더 힘들어.” ​ “…….” ​ “그러니까, 지금은 괜찮아. 행복해.” ​ 그녀의 얼굴에서 최근의 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인지하고, 스스로 선택을 한 천재 마법사의 눈빛. ​ 이게, 내가 알고 있던 윤채하의 눈동자였다. ​ “…….” ​ 나는 그런 그녀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의 당당함은 어디 가고, 윤채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 “아니… 그냥 네가 물어봐서….” ​ “채하야.” ​ 내 나지막한 부름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 “응?” ​ - 츕. ​ 나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댔다. ​ 기특해서. ​ 아주 기특하고, 또 사랑스러워서. ​ “헤윽….” ​ 놀라 굳어버린 윤채하의 몸. 나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 이건 착한 아이에게 주는 칭찬이었다. ​ ​ ​ ​ ​ ​ ​ ​ *** ​ ​ ​ ​ ​ ​ ​ 오후 11시. ​ 맹주(盟主) 길드 본부, 최상층에 위치한 강아린의 개인 집무실. ​ 방 안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채 서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 거대한 통유리창은 두꺼운 강철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고 오직 방 중앙의 홀로그램 테이블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만이 그녀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 테이블 주변에는, 이미 세 명의 여성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 강아린은 테이블 앞에 앉아 무표정으로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이제 검후(劍侯)가 된 유하나는 벽에 기댄 채 정해인이 준 동백검을 소중히 매만졌고. 하시온은 그림자 속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 슬슬… 마지막 인물이 올 시간이 됐다. ​ - 스윽. ​ 집무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마지막 인물인 천여울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평소의 장난기나 유혹적인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에 앉아있는 강아린을 향해 물었다. ​ “정말이야?” ​ 강아린은 대답 대신, 홀로그램을 손으로 쓸어넘겼다. 그러자, 중국 후난성의 위성 지도와 함께 유세린의 보고가 그 위로 떠올랐다. ​ “유세린 팀장의 보고야.” ​ “흐응….” ​ 천여울은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왔다. ​ “그러니까… 악신이 편린의 존재를 알아냈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가?” ​ - 짹. ​ 그녀의 말이 끝나자, 어깨 위로 한 줌의 빛이 모여들더니 순백의 작은 새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신조(神鳥), 가니였다. ​ “가니!” ​ 방 한쪽 그림자 속에 서 있던 하시온이 반색하며 다가와 가니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굳어있던 방 안의 공기가, 가니의 등장으로 아주 약간이나마 부드러워졌다. ​ 강아린이, 천여울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일단 그렇게 추정하는게 합리적이지?” ​ 그녀는 홀로그램을 조작해, 유세린이 보내온 마력 분출 데이터를 띄웠다. ​ “유세린 팀장의 보고에 따르면 분출하는 마기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어. 실제는 후난이지만, 광둥으로 보이게끔. 사실, 이것마저도 못 찾을 뻔 했다는 게 무서운 이야기지만.” ​ 그 말에 천여울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강아린이 탐지기를 펼쳐 놓지 않았거나. 설령 탐지기로 발견했다 하더라도 유세린이 없었으면 편린에게 가해지는 위협도 몰랐다는 것 아닌가? ​ “예상 세력도… 알 수가 없는 건가?” ​ 그때,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유하나가 입을 열었다. ​ 강아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알 수가 없어. 마인의 마력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구분이 가능할 뿐.” ​ 천여울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내가 편린이 있긴 하지만··· 우리끼리 해결하는 건 불가능해.” ​ 맞는 말이었다. 천여울이 편린을 얻은 시점이었기에 굳이 따지자면 불가능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녀들'만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억제력을 낳는다. ​ 결론은 하나였다. 늘 그랬지만, 결국 정해인이 필요했다. ​ “… 그럼 답은 하나네.” ​ 침묵을 깬 것은, 강아린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요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 “소문을 내야겠어.” 마력 분출은 맹주에서 단독으로 발견한 데이터. 따라서, 언론에 보도하기 위해서는 정제가 필요했다.​ 그녀는 홀로그램 테이블을 조작했다. 강아린의 손짓에 따라서 공중에 수많은 데이터와 이미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모아 순식간에 하나의 그럴싸한 보도자료로 만들어냈다. ​ “‘광둥 일대에서, 일전의 상하이 사태보다 강한 마력 분출 감지… 마인의 습격?’ 제목은 이렇게….” ​ 정해인이 이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가지게끔. ​ 지금까지 그녀들은 정해인이 주도하는 무대에서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 정해인이 스스로 이 무대로 걸어 들어오게 만들 시간이다. ​ “다들 여권 챙겨.” ​ 그는 편린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것이라면, 절대 허투루 넘기지 않을 테니까.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