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첫 주는 늘 그렇듯, 지루한 오리엔테이션으로 진행됐다. ​ 새로운 전공과 담당 교관들이 들어와 설명했다. 한 학기 동안 무엇을 배울지에 대한 이야기를 3시간 동안 듣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 학생들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 ​ 잡생각에 빠져 있었다. ​ - 후끈. ​ 나는 무심코 목덜미를 매만졌다. 폴라티 너머로도 피부가 화끈거리는 게 느껴진다. ​ 어제 천여울과 함께 잤다. 정확히는 내 방에 멋대로 들어와 내 침대를 차지하고, 나를 끌어안고 잤다. 당연히 그냥 자지는 않았고 밤새도록 잔뜩 물어뜯겼다. 더워 죽겠는데 목까지 오는 폴라티를 입은 것도 그 이유다. ​ 결국, 내 방에 들어왔던 미지의 침입자는 천여울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 ‘어떡하지?’ ​ 이제 방범이라는 개념이 아예 사라졌다. 어제는 천여울이었지만, 내일은 하시온, 그다음 날은 유하나나 윤채하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 계속 이렇게 노출된 채로 삶을 살 수는 없는데…. ​ 그때였다. ​ “이상으로, 2학기 이론 수업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겠습니다.” ​ 단상 위에 서 있던 도한성 교관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끄며 말했다. 그의 무심한 말에 모든 학생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 “다음 수업은… 포탈 통관소로 나와주시면 되겠네요.” ​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이론에 대한 부분보다는 실전이 중심이 될 시간이었다. “유닛 구성도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 구성되는 유닛은 기본적으로 랜덤. 그리고 거기서 추가적인 교관의 손길이 첨가된다. 형평성과… 조금이라도 더 배울 요소가 많게끔. ​ 그 말과 함께, 도한성 교관은 밖으로 나갔다. ​ 오전 수업은 이걸로 끝. 오늘은 금요일. ​ 나도 꽤 여유가 있는 날이었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몸을 풀며 기지개를 켰다. 이제 뭘 할까. 다른 애들 데리고 비고에 가서 쓸만한 장비라도 찾아볼까, 가온의 비고에는 좋은 것도 많지만, 그만큼 쓸모없는 잡동사니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 혼자서 그 모든 것을 뒤지는 것은 상당한 노가다가 될 터였다. ​ 뭐 그게 아니면…. ​ “정해인.” ​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옆에서 윤채하가 톡톡 쳤다. ​ “오늘 금요일인데.” ​ “…….” ​ “수업도 일찍 끝났고.” ​ “그래서?” ​ “이제 우리 뭐 해?” ​ 그녀는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둘이서 금요일에 뭘 한 적이 없는데 새삼스럽게 날 바라보는 윤채하. ​ 응? ​ 머릿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생각해보니까, 마침 일꾼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 “너 잘 걸렸다.” ​ “어?” ​ “나랑 일 하나 하자.” ​ 윤채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깊게 웃었다. ​ “응! 나는 좋아!” ​ 뭐가 그렇게 좋을까. ​ 나는 고개를 돌려 천여울을 바라봤다. 일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 나는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불렀다. ​ “천여울씨, 같이 가실래요?” ​ 내 순수한 제안에, 천여울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꿈틀했다. 그녀는 곧,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난… 괜찮아. 둘이서 잘 다녀와?” ​ 미묘한 표정을 보아하니 눈치챈 모양이다. 아쉽다. ​ 역시 천여울은 눈치가 빠른 편이다. ​ 내 일꾼 수집에서 탈출하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또 맡길 게 하나 있었다. 비고에서 얻어온 물품들을 그녀들에게 선물할 자리가 필요했다. ​ 오늘은 금요일, 펜트하우스에는 마침 또 좋은 공간이 있다. 마당의 바베큐장을 활용해서, 저녁도 같이 먹고, 자연스럽게 장비를 나누어 주는 시간을 가지면 완벽해 보였다. ​ 친목도 조금 다지고. ​ 나는 천여울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녀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 “여울아 그럼 고기 좀 사다놔줄래? 저녁에 바베큐 파티하자. 내가 구워줄게.” ​ 내 말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고기…? 좋지…. 그것만 하면 돼?” ​ “응.” ​ “알았어.” ​ 천여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세팅은 됐고.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딱 붙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윤채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 그녀는 아직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 “이제 가볼까?” ​ “응!” ​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춘ㅅ… 아니 윤채하를 데리고, 비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 ​ *** ​ ​ ​ ​ 가온의 비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아티팩트들 사이로 나와 윤채하는 서 있었다. ​ 국보급으로 취급받을 물건들도 분명히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별볼일 없는 것들도 함께 잠들어있다. ​ “여기 있는 것들 떠올려볼래?” ​ 내 말에, 윤채하의 주위로 수십 개의 아티팩트가 떠올랐다. 그녀의 주황빛 눈동자가 반짝이자, 물건들이 내 앞으로 날아와 정렬했다. ​ “잠깐 스탑!” ​ 나는 턱을 괸 채, 물건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 “…….” ​ 윤채하가 허공에 염동력을 멈췄다. ​ “아 이것도 아니다. 다음!” ​ “… 걔가 도망칠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 윤채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 그래도 벌써 윤채하를 제외하고 다른 아이들의 것은 찾았다. ​ 검사인 유하나에게는 대장장이의 숫돌, 천여울에게는 신조 가니의 갑옷, 무투가인 강아린에게는 각반, 궁수인 하시온에게는 흉부 보호대까지. 전부 내가 기억하는 한, 각자와 가장 시너지가 좋은 최상급 아티팩트들이었다. ​ 물론 가니의 경우 좀 더 커야 갑옷을 입을 수 있겠지만…. ​ “이게 모야 진짜. 놀러 갈 줄 알았….” ​ 옆에서, 염동력으로 옮기던 윤채하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꿍얼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서, 그녀를 그대로 내 쪽으로 끌어당겨 앉혔다. 내 다리 위로. ​ “앗?!” ​ 윤채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내 품 안에 완전히 갇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넌 뭐가 좋아?” ​ 나는 떠오른 아티팩트들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윤채하의 아티팩트를 고를 차례였다. ​ 윤채하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손을 뻗었다. ​ 허공에 떠 있는 수많은 아티팩트 중에서, 유독 번쩍거리는 화려한 지팡이 하나를 가리켰다. ​ [별을 뱉은 지팡이] ​ ‘…….’ ​ 안목이 좀 없구나, 너. 나는 그대로 지팡이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 윤채하는 자신의 선택이 거부당하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내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 “네가 골라줘….” ​ 나는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자 먼지 쌓인 기물들 사이에서, 작고 영롱한 은색 귀걸이 한 쌍이 내 손으로 딸려왔다. ​ [마력 순환의 귀걸이] ​ 정신 나간 용적의 마나를 가진 그녀에게 어울리는 아티팩트다. 원래는 성시우가 끼면 잘 어울릴 만한 것이지만, 지금의 윤채하에게도 굉장히 잘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 “이거 어때?” ​ 내가 귓가에 귀걸이를 가져다 대자 어깨가 움찔했다. 나는 그녀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 하얗고 작은 귓불에 조심스럽게 귀걸이를 걸었다. ​ 귀걸이가 걸리는 순간, 은은한 푸른빛이 그녀의 뺨을 환하게 비췄다. 그녀는 놀란 듯,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 “괜찮네.” ​ 나는 귀걸이의 밑부분을 살짝 눌렀다. 그러자 푸른빛과 함께 귀걸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안 보이게도 가능해. 아마 이게 더 편할 거야.” ​ 인비저블 모드다. 실용성을 위한 기능이었다. 그러나 윤채하는 다시 손을 귀로 향했다. ​ “…….” ​ - 찰칵. ​ 다시, 귀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게 좋아….”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 얼굴은 아까보다 더 붉어져 있었다. ​ ​ ​ ​ ​ *** ​ ​ ​ ​ ​ ​ “하나씩 와서 가져가.” ​ 나는 보따리장수 마냥, 아티팩트가 가득 담긴 거대한 주머니를 펜트하우스 바베큐장 잔디 위에 풀었다. ​ 약간 산타할아버지가 된 느낌이랄까. ​ 빛나는 아티팩트들이 쏟아져 나오자, 내 거대한 짐에 다른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어, 그거. 칼 갈 때 쓰면 돼. 시온은 그거. … 그게 작다고?” ​ 설마 저 흉갑이 작을 줄은… 그녀의 발육을 내가 간과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리폼을 약속했다. ​ “넌 뭔데?” ​ 천여울은 가니의 갑옷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윤채하에게 물었다. 그러자 윤채하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 머리를 풀고 다니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포니테일이었다. 덕분에 귀에 걸린 귀걸이가 반짝거리며 빛났다. ​ “어때?” ​ 윤채하는 자랑스럽게 물었다. ​ 천여울은 무표정으로 답했다. ​ “아~ 짬처리구나?” ​ “… 무슨 소리야?” ​ 윤채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천여울은 음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그렇게 각자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훈훈한 산타 할아버지 타임이 끝났다. ​ 이제, 진짜 파티를 할 차례였다. 천여울이 장을 봐 온 아이스박스가 열렸다. ​ “……?” ​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 최상급 한우와 흑돼지 목살이 가득한 아이스박스. 그런데 그 고기들 옆으로 전체 분량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정갈하게 손질된 장어들이 들어 있었다. ​ “웬 장어…?” ​ 내가 묻자 천여울은 생긋 웃기만 했다. ​ “몸에 좋잖아?” ​ 천여울의 말에, 다른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세팅은 이미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릴 앞에 섰다. ​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 - 치이이익! ​ 곧 그릴 위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됐다. ​ 그녀들은 자신의 접시에는 오직 육즙 가득한 소고기와 돼지고기만을 담았다. ​ 그러나 내 접시는 오직 장어만이 쌓여갔다. ​ “혹시 나도 소고기 좀….” ​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다섯 명의 여성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 “놉.” ​ “…….” ​ 나는 결국 소금구이, 데리구이, 그리고 새빨간 양념구이를 번갈아 가며 온갖 종류의 장어구이를 맛봐야 했다. 묵묵히 장어를 씹을 뿐이었다. ​ 서럽다 진짜. ​ “근데 다른 애들은?” ​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분명, 천여울에게 펜트하우스 전원을 불러달라고 전해뒀었다. 친목도 다지면 좋으니까. ​ “주서주으 집가다더데?” ​ 윤채하는 커다란 쌈을 입안에 가득 집어넣은 채, 웅얼거리며 답했다. ​ “어 그래… 마저 먹어.” ​ 요한도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는 금요일마다 교단으로 복귀하니까. ​ 그저 다섯 명의 여자들이 구워주는 장어를, 끝없이 먹을 뿐이었다. 이게 사육당하는 삶일까. ​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오늘 다 같이 해인이 네 방에서 자도 돼? 진짜 캠핑 온 느낌 좀 내게.” ​ 하시온이 먼저 제안했다. ​ 나는 입에 강아린이 넣은 장어 쌈을 물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차라리 그럴까 했었다. 각자 방으로 돌아가게 놔뒀다간, 어젯밤처럼 내 방에 몰래 숨어드는 녀석이 또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 차라리, 한곳에 모아놓고 감시하는 편이 낫다. 나는 꿀떡 삼키며 답했다. ​ “그러세요.” ​ 생각해둔 방어막도 있고. ​ 우리는 캠프파이어를 마치고, 남은 음식과 쓰레기를 순식간에 정리하고 내 방, 201호로 돌아왔다. ​ 펜트하우스는 어차피 굉장히 넓었다. 나는 옷장에서 손님용 이불과 베개를 잔뜩 꺼내, 거실 바닥에 쫙 깔아주었다. ​ 그리고. ​ “잘 자.” ​ 그대로 뒤돌아, 내 안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카타스트로피를 가로로 세워 이중 잠금장치를 만들었다. ​ 이건 절대 못 열 거다. ​ - 쾅쾅! ​ - 아 진짜! ​ “내일 보자. 내가 찌개 끓여줄게.” ​ 나는 그 모든 소리를 자장가 삼아,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 그리고 이불을 목 끝까지 뒤집어썼다. 오늘은, 정말로 편안한 밤이 될 것 같았다. ​ ​ ​ ​ ​ *** ​ ​ ​ ​ ​ 모든 이들은 포기했다. 전부 거실의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 그러나 윤채하는, 한번 꽂힌 것에는 포기란 걸 모르는 여자였다. ​ 그녀는 정해인의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아, 쉴 새 없이 허공에 손가락질했다. 이미 잠금장치를 풀어내는 것 까지는 성공했다. ​ 다음은 창을 어떻게 떨쳐내냐였다. 정해인의 창은 그 특성상 모든 마법을 왜곡했다. 따라서 그녀는 그 창의 역장이 내뿜는 마력의 파동을 역산하고, 또 재구성했다. ​새벽 내내. ​ 결국, 동이 트기 직전. ​ - 딸칵. ​ “드디어….” ​ 그녀는 잠겨있던 문을 열어냈다. ​ - 짹짹짹…. ​ 물론, 창밖에서는 이미 새들이 지저귀며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아…짜증나….” ​ 전혀 기쁘지가 않다. 윤채하는 투정을 부리며 문을 열었다. 밤새 그를 관찰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그냥 이렇게 된 거, 약속했던 찌개라도 끓이라고 깨워야겠다. ​ 방으로 들어갔다. 진한 정해인의 향이 코를 자극했다. ​ 그녀는 정해인의 침대 앞으로 향했다. ​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채, 아주 곤히 자는 모습. 미동도 없다. ​ 그녀는 그 평화로운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 그리고 씨익, 장난기 가득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이불을 확하고 젖혔다. ​ - 펄럭! ​ “기상!…아침 됐…?” ​ 그녀는 이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 눈앞에는, 하얀 이불을 들어 올리며 태산같이 솟아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성들에게 나타나는 아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 하지만 텍스트의 내용과, 실물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었다. ​ “…….” ​ 그녀의 얼굴이, 목까지, 귀까지, 터질 듯이 새빨개졌다. 윤채하의 뇌가 모든 연산을 멈췄다. ​ 그리고. ​ 윤채하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시 이불을 덮었다. ​ -스르륵…. ​ 그리고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 ​ ​ ​